모든 꽃들은 저마다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꽃들이 향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 꽃에서 난 과일들도 저마다 향기를 가지고 있다. 사과꽃 향기가 반드시 사과 향기는 아니다. 다른 과일들보다 향기가 아주 강한 모과 역시 처음 모과꽃 향기와는 다른 향기를 낸다. 봄에 꽃향기는 강한데 여름이나 가을에 과일향기는 약한 것도 있고, 반대로 꽃향기는 약한데 나중에 과일향기는 강한 것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봄에 벌을 부르는 향기와 여름이나 가을에 새나 짐승을 부르는 향기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귤도 과일향기가 강하고, 여름 과일인 커다란 수박도 향이 은은하다. 그런데 꽃도 과일도 향기가 없는데 아주 맛난 과일이 있다. 바로 감이 그렇다. 떫은 것은 입으로 깨물어야 알지 냄새로는 알 수가 없다.
감꽃도 향기가 없는데 마당에 팝콘처럼 탁탁 튀어오르듯 떨어진 것을 입 안에 넣어 깨물면 여간 떫지가 않다. 그런 감이 물러 홍시가 되거나 잘 깎아 말려 곶감이 되면 떫은맛은 간 곳 없고, 단맛이 과육 전체에 스며든다.
사람들은 내가 사과를 깎으면 다들 그 솜씨에 놀란 얼굴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어려서 감을 많이 깎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 집에 감나무가 많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늦가을이면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돌아오면 밤늦게까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감을 깎아야 했다. 밤새 껍질을 깎은 감을 싸리나무에 꿰어 그것을 새끼줄 사이에 고정시켜 덕대에 건다. 어머니만 감을 깎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 모두 밤늦게까지 감을 깎다 보니 나중엔 아이들까지 저절로 감과 사과까지 잘 깎게 된 것이다.
가을이 되면 부지런히 밤을 주우러 다니고, 또 이 밭둑 저 밭둑에 심어진 감나무에서 감을 따 곶감을 만든다. 감이 아니더라도 가을은 온통 과일의 세상이다. 밤과 대추는 다른 과일에 비해 알이 잘아도 몇 개 손에 들고만 있어도 속이 든든한 느낌이 든다. 빨갛게 익은 사과와 보름달만한 배는 맛과 가격에서도 단연 과일 중에서도 으뜸이다.
지난 가을 고향집에서 모과 몇 개를 따와 그중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모과답지 않게 잘 생겼으며, 또 하나는 크기도 작고 모양도 좋지 않고 게다가 상처투성이다. 봄부터 바람이 불 때마다 가시까지 있는 모과나무의 다른 가지가 이 모과에 숱한 상처를 냈다. 가지 끝에 매달려 바람과 함께 상모 돌리듯 공중에서 빙빙 돌기도 하고, 다른 가지에 얼굴이 긁히고 찔리고 때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면서, 지난 가을 두 차례의 큰바람까지 이겨 내며 악착같이 매달려 잘 익어서 이렇게 수확을 했다.어릴 때 한 집에서 자란 6촌 형까지 6남매가 모여 어머니가 계시는 본가의 몫까지 일곱 집이 김장하던 날 모과도 함께 땄다. 김장도 나누어 받고 더불어 고춧가루와 무도 받고 밤과 감과 콩도 받고 떡도 받고 모과도 나누어 받았다.
그때 수확하며 이 모과는 버리는 것들 쪽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린 날 온갖 내상 속에서도 그나마 이렇게라도 자란 내 모습 같아 내 몫의 모과 봉지 속에 함께 담아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상처가 많아서 그런가, 향이 아주 그만이다.
이렇게 향이 좋은데도 옛말에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다. 꼴뚜기는 오징어에 비해 작고 모양도 좋지 않으며 그렇다고 배를 따서 말릴 수도 없다. 그러니 냉동 냉장 보관이 안 되던 시절 당연히 모든 생선들 가운데 천덕꾸러기일 수밖에 없었다. 모과 역시 빛깔과 향은 그럴듯한데, 우선 모습이 울퉁불퉁하다. 어린아이 머리가 울퉁불퉁하면 ‘모과대가리’라고 놀리듯 불렀다. 생긴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과일처럼 그 자리에서 한 입 덥석 깨물어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딱딱하기가 돌 같은 데다 맛도 시어서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모과차나 설탕과 꿀에 재운 모과청도 두 번 손이 가야 가능한 일이다. 과일은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으뜸이다.
다른 과일은 과일전에 들고나는 것을 몰라도 모과는 온갖 설움 속에서도 한번 몸을 깔고 앉은 멍석에까지 오래도록 제 향기를 남긴다.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늘 자기가 있던 자리에 오래 향기를 남기는 모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책상 위에 놓아둔 모과를 보며 할아버지의 말씀도 되새긴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학창시절 반듯하지 못했다. 자랐다 해도 저 못생긴 모과처럼 안으로 상처투성이처럼 자랐다. 질풍노도의 시절이 따로 없었다. 고등학교도 남보다 몇 해 더 걸려 졸업했다. 그래서 내 모습을 보듯 못생긴 모과를 잘생긴 모과와 함께 일부러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그 모과가 해가 바뀌어 모습이 변했다.
상처 난 모과와 함께 있던 미끈한 모과는 해가 바뀌기 전에 이미 썩어서 버렸고, 그보다 작고 못생긴 것은 해가 바뀐 지 보름이 지나서야 갈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표면에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많았던 모과는 그 상처를 통해 과육의 수분들을 모두 배출해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빠짝 쪼그라들었다. 일부러 물에 적시지 않는, 10년이 가고 100년이 가도 절대 썩지 않을 ‘과일 미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무엇이 저 모과를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썩지 않게 하였는지. 어쩌면 저 모과를 썩지 않게 한 것이 바로 그 상처가 아닐까 싶은 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우리 삶도 이러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상처도 성장의 한 과정일 수 있고, 그 상처로 보다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 어떤 과일과 닮았을까. 과일을 바라보는 눈길 속으로도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지나간다. 그동안 귀한 지면을 내주셨던 <매경LUXMEN>에게, 그리고 오랜 기간 저의 마음산책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그동안 본 칼럼을 기다려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순원의 마음산책>은 2월호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소설가 이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