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와인의 가격이 정해지는 과정은 상당히 미스터리하다. 우리는 종종 수백만원짜리 와인이 출시되었다는 언론 기사를 접하게 되지만 그 와인이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혹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높은 가격이 책정됐는지 설명해 주는 기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대형 마트나 와인 전문점에서 판매하는 데일리 와인의 경우, 생산 지역과 포도 품종, 와인의 숙성 기간과 같은 카테고리에 따라 가격의 기대치가 정해져 있다. 이 와인들은 다양한 유통 경로를 거치며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 반면 고급 와인들, 특히 생산량이 매우 적은 와인들의 경우, 시장의 원칙보다 포도원 주인이 부르는 대로 가격이 정해지기 쉽다.
매년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프리뫼르(Primeur)’라고 불리는 와인 선물 거래가 진행된다. 프리뫼르에서는 주로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고급 와인이 거래되는데, 같은 기간에 ‘플라스 보르도(Place de Bordeaux)’라고 부르는 일종의 주식거래소 같은 시장이 형성되어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 가격이 정해진다. 중개인의 의견 수렴을 거치긴 하지만, 프리뫼르에서도 와인 생산자들이 가격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가격을 지나치게 높게 부르면 도매상들의 외면을 받거나, 블랙마켓에서 크게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어 장기적으로 와인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기 쉽다.
비록 생산자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기는 하지만, 폐쇄적으로 결정되는 다른 고급 와인들에 비해 신뢰할 수 있는 가격 구조를 갖고 있어서 최근에는 점점 더 많은 이탈리아와 미국의 고급 와인들이 프리뫼르에 참여하고 있다. 프리뫼르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고급 와인 생산자들도 이 기간 동안 정해진 가격의 가이드라인을 참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격에 출시된다. 가끔 아주 비싼 와인이라고 포장된 와인을 소개 받을 기회가 있는데, 가격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품질에 실망할 때가 있다. 이런 와인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와인이라기보다 아마도 포도원 주인의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그와 연결된 다른 비즈니스를 위한 마케팅 용도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장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니, 주인 마음대로 가격을 붙여도 그만이다.
고급 와인의 명성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 완성된다. 일단 좋은 품질의 와인이 생산되면 전문가와 소비자에 의한 평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중개상과 소매점을 거쳐야 하는 유통 경로 때문에, 특히 처음 생산된 와인들은 평가의 기회를 얻는 데조차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시장의 좋은 평가를 받더라도 고급 와인이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매년 같은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능력과 ‘장기 숙성’ 능력이기 때문에 검증에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물론 이탈리아나 프랑스, 나파밸리의 고급 와인들은 이미 검증된 이웃 포도원들 덕분에 장기 숙성에 대한 검증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미국의 컬트 와인이나 이탈리아의 슈퍼 투스칸 와인이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웃 포도원들이 오랫동안 시장에서 쌓아온 명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웃의 배경 없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쳐야 했을까.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와인을 만들고 있는 젊은 농부들이 시작하고 있는 꿈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호주를 넘어 세계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평가되는 ‘펜폴즈 그레인지(Penfolds Grange)’는 매우 흥미 있는 와인이다.
호주의 와인 역사는 1788년 죄수와 죄수를 감독할 관리로 구성된 필립 총독의 첫 번째 이민과 함께 시작한다. 이들을 태운 11척의 함대에 포도나무 묘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첫 번째 이민자들이 심은 포도밭은 새로운 기후에 살아남지 못했고, 이후 1832년 제임스 버스비가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들여온 포도 묘목들이 오늘날 호주의 와인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각각 15세기와 16세기에 시작한 미국과 칠레의 와인 역사에 비해 200년 정도 늦은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호주 와인을 대표하는 포도 품종은 시라즈다. 시라즈는 프랑스 동부에서 잘 자라는 시라와 같은 품종이다. 시라로 만든 와인은 매우 진하고 구조감이 좋아 장기 숙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과거에는 시라 포도의 발원지로 알려진 프랑스의 론 지역에서조차 시라로 완성된 와인을 만들기보다는 원액을 다른 지역에 수출했다. 보르도 와인 업자들은 날씨가 좋지 않은 해에는 시라를 보르도 와인에 블렌딩해 품질을 높였다.
1930년대에 들어 보르도 와인에 시라를 블렌딩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면서, 프랑스 론 지역의 포도원들은 점점 원액을 팔기보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만드는 와인들의 비중을 늘리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에르미타주(Hermitage)’ ‘코트 로티(Cotes Rotie)’ 같은 최고급 시라 와인들이 세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시라로 만든 호주 최고의 와인인 ‘펜폴즈 그레인지’가 태어난 것은 1950년대로, 프랑스의 최고급 시라 와인들에 비해서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다. 펜폴즈(Penfolds)는 영국계 이민자인 크리스토퍼 펜폴드(Chirstopher Penfold)와 그의 아내인 메리에 의해 설립되었다. 내과 의사였던 펜폴드는 와인이 환자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고, 처음에는 치료용 목적으로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가 만든 와인이 점점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많아지자 1844년 펜폴즈 와이너리를 설립하게 된다. 펜폴즈를 대표하는 와인인 그레인지는 그로부터 약 100년 후, 와인 메이커인 맥스 슈버트(Max Schubert)에 의해 탄생하였다. 슈버트는 1931년 평범한 사원으로 시작하여 1948년 양조 책임자로 승진한 입지 전적의 와인 메이커다. 그는 수석 와인 메이커에 오르자마자, 최고급 와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유럽의 와인산지들을 직접 둘러보고 시라로 만든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와인이 바로 펜폴즈 그레인지 1951년산이다. 펜폴즈의 와인 레이블에는 ‘BIN’이라는 단어와 숫자로 구성된 이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와이너리 셀러의 저장고 위치를 의미한다. 현재 펜폴즈 그레인지는 ‘BIN95’라는 이름과 함께 출시되지만 1951년산은 ‘BIN 1’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당시 펜폴즈의 경영진들은 그레인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0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하지만 맥스는 그 사이에서 비밀리에 와인을 만들었고, 이때 생산된 와인들은 와인 컬렉터들의 희귀 컬렉션으로 거래되고 있다.
펜폴즈 그레인지는 1995년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잡지인 와인스펙테이터의 올해의 와인에 선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는 첫 번째 빈티지의 그레인지가 생산된 지 약 40년 만이자, 펜폴즈가 설립된 지 약 150년, 그리고 호주의 와인 역사가 시작된 지 200년 만이다. 그래도 나파밸리 와인과 칠레의 최고급 와인들이 인정받는 데 걸린 시간과 비교하면 훨씬 짧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