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공산당 규제완화로 이동의 자유… 다양한 지역 음식 유행, 맵고 얼얼한 마라 요리 열풍
입력 : 2019.11.07 10:49:18
수정 : 2019.11.07 10:49:55
요즘 열풍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얼얼하고 매운 중국 마라 요리가 유행이다. 마라 열풍이 왜 이렇게 뜨거울까? 상식적 이유는 맵고 자극적이라 맛있는 데다 혀가 얼얼하게 매우니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고, 향신료에 중독성이 있어 한 번 맛들이면 빠져 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행의 뿌리를 찾다보면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마라 향신료의 역사, 그리고 중국사에서 향신료가 갖는 의미와 중국 사회구조와 경제발전의 변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시추안 하우스 비프 마라탕(사천식 소고기 전골). 썬앳푸드 제공
▶20년 전 중국에서 열풍 분 마라
마라는 마비된다는 저릴 ‘마(痲)’에 매울 ‘랄(辣)’자를 써서 얼얼하고 맵다는 뜻인데, 중국에서는 약 20년 전인 2000년 전후로 유행이 시작됐다. 이 무렵 북경에 맵고 얼얼한 중경훠궈 전문점이 생겼다. 이전 북경에는 주로 순한 맛 육수에 양고기와 소고기를 데쳐 먹는 훠궈가 주류였다. 조금 늦게 북경 시내 중심가에 마라 향신료에 가재를 볶은 요리인 마라롱샤가 등장했다. 2002년 무렵이다. 중경훠궈가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요리였다면 마라롱샤는 서민층을 상대로 한 음식이었다.
중경훠궈나 마라롱샤나 마라탕 등의 마라 요리는 중국에서도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 사천과 호남 요리다. 그런데 왜 2000년을 전후로 북경에 퍼졌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는데 유행의 배경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마라 요리의 기원을 알아보면 일단 그 뿌리가 꽤나 깊다. 마라 중에서 고추가 만들어내는 매운 맛, 라(辣)의 역사는 우리와 비슷하다. 남미가 원산지인 고추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명말청초, 우리나라 임진왜란 전후다. 일단 명나라 말 의학서인 <본초강목>에 고추에 대한 기록이 없다. <본초강목>이 발간된 해가 임진왜란 막바지인 1596년이다. 고추가 널리 퍼지지 않아 누락된 것인지 아니면 약용이나 식용이 아니어서 기재를 하지 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중국에 고추가 식용으로 전해진 시기는 17세기 초반 이후일 것이다.
물론 고추에 관한 기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전해진 산초라는 의미의 번초(番椒)라는 이름으로 1591년의 <준생팔잔>에 보이는데, 이 책은 의학서나 농학서가 아닌 관상용 식물을 기록한 책이다. 명나라 때 발간된 <초화보>에도 번초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번초는 꽃이 하얗고, 맛은 매우며 색이 빨간데 보기가 좋다”고 적혀있다. 다시 말해 관상용으로 심었을 뿐 식용이나 약용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고추 식용에 관한 기록은 청나라 문헌인 <화경>에 비로소 나온다. 번초는 무리를 지어 자라며 꽃이 하얗고 늦가을에 열매를 맺는데 머리가 아래로 거꾸로 매달린다. 초록색이었다가 나중에 주홍색으로 변하며 맛은 맵고 겨울에 후추를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 유추해 보면 고추가 처음에는 관상용 화초로 이용되었다가 나중에야 식용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반면 얼얼하면서 매운 맛인 마(痲)는 뿌리가 훨씬 깊다. 얼얼한 맛은 산초의 한 종류인 화자오(花椒)에서 나오는 맛인데 화자오는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시경>에도 나온다. 이어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굴원의 <이소>에도 보이고 <신농본초경주>에는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이 무렵 산초와 화자오가 퍼졌을 것이다.
옛날 산초나 화자오는 보통 향신료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이 후추를 약으로 여겼던 것처럼 고대 중국에서는 화자오를 불로초로 여겼다. 옛 사람들은 산초 종류인 화자오뿐만 아니라 향신료에 대해 묘한 신비감을 품었는데, 그 증거가 초방(椒房)이다. 초방은 한나라 때 황후가 거처인 미앙궁에 있던 방으로 산초가루를 흙에 섞어 벽을 발랐기에 생긴 이름이다. 이렇게 하면 은은한 향기가 나면서 산초의 기운을 받아 방이 따뜻해지는 온실효과가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초나무에는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인지 혹은 산초 향기가 리비도(Libido)를 자극하기 때문인지 초방에 머물면 자손을 많이 낳는다고 믿었다.
향신료에 대한 또 다른 환상이 옛날 새해가 되면 무병장수를 빌며 마셨던 초주(椒酒)다. 도소주라고도 하는데 한나라 무렵에는 산초를 술에 담가 마셨고 후추가 전해진 당나라 전후로는 술에 후추를 담아마셨다. 도소주라는 이름 자체가 한자로 잡을 도(屠), 되살아날 소(蘇)자를 써서 나쁜 기운을 잡아내 새롭게 기운을 살린다는 뜻으로, 정월 초하루에 이 술을 마시면 1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설날 산초나 후추를 넣어 만든 초주를 마시는 풍속은 중국은 물론이고 근대 이전까지 우리니라에도 이어져 내려왔다.
향신료가 질병을 물리친다는 주술적 믿음 말고 근본적인 이유는 동양은 한나라 이전, 서양은 로마 이전에 향신료가 워낙 값이 비쌌기에 약으로나 사용했던 것에서 생겨난 믿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추가 됐건 산초가 됐건, 혹은 산초의 한 종류인 화자오가 됐건 향신료를 구하기 힘들다보니 향신료는 조미료보다는 약으로 쓰였다. 옛날 의사들한테 향신료는 건강을 지켜주는 신비한 약재였고 도인들한테는 늙지 않고 신선이 되는 불로장생의 선약이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는 도교가 유행했던 시기다. 그런 만큼 도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후추나 산초, 화자오 등의 향신료를 먹으면 양생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향신료를 태운 연기를 마시며 호흡을 하면 수명이 늘어난다고 생각했고 방중술에서도 향신료는 더할 나위 없는 강장제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개혁개방에 따라 이동 자유로워 음식도 유행
중국에서 마라 음식이 양생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이나 중국인들이 마라 요리의 맛에 빠지게 된 이면에는 강력하고 자극적인 맛의 유혹과 중독성에도 이유가 있지만 그 속에는 중국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후추와 화자오 같은 향신료에 대한 원초적 욕망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양생에 대한 욕심, 원초적 욕망은 먼 옛날 고대인들의 환상일 뿐이고 마라 소스가 위장에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현대인의 상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2000년대 이후 마라 요리가 유행하고 있는 데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먼저 마라 음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옛날에는 귀했던 후추와 화자오가 대중화되면서 근대 이후 맵고 얼얼한 요리의 상당수는 사천과 호남의 서민음식, 시장 음식에 뿌리를 두고 발달했다. 예컨대 많이 알려진 마파두부는 청나라 말 시장에서 두부를 팔던 곰보 아줌마의 음식에서 비롯된 요리다. 중경훠궈도 노동자 음식에서 나왔다. 여러 유래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천 중경의 부둣가에서 일하던 노동자, 그중에서도 배를 밧줄에 묶어 강물을 거슬러 끌고 올라가던 선부의 음식이 뿌리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버리다시피 하는 소 창자와 천엽, 그리고 오리 내장 등 부스러기 고기를 긁어모아 펄펄 끓는 육수에 데쳐 먹고는 서둘러 배를 끌러갔던 것이 중경훠궈, 홍탕의 시작이다. 육수가 빨갛고 얼얼한 것도 끈적거리고 후텁지근한 사천의 날씨 탓도 있지만 강한 향신료를 쓰지 않으면 먹지 못할 정도로 음식 재료가 형편없었던 것도 홍탕이 생긴 이유다.
마라탕은 중경훠궈와 비슷하니 설명을 생략하고 마라롱샤 역시 근대에 생긴 시장음식이다. 롱샤(龍蝦)는 원래 바닷가재지만 마라롱샤의 재료는 가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 가재가 중국 토종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미국산 가재를 1920년대 후반 호남 지방에서 많이 먹는 황소개구리의 사료로 들여온 것이 널리 퍼졌다. 가재가 넘쳐나자 음식재료로 쓰기 시작해 마라 소스로 요리한 것이 마라롱샤다.
그러면 맵고 얼얼한 요리가 어떻게 중국에 퍼지게 됐을까? 여러 복잡한 배경이 있다. 일단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마라 음식에 익숙한 사천, 호남 출신이 많았다는 점도 있고, 경제발전으로 외식수요가 늘었다는 점도 크지만 개혁개방에 따른 이동의 자유가 허용된 것 역시 마라 요리가 유행하게 된 배경이다. 중국에서 마라 요리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말인 1990년대 후반 내지 2000년대 초반이다.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동시에 특유의 사회주의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여행의 자유, 거주 이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허가증 없이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마라 음식은 물론 양꼬치, 소고기 우육면 등 여러 종류의 지역 특산 음식이 수도 북경으로 그리고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계기 중 하나다. 마라 요리 유행의 배경에는 이런 시대적 변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