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 당나라 시인 두보가 읊은 시구절처럼 관복을 입은 채 허리띠 둘러매고 앉아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아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점잖은 체면에 꾹 참고 더위를 이겨내야만 했을까? 아니면 당나라 때 절세미인 양귀비처럼 더위를 참았을까? 양귀비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체형이 풍만했던 만큼 더위에 약했다고 하는데, 때문에 여름이면 옥으로 만든 물고기를 입에 물고 옥의 서늘한 기운을 삼키며 땀을 식혔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얼음 한 조각 구할 수 없어 힘겹게 여름을 보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고대에도 힘 있는 권력자들은 별별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더위를 식혔다. 살수대첩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한 수양제는 여름이면 아예 얼음 없이는 살지를 못했다. 더위에 지쳐 얼음 음료 100잔을 마셔도 갈증이 그치지 않아 의사가 항상 곁에다 얼음을 두고 지내도록 처방했다. 이를 본 궁녀들이 앞다투어 시장에서 얼음을 사들여 쟁반에 올려놓고는 수양제의 은총 입기를 기다렸다. 덕분에 얼음 값이 폭등해 얼음을 저장해 놓았던 상인들이 모두 일확천금을 벌었다고 한다. 송나라 때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기록한 <미루기(迷樓記)>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주로 두 왕조 전인 수나라 양제의 폭정에 대한 고사가 실려 있는데 주목할 부분은 내용을 적은 수나라 때가 됐건 혹은 책이 발행된 송나라 때가 됐건 이 무렵 이미 시장에서 상인들이 얼음을 팔았다는 부분이다. 무려 1000년 전 옛날 사람들도 필요하면 한여름에 얼음을 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도 얼음 조각으로 더위를 식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아이스 카빙(Ice Carving·얼음 조각)이 이미 이때 등장했다. 주인공은 양귀비의 오빠로 당 현종이 중용했던 양국충의 아들이다. 양국충의 아들이 해마다 여름이면 장인을 시켜 봉황과 동물 형상으로 얼음을 조각한 후 금띠로 장식을 해 왕공과 대신들에게 보냈는데 사람들이 그 옆에서 술을 마시며 여름에도 추운 기색을 보였다는 것이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는 현대인들 못지않게 여름을 시원하게 보냈던 것인데 왕인유가 당 현종 때의 진기한 이야기를 적은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적혀 있다.
옛날 사람들이 여름에 얼음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겨울에 얼음을 캐어 동빙고와 서빙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에 꺼내어 썼다. 다만 저장량이 적어 궁중이나 소수 양반, 부자들만 제한적으로 이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얼음을 쓰면서 여름을 보냈다.
조선의 양반들은 여름에 과일을 먹을 때도 얼음으로 차갑게 식히거나 얼려서 먹었다.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전집(星湖全集)>에 얼음을 깔아놓은 쟁반인 빙반(氷盤)에 신선한 연근이나 참외, 과일 등을 올려 여름에 더위와 갈증을 달랜다고 했다. 조선 초의 서거정 역시 “얼음쟁반에 여름 과일을 띄워라 / 오얏 살구의 달고 신 맛이 섞여 있다”라고 읊었고 또 “얼음쟁반에 담은 과일에 치아가 시리다”고 했으니 조선시대 양반들이 여름에 이용한 얼음이 만만치 않았다.
인조와 효종 때 활동했던 조 경은 <동사록>에서 얼음쟁반에 얼음사탕(氷糖)을 담아 손님을 접대한다고 했다. 여름에 설탕 결정체인 빙당을 얼음쟁반에 담아서 차갑게 식혀 먹었던 것이니 진짜로 얼린 ‘얼음 사탕’이다. 겨울에 아무리 얼음을 많이 저장했어도 여름에 얼음이 흔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식용 이외에 다른 용도로는 쓰기가 어려웠을 것 같지만 역시 짐작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여름에 생선을 보관할 때도 지금처럼 얼음을 재워서 잡은 생선이 상하는 것을 막았다. 겨울에 저장한 귀중한 얼음을 꺼내어 여름철에 어부들이 갓 잡은 생선을 저장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니 얼음이 생각보다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정조 10년인 1786년의 <일성록(日省錄)>에 관련 기록이 보인다. 웅어를 저장하는 위어소와 밴댕이를 보관하는 소어소는 별도로 저장한 얼음을 꺼내 쓰기 때문에 생선이 부패할 염려가 없지만 꿩고기를 보관하는 응사계(鷹師契)와 보통 생선을 보관하는 어부계(漁夫契)는 얼음 값으로 돈 500냥을 주어 날마다 얼음을 사서 채워 사용한다고 나온다. 그런데 지난해 상인들이 이익을 독점하려고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꿩고기와 생선 대부분이 부패했으니 웅어와 밴댕이처럼 아예 겨울에 별도의 용도로 얼음을 캐어 저장해 놓고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상소가 보인다. 여름에 생선과 고기도 냉동 저장했다는 기록이다. 현대인의 상상과 달리 옛날에도 엄청나게 많은 얼음을 소비했던 것이다.
역사 시간에 배워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는 음력 6월에 동빙고와 서빙고의 문을 열어 얼음을 각 관청에서 나누어 주었다. 직책에 따라 정해진 얼음 수량이 적힌 나무패를 보여주고 창고에서 얼음을 받아갔다. 겨울철에 저장한 얼음을 여름에 꺼내 쓴 역사는 뿌리가 깊다.
우리나라의 경우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인다. 신라 유리왕 때 얼음 저장창고를 만들었다고 나온다. 대략 1세기 초반이지만 이전에도 얼음 창고는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기원전 7세기 이전에 보이니 한반도에서 얼음 저장이 늦었을 이유가 없다.
얼음 저장 기록은 신라 지증왕 6년(506년)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에 11월이 되면 얼음을 저장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고려시대부터는 얼음저장에 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겨울에 저장한 얼음을 봄이 시작되는 춘분부터 여름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입추까지 공급했다고 나온다.
사용량과 기간이 길었으니 저장량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얼음 저장창고가 3군데 있었다. 지금의 동호대교 북단 옥수동인 두모포(豆毛浦)에 있던 동빙고, 한강변의 서빙고, 그리고 왕실전용 내빙고다. 조선시대 정부 재정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동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이 1만244정(丁), 서빙고에 13만4974정, 내빙고에 4만정을 저장한다고 했다. 내빙고에 저장하는 얼음 4만정 중 3만정은 강변에 사는 백성의 부역으로 얼음을 캐고 1만정은 돈 주고 산다고 했다. 지배층이 여름에 쓸 얼음 공급을 위해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수고가 심상치 않았다. 공적으로 저장한 얼음이 이 정도 규모였고 권문세가에서는 사적으로도 얼음을 채빙해 저장했다. 무신정권 때인 고려 고종 3년(1243년) 12월, 추밀원 부사 최우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얼음 창고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운반하니 사람들이 몹시 괴로워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인다.
사적인 얼음저장의 폐단 때문에 조선에서는 개별적인 얼음 저장을 금지했다. <국조보감>에는 단종 때 나라에서 저장한 얼음량에는 한계가 있어 초상이나 제사 때 얼음을 쓰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대부 이상의 가정에선 모두 얼음을 보관했으니 얼음 창고가 있는 집에는 얼음 저장 금지령을 해제하자는 주장이 실려 있다. 문제는 지배층의 수요가 많았던 만큼 공급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겨울에 얼음을 캐야 했던 사람들의 생활은 처참했다. 숙종 때 김창협이 ‘얼음을 깨다(鑿氷行)’라는 시를 썼는데 얼음 뜨는 사람들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얼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강가로 나온다. 장정들이 도끼를 들어 얼음을 찍으니 도끼질 소리가 용궁까지 들린다.” 이어지는 얼음을 뜨는 풍경이 참혹하다. “짧은 옷 맨발은 얼음 위에 달라붙고 매서운 강바람에 언 손가락 떨어진다”고 읊었다. 그 다음에는 한여름 양반집에서 시원한 얼음을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대광실 한여름 무더위로 푹푹 찌는 날, 여인의 하얀 손이 맑은 얼음을 내어온다. 얼음을 깨 앉은 자리에 두루 돌리니 대낮이지만 하얀 안개가 피어오른다. 웃고 떠드는 양반들 더위를 모르는데 얼음 뜨는 그 고생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더위를 먹고 길가에 죽은 백성들이 지나간 겨울, 강가에서 얼음 뜨던 자들이란 것을.”
그러고 보니 덥다고 투덜거릴 일도 아니고, 살기가 팍팍하다고 찡그릴 것도 아니다. 냉장고에서 얼음 한 조각 꺼내 더위를 식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