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안 좋은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2014년 들어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체감으로 위기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낄 정도다.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종전 최저 수준인 2%로 유지하고 있고 경제부총리가 통치권자의 신임을 기반으로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추진한지도 3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주가는 곤두박질을 치고 있고 체감경기는 겨울날씨처럼 썰렁하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해답은 정책에 대한 신뢰도(Policy Credibility)가 너무 낮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정책에 대한 신뢰도란 정부에서 발표한 정책이 실제로 집행되고 예상했던 효과를 발휘할지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로 정의할 수 있는데 크게 두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정책에 대한 신뢰고 다른 하나는 정책집행자에 대한 신뢰다.
2008년 몰아닥친 세계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이 집행한 양적완화(QE)의 결과를 분석해보면 정책 신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금융위기는 어느 작은 한 나라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세계 금융 시스템을 마비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이때 대표적으로 시작된 경기부양책이 양적완화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인 FRB나 중국의 인민은행, 일본의 일본은행, 유럽연합의 ECB 등이 집행한 양적완화는 규모 면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 6년이 지난 지금 주요국의 통화정책 효과는 전혀 판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권한을 똑같이 부여 받았지만 양적완화 정책을 리드하는 중앙은행 총재들의 면모부터 다 같은 중앙은행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선 연방준비은행(FED 또는 FRB)의 당시 벤 버냉키 총재가 포함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양적완화를 이끌었다. 그 FED의 모태는 1791년 설립된 The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다. 그렇지만 현재 FED는 연방준비법에 의해 1913년에 정식으로 출범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FED는 경제공황과 제1·2차 세계대전, 월남전, 석유파동, 금본위제(Gold Standard) 철폐, 부동산 시장 붕괴, 세계 금융위기와 수많은 불경기에 대처하는 선봉에 섰고 이 과정에서 풍부한 통화정책 노하우를 쌓았다. 이러한 풍부한 정책경험이 있기에 FED는 시장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얼마나 권위가 높은지 ‘FED에 맞서지 말라’는 증시 격언까지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진짜 FED가 가진 위력의 근원은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서 보장받은 정치적 중립성(Political Independence)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FOMC 위원들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한 국가의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이기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이 보장됐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얼마나 방어벽이 쌓여 있느냐가 관건인데 FED 총재 4년 임기와 금융통화위원 16년 임기가 이를 보장한다고 할 수 있다.
추가로 대부분 저명한 경제학자로 구성된 FOMC 위원 12명 역할 또한 중요하다. 이들은 다수결 원칙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는데 정치적 컬러를 떠나 통화정책이라는 명분으로 일사분란하게 소통하고 있다.
덕분에 FED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양적완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여 결국 위기에 빠진 금융시스템을 구해냈고 경제를 회복세로 이끌었다. 지금 다우지수가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10월에 찍은 전 고점 1만4223보다 24%나 높은 1만7634(11월 15일 기준)에 와 있는 것도 그 덕이다. 2009년 10월 바닥을 통과한 실업률은 지난 10월 현재 5.8%로 회복되었다. 양적완화 정책과 정책집행자들에 대한 높은 신뢰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과연 그 양적완화가 성공했을까?
일· ECB 양적완화는 성과 미미
일본과 유럽연합의 중앙은행이 비슷한 여건 속에서 비슷한 규모로 집행한 양적완화의 결과를 보면 그 차이가 바로 나타난다.
일본의 닛케이225 지수는 1990년 최고치인 3만8000포인트를 통과한 지 25년이 지난 현재 1만7490에 와 있다. 2008년 10월의 전 저점 6994에 비하면 150% 상승했다지만 초라한 성적임에 분명하다. 최근 일본은행은 잃어버린 25년의 망령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불투명한 상태로 들어가는 경제의 불씨를 살리려고 새로운 양적완화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동안 추진해온 수많은 통화정책이 모조리 효과가 없었는데 이번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과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멤버들의 신뢰가 손상되기 시작한 지 25년이나 지나면서 이미 믿음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일본은행이 출범한 1942년 이후 중앙은행 총재가 18번이나 교체되었고 총재를 포함한 9명의 통화위원 대부분의 임기는 5년 이내의 단임으로 끝났다. 미국과 반대로 많은 임명직 위원의 자리는 정치인 출신으로 채워졌다. 일본은행의 리더십이 외풍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같은 기간 동안 FED 총재는 9명에 불과했다. 앨런 그린스펀 전 총재의 경우 18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켰다. 정책의 연속성을 지키지 못하는 일본은행이 시장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하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시장의 신뢰를 언급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너무 많다. 1999년 유로화 탄생과 함께 출범한 ECB이기에 다른 선진 중앙은행처럼 통화정책을 정책답게 추진하기에는 역사가 너무 짧다. 게다가 정치적 여건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화폐는 통일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미국연방처럼 통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담하다. 2011년 7월 본격적으로 몰아닥친 유럽금융위기는 현재도 진행 중인데 위기진화의 선봉을 맡은 ECB의 위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고 있는 모습이다. 그 파장으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금융시장은 큰 홍역을 치러야 했다. 엄청난 규모의 양적완화를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은 다시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FED처럼 시장이 신뢰할 때까지 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계속 미지근한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책 효과가 당국의 신뢰도와 강하게 연동되어 있다는 점은 경기부양에 안간힘을 쓰는 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한국경제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작은 정책들을 찔끔찔끔 내놓을 때가 아니라 국민이 신뢰할 만한 정책으로 다가가야 한다.
한국은행 역시 효과가 미미한 금리정책을 넘어 그 이상의 수단으로 신뢰를 회복할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정부와 FED가 추진했던 것처럼 지금은 시장에서 신뢰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도 높은 정책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아울러 보다 근원적으로는 한국은행이 미국의 FED처럼 소신껏 통화정책을 펼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시키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