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네 가지를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 왕으로부터는 활동할 군현의 이름이 기입된 봉서(封書)를 받았다. 일종의 임명장이다. 승정원에서는 승지로부터 직무수행 사항이 8도별로 조목조목 적힌 80쪽 분량의 팔도어사재거사목(八道御史賚去事目) 한 권을 받았다. 마패도 받았다. 말 징발과 문서 날인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놋쇠로 만든 자, 유척(鍮尺) 두 개를 지급받았다.
봉서 겉에는 ‘남대문을 나간 뒤 열어보라(到南大門外開坼)’거나 ‘동대문을 나간 뒤 열어보라(到東大門外開坼)’고 쓰여 있다. 정해진 대문 밖에서 임무를 확인하면 목적지로 직행했다. 시중을 드는 하급 관리 한두 명을 데리고 당일 출발하는 게 원칙이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위장을 하고 민심을 들어야 하는 암행어사에게 25cm 길이의 놋쇠 자의 용도는 분명했다. 민생이 공정하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달라는 취지다. 우선 관아에 있는 곤장과 같은 형구 크기가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지 확인하고, 사체를 검시할 필요가 있을 때, 또 도량형을 임의로 사용해서 세금 징수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사용됐다. 지방 수령이 곡식이나 옷감, 특산물로 세금을 거둘 때 제멋대로 눈금이 그려진 자와 되박으로 민초들을 수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기준이 흔들리면 판단에 혼선이 오고 사회를 뒤흔드는 요인이 된다. 그런 점에서 암행어사의 상징은 마패보다는 유척이 돼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사회가 복잡할수록 공정한 기준은 공기와 같다. 기준이 흔들리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다. 사회적 비용은 치솟고 경쟁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곳곳에서 불거져 나오는 사례는 우리가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용평가회사들이 내놓는 기업 신용등급은 회사채, 기업어음(CP), 주식 투자 때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런데 신용평가회사들이 기업들에게 신용평가 일을 따올 때 등급 장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회사에 일감을 주면 등급을 좋게 주겠다는 약속을 해 실체보다 높은 등급을 준 것이다. 동양그룹 사태 때는 법정관리 한 달 전에야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이 낮춰졌다. 2012년 법정관리를 신청한 웅진도 하루 전까지 A등급 지위를 누렸다. 오비이락은 아닐 것이다.
3대 신용평가회사에서 최우량인 A등급 이상 기업비중이 2000년 27.2%에서 지난해 77.4%로 무려 3배 이상 뛰었다. 투자적격 기업의 부도율도 치솟고 있다. 못된 관습이 뿌리를 더욱 깊고 단단하게 내린 탓이다. 자본주의 투자의 ABC인 위험과 수익 간 상관관계 원칙도 덩달아 무너져 내리게 생겼다.
교통요지에다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옛 서울 단국대 부지의 한남 더힐. 민간시행사가 건설한 임대주택의 경우 2년 6개월이 지나면 시행사와 입주자 간 협의를 통해 소유 분양으로 전환가능한 곳이다. 시행사와 입주자 단체가 적정가를 얼마로 할 것이냐를 각각 산정했다. 일을 맡은 감정평가법인이 제시한 대형 평형 아파트 시세는 최고 2.7배까지 차이가 나 감정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색해질 정도다. 평가법인이 이 감정으로 받은 수수료는 모두 9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결국 국토교통부가 개입해 양측 모두에 부적합 판정을 내리고 감정평가 수행업체를 징계 처분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남 더힐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임대아파트가 아니고 사인 간의 계약에 따라 이뤄지는 평가인 만큼 제3자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으나 사회적 신뢰를 잃은 처사임은 부인할 수 없다.
기업의 투명성도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제값을 못 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회계 투명성이 한국과 비슷한 국가경쟁력의 오스트리아 수준이 되면 최소 5% 이상 시가총액이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신용평가회사나 감정평가법인, 회계법인은 하나같이 엄정한 검증을 거쳐 사회적 잣대로서의 기능을 위임받은 전문가 집단이다. 문제는 공인된 전문가와 전문가 집단이 신뢰를 잃을 때 우리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문가 집단의 탐욕을 일반인과 구별해 더욱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가의 시위(Occupy Wall Street)를 불러온 것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초래된 것도 사회의 잣대 역할을 주문받은 전문가 집단이 제 몫 챙기기에 눈이 멀어 발생한 측면이 크다. 현대판 암행어사 출두라도 외쳐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