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의 비상을 꿈꾸는 모든 나라들에게 대한민국은 희망의 상징이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에 뒤처져 좌절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나라가 이제는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을 설레게 한다. 해방 후 혼란과 전쟁을 겪은 나라들에게 대한민국은 희망과 반전의 드라마를 제공한다.… 선진국들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달성하고 그 경험과 비전을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높이 평가한다.”
내로라하는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 국립외교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머리를 맞대고 이명박 정부 시절 펴낸 <대한민국 글로벌 리더십>의 한 대목이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의 미래가 되고 선진국과 함께 호흡하는 수준의 국격을 갖춘 나라로 평가받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세계 13위 경제규모와 세계 9위 무역국, 1인당 국민소득 2만6000달러에다 빚을 뺀 1인당 순자산이 2억1000만원이라니 그런 줄 알았다.
한 달 넘게 온국민이 상주가 되는 비극의 나라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도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찾아 계단을 내려가는 선생님들 얘기에 눈앞이 흐릿해진다. 탈진할 때까지 아이들을 밀어올리고 물에 잠긴 여선생님 얘기에는 고개가 절로 떨구어진다. 시간이 가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아직 많이 이른가보다. 불쑥 나오는 한토막 뒷얘기에도 울컥하는 일이 반복되는 게 나뿐만은 아닐 성 싶다.
이제 대한민국은 희망의 상징이 아니라 반면교사가 되고도 남는 나라라고 인정하자. 대통령이 서둘러 내놓은 국가 개조를 놓고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이 칼자루를 휘두르는 게 맞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 꺼내야 할 메스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효력을 발휘한다면, 유가족들의 슬픔을 다독이고 국민들이 무력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반의 대책은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부처와 청을 동강내 새 조직을 출범시키고, 견제와 감독 기능을 작동 불능상태에 빠뜨린 끼리끼리 문화의 본산지 ‘관피아(관료+마피아)’의 설 자리를 확 줄인단다.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올라선 삼성전자의 경쟁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재의 다양성과 성과에 상응하는 보상과 퇴출 시스템이 그 뿌리다. 지방대 출신도 실력만 있으면 중용되고 수시로 인재를 충원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큰 방향은 결국 개방성과 전문성이다.
관피아 근절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국민도 많지 않겠지만 그나마 정치권을 뺀 반쪽짜리 낙하산 찢기대책은 실망스럽다. “정치권에 몸담아보니 갈 만한 자리가 수두룩하더라”는 말 속엔 권력을 쥔 자는 당연히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는 오만함이 배어있다. 인재풀이 손바닥만 하던 시절이 한참 지났는데도 선거철이면 전문가로 포장된 ‘폴리페서’가 요란하고, 법조인 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인재 발탁은 편협돼 있다.
관피아 척결은 평생 갑(甲)질만 하는 관료 출신을 한방에 훅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통쾌함을 물씬 풍긴다. 그러나 감정만 앞세우면 소중한 사회적 자산을 사장시킬 수 있다. 정년 보장과 퇴직 공무원들의 노하우를 건전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게 전제돼야 한다. 그러면서도 부적격자 퇴출 장치가 제대로 가동돼야 한다. 지난해 중앙부처 공무원 26만명 가운데 불과 11명만이 무능을 이유로 퇴출되는 시스템에서는 효율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능과 악질이 동의어는 아니지만, 악질(Asshole) 1명이 있는 팀은 그렇지 않은 팀보다 성과가 30~40% 떨어진다거나, 악질 1명이 선한 사람 5명의 영향력과 비슷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합리적인 퇴출제도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간 전문가에 대한 공직 출입 장벽도 보완해야 한다. 공직 입문 때 연봉이 깎이고 민간에 나갈 때 취업제한을 받는다면 우수한 인재는 기대난망이다. 앞서 로스쿨 도입이 현대판 음서제로, 계층 간 이동을 막고 있듯 행정고시 제도변화에 대한 공론화 과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법과 규정을 바꾸는 이같은 하드웨어식 개혁은 껍데기의 위안에 그칠 공산이 크다. 나머지 절반의 대책은 도덕성 회복과 인성 함양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세월호가 우리 주변을 노리고 있다. 지하철, 놀이터, 유흥장 같은 시설물뿐 아니라 하루 14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교통사고까지 모양만 다를 뿐이다. 결국은 다시 기본이다. 나를 내세우기 전에 전체를 생각하고, 내 역할과 행동거지를 고민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