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는 자연의 강이자 문명의 강이다. 황하는 칭짱고원(靑藏高原)에서 발원하여 6000여 킬로미터를 굽이쳐 흐른 후 마침내 황해에 도달하는 거대한 자연이다. 동시에 황하는 서에서 동으로 중원지방을 관통하며 그 연변에 셴양(咸陽), 시안(西安), 뤄양(洛陽), 정저우(鄭州), 캐펑(開封), 지난(濟南) 등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도시들을 만들어낸 강이다. 황하는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밀림 속을 유유히 흐르는 강이 아니라 유구한 세월 동안 인간세상의 한복판에서 혼탁한 세상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흘러온 문명의 강이다.
황하는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의 상징이다. 자연의 소산인 황하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만리장성이 자연의 맥에 따라 굽이치며 이어지는 모습에서 우리는 신성한 동물인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을 상징하는 황룡(黃龍)은 기원적인 측면에서 황토의 대지를 남에서 북으로 꿈틀거리며 서에서 동으로 나아가고 있는 황하가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황하를 ‘무친허(母親河:어머니의 강)’이라 부른다. 저 아득한 세월로부터 중원지방을 관통하며 동북아시아 문명의 중심인, 장대한 중원문명을 낳은 강이 바로 황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동북아시아 문명권의 사람들은 황하에 대한 일종의 외경심과 원초적인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며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나에게 황하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심어준 것은 할아버지지만 자란 후 틈날 때마다 황하를 찾게 만든 것은 황하가 동북아시아 문명의 모태라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내 나이가 5-6살이었던 시절 할아버지는 천자문을 가르치는 틈틈이 ‘요순(堯舜)시대’가 얼마나 이상적인 태평성대였는지를 자주 이야기했다. 당시 나는 아무런 지식도 없이 할아버지의 말씀을 그저 옛날이야기의 하나쯤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동북아시아의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으로 기억되는, 이 전설적인 ‘요순’이란 두 성군이 황하의 홍수문제와 씨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20살 이후 중국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였다.
20세기 중반 중국이 근대적인 토목기술에 힘입어 황하의 수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들이 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바로 황하의 홍수문제였다. 과거 수천 년 동안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원지방,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난폭한 황하의 홍수에 대해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가졌을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황하를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도 이런 점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요순(堯舜)시대’라는 전설적인 파라다이스는 사실의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중원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이상세계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 황토입자로 뻑뻑해진 황하가 범람하는 공포와 홍수 없는 시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만들어낸 일종의 희망이다.
황하 호구폭포
(위)중국 용 사진 난징에서 서해 상징인 용 모양 등을 설치하는 모습, (아래)삼문협
1990년대 말의 어느 가을 아침 지난에서 황하와 처음 마주쳤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 머리 속의 황하는 도도하고 장엄하게 흐르는 흙탕물인데 눈앞의 황하는 실개천처럼 가늘어진 기진맥진한 황하였다. 그 때 내가 만난 10월 말의 황하는 난징(南京)의 양자강처럼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물안개로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수량의 부족 때문에 병약한 노인처럼 누워 있었다. 발바닥에 퇴적된 황토입자의 탄력성을 느끼며 강변을 걷는 동안 내 눈은 강 위의 준설선과 강변의 포크레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귀는 노쇠한 황하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제어할 수 없는 난폭한 용이라고 생각했던 황하가 어떻게 이처럼 흐름의 숨결조차 제대로 감지할 수 없는 삐쩍 마른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인지 너무 당혹스러웠다.
황하가 역사 속에서 마지막으로 그 난폭성을 보여준 것은 1938년이었다. 당시 쟝졔스(蔣介石)는 일본군의 진격 앞에서 과거 중국이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와 같은 북방유목민족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홍수를 일으켰던 것을 본받아 캐펑 근처에서 황하의 제방을 폭파했다. 노아의 대홍수에 방불한 이 사건은 전략적 성공을 거두기는커녕 무고한 인민들만 희생시킨 끔찍한 재앙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허난성(河南省), 산둥성(山東省), 안후이성(安徽省), 쟝쑤성(江蘇省) 일대에서 89만여 명의 사망자와 1250만여 명의 이재민을 낳은 이 사건은 최고 권력자의 미필적 고의가 저지른 대학살이 되었던 것이다.
1945년부터 1947년에 걸쳐 쟝졔스가 폭파한 황하의 제방을 튼튼하게 수리하여 황하가 북쪽의 옛 물길로 다시 흐르게 만든 것은 미국 출신의 토목기술자 O. J. 토드(Todd)였다. 1919년에 중국에 온 O. J. 토드는 자기 직업에 대해 신비적 신념을 가진 엔지니어였다. 그는 중국 인민들에게 수천 년 동안 경외의 대상이었던 난폭한 황하를 자신이 가진 합리적 과학기술로 순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며, 그 신념을 혼신의 힘을 다해 실천해 나간 사람이었다. O. J. 토드는 황하를 인간이 자비를 구걸해야할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교육하고 길들일 수 있는 사람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그는 이 신념을 다음처럼 표현했다. “나는 엔지니어로서 모든 비의 신이 왕좌에서 추방되어 잊혀지고, 청동암소가 제방에서 철거되고, 용신을 달래는 제사가 준공식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며, 그 대신 하천수력학이라는 과학에 대한 숭배가 성행하기를 원한다”라고.
이러한 믿음과 의지로 O. J. 토드는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황하가 “인간의 의지에 따르도록, 인간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일정한 수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토목사업에 매진했다. 그는 장개석과 모택동이 중국의 헤게모니를 놓고 치열하게 싸울 때도 군사·정치적인 문제로부터는 완벽한 중립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을 번영시키고 가난에 신음하는 인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수리관개 시설을 잘 갖추고 오지에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후 O. J. 토드가 가졌던, 과학적 지식과 기술에 대한 믿음을 잘 학습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엔지니어들에 의해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오로지 하느님이 보우하사만을 빌던 시대는 끝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엔지니어들은 란저우(蘭州) 근처에 유가협(劉家峽) 댐을 건설하고, 뤄양 근처에 삼문협(三門峽) 댐을 지음으로써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황하의 물을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관리하던 시대는 전설 속의 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생각에 잠겨 한 시간 가까이 강가를 산책하는 내 앞에 아침 6시의 황하는 드넓은 강폭을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구에 가까운 지난에서 바라본 황하는 6000킬로미터를 달려온 강답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넓었으며,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과 “물이 열 말이면 진흙이 여섯 말”이란 말을 만들어 낸 것처럼 혼탁했다. 그렇지만 강물은 드넓은 강폭의 중심에서만 참으로 초라하게 흐르고 있었다. 상류에서 농업용수로 많은 물을 소비하고 두 개의 거대한 댐이 만들어진 탓이었다. 그 결과 옛날부터 맑은 우물로 유명했던 지난 일대는 황하의 수위가 낮아짐으로써 우물이 고갈되고 땅이 건조해지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내가 상류인 청해성에서 보았던 푸른 황하는 자연의 강이었지만 하류인 지난, 캐펑, 정저우에서 본 황하는 자연의 강이 아니었다. 중원지방의 황하는 인간에 의해 끔찍할 정도로 훼손돼 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맥없이 흐르고 있었다. 황하연변의 사람들이 새로운 근대적 기술로 황하를 길들여서 강의 몸통에서 한 방울이라도 더 많은 피를 빼내기 위해 각축을 벌였기 때문이다. 황하의 물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기에 각 성(省)별로 사용량을 일정하게 할당하는 협정까지 맺었겠는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순치된 황하, 자연의 야성을 상실한 황하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 인간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재앙을 낳고 있다. 일찍이 찬란한 동북아시아 문명의 발원지이자 중심지였던 중원지방이 날로 사막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위험성이 없어진 황하가 새로운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황하와 마주칠 때마다 인간의 문명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낼 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홍정선 교수는
문학평론가이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이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인지 ‘문학의시대’를 창간(1982년),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을 거쳐 올해 초까지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역임했다. 평론집 <역사적 삶과 비평>, <인문학으로서의 문학>, <프로메테우스의 세월>이 있고, 공편으로 <문예사조의 새로운 이해>, <한국현대시론사 연구> 등을 펴냈다.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 제8회 ‘소천비평문학상’, 제42회 ‘현대문학상(평론부문)’을 수상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8호(2013년 11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