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는 8년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인 작가입니다. 그는 장편소설 <The Remains of the Day>(한국어판 ‘남아 있는 나날’로 번역)로 1989년 부커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그가 노벨상을 받은 2017년 노벨위원회로부터 특별히 언급되는 등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으로 굳어졌습니다. 이후 1993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명배우 안토니 홉킨스가 주인공 스티븐스 집사 역을 맡아 열연하며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결과 1994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걸작 반열에 올랐습니다. 한 인간의 직업적 소명, 구시대적 가치관의 전복, 대영제국의 쇠락, 그리고 삶의 회한을 작품으로 영화는 평가되는 이 작품은, 단지 감상에 빠진 한 노인 집사의 회고담만은 아닙니다. 나치에 부역했던 한 비윤리성을 유럽 전체가 망각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꼬집는, 그 과정에서 기억과 재현과 윤리를 심층적으로 다룬 작품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중심인물은 스티븐스. 그는 1920년대 영국에서 존경받는 신사였던 달링턴 경(卿)을 모셨던 집사입니다.
달링컨 가문은 200년 넘게 거대 저택을 소유해왔고, 스티븐스는 그 저택에서 집사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주인을 모시고, 이를 통해 ‘위대함‘을 고민합니다. 그는 달링턴 경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추앙했습니다. 희생도 따랐습니다. 일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 자신을 향한 한 여인의 감정을 애써 외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집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티븐스의 존경심과 달리, 달링턴 경은 존경받을 위인은 아니었습니다. 전범국 독일의 재무장(再武裝)과 유럽국가들의 독일 규제 해제를 주장하며 외교활동을 펼친 문제적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달링턴 경에게 악의가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패전국을 그렇게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선량한 진심이었지요. 그러나 전범국 독일과의 화친은 사실 히틀러의 나치에 농락당하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 이면에서, 스티븐스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만이 위대한 집사로 향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스티븐스는 새 주인을 섬기는 중입니다. 달링턴 경이 생존했던 그 시절, 스티븐스와 함께 달링턴 경을 위해 일하다 오래 전 달링턴 저택을 떠났던 켄턴 양이 20년 만에 스티븐스에게 서신 한 장을 보냅니다. 그녀는 한때 스티븐스를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저택에서의 옛 영광을 회상하며 켄턴양을 만나고자 먼 길을 떠납니다.
소설과 영화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를 관통하기 위해선 <The Remains of the Day>와 <남아 있는 나날> 제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이 작품(소설과 영화)의 원제는 모두 ‘The Remains of the Day’입니다. 한국에선 ‘남아 있는 나날’로 번역됐습니다. 이는 스티븐스가 켄턴 양을 만나러 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주어진 삶에서 인생의 나침반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를 암시하는 제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한국어판 제목 ‘남아 있는 나날’은 오역 논란을 겪은 바 있습니다. 문법적인 오역의 논란을 떠나서 ‘남아 있는 나날’은 원작자 의도를 담아내기엔 부족한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파리 리뷰> 2008년 봄호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잡지의 발행인인 수잔나 허너웰과 인터뷰를 나눈 바 있습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The Remains of the Day>란 제목을 선정했던 순간을 추억합니다. 이 인터뷰 기사 제목은 ‘Kazuo Ishiguro, The Art of Fiction No.196’로 파리 리뷰 웹사이트에서 유료로 확인 가능한데, 원문을 인용해 봅니다.
“……Then Judith Hertzberg mentioned a phrase of Freud’s, Tagesreste, which he used to refer to dreams, which is something like “debris of the day.” When she translated it off the top of her head, it came out as “remains of the day.” It seemed to me right in terms of atmosphere(유디트 헤르츠베르흐(네덜란드 시인)가 프로이트의 표현인 ‘Tagesreste’를 언급했어요. 그(프로이트)는 이 단어(Tagesreste)를 꿈과 관련해 사용했는데, 대략 ‘낮의 잔재’ 정도의 의미였습니다. 그녀(유디트 헤르츠베르흐)가 즉석에서 이 단어를 번역했을 때 ‘remains of the day’였지요. 그 표현이 제 소설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말을 이해하려면 프로이트를 잠시 거쳐야 합니다. 꿈의 철학자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한 사람의 꿈이란 낮의 잔여물이 무의식적인 왜곡을 통해 발현되는 수면 중의 이미지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 때 낮의 기억은 변형되고 조작되므로 낮(과거)의 사실은 밤(현재)의 이미지 속에서 이질적인 형상으로 구현됩니다. 과거는 왜곡된다는 함의가 담겼지요. 프로이트의 저 개념은, 그러므로 스티븐스가 자신이 달링턴 경과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위대했던 시간’으로 왜곡해 생각하는 상황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오늘에 이르러 스스로가 무관심했고 무능력했던 그 시간을 반성하는 대신, 충심을 바쳤던 자신의 옛 삶을 ‘결코 헛되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변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mains of the Day>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왜곡하며 과거의 삶을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변명하기에 능숙한 존재인지를 역사와 기억이라는 함수 속에서 조명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작품 원제 ‘The Remains of the day’는 ‘남아 있는 나날’이 아니라 ‘낮의 잔재, 낮의 잔여, 낮의 나머지’ 쯤으로 번역됐어야 한다는 견해에 저는 적극 공감합니다. ’남아 있는 나날‘이란 제목으로는 프로이트 ’Tagesreste’ 개념과 연결점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1994년 5월 1일 출판사 세종서적에서 처음 번역 출간됐고, 현재는 민음사에서 여러 판본으로 판매 중입니다. 이에 앞서 영화 <남아있는 나날>(포스터를 보면 띄어쓰기를 하지 않음)의 공식 개봉일자는 1994년 4월 16일(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이었습니다. 영화 제목이 ‘남아있는 나날’로 결정되면서 이후 출간된 책 제목에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을까 감히 추측해보게 됩니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과 결이 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인물과 같은 소재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스티븐스는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습보다 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합니다. 그는 스티븐스는 과거를 왜곡해 기억하며, 달링턴 경의 신사적인 위대함을 그가 몰락한 이후인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습니다. “달링컨 경을 반유대주의자라고 부르거나, ‘영국 파시스트 연맹’ 같은 조직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하는 주장들 또한 추잡하고 허무맹랑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72쪽)와 같은 문장이 그렇지요.
특히 이 소설의 화자는 스티븐스로 그는 1인칭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데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문학적 주제와도 연관됩니다. 이 소설에서 과거 스티븐스의 삶을, 스티븐스의 ‘입’을 통해서만 기술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그는 기억과 과거를 ‘편집’해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1인칭의 시선이 지워지고 스티븐스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르기 때문에 ‘과거의 편집된 왜곡’이라는 원작의 주제가 아닌, ‘한 여인의 사랑까지 외면할 정도로 직업의식이 투철했던 한 집사가 노년에 이르러 느끼는 회한‘으로 변형됐다고 생각합니다. 부친의 임종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또 한 여인의 마음을 외면할 정로도 과거를 잘못 살아왔다면 앞으로는(‘남아 있는 나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란 질문을 내재합니다. 비윤리적인 인간의 재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소설)가 한 여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남자의 서사(영화)로 바뀐 것이지요. 이런 경우, 영화 제목이 ‘남아 있는 나날’로 소개되는 건 오역이라고 지적할 순 없겠지만, 소설책 제목에서마저 ‘남아 있는 나날’을 사용하는 건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괴물일까요, 희생자일까요. 자신의 직무를 숭고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사의 물줄기에 따라 부역자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스티븐스를 희생자로 보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삶을 침해당했고 감정을 억압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원작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스티븐스를 희생자 각도에서 바라보지 않으려 했던 게 분명합니다. 그는 영국 언론 <뉴 스테이트맨(New Statesman)>과의 2023년 인터뷰에서 “The butler doesn’t look like a conventional monster, but I always thought that he was a kind of monster(집사는 평범한 괴물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저는 그(스티븐스)가 일종의 괴물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존재증명에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과거는 재편되는데 이때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순간들이 다가오곤 합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