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0년. 일본 경제를 얘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수식어구이지만, 요즘엔 문득 이런 수식어를 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기 침체에 미동도 않던 일본 경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엔저와 화끈한 반도체 지원책으로 일본에 관광객과 글로벌 반도체 투자가 몰려들면서 설비 투자가 늘고 민간 소비가 살아난 덕분이다. 물론, 일본 경제의 반짝 성장이 디플레이션 탈출의 신호탄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미국 중앙은행의 고금리 장기화 시그널로 외국인 자금이 일부 이탈하고 ‘버핏 효과’를 누렸던 증시도 휘청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세적으로 일본의 경제적 사이클이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과 비교할 땐 더욱 그렇다. 일본 성장률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추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나 G2 갈등 속에 글로벌 공급망이 미국과 중국 중심 블록으로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현재로선 그 반사이익을 일본이 모두 가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미-중 반도체 전쟁을 대만과 한국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을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보조금을 앞세워 글로벌 반도체 강자들을 블랙홀처럼 자국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한때 세계 반도체 시장의 80%를 점유했던 일본의 ‘반도체 탈환 작전’이 시작된 셈이다.
놀라운 것은 그 선두에 선 것이 해당 기업들도, 정부도 아닌 바로 일본의 국회의원들이라는 점이다. 자민당 국회의원 100명이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을 만들고 일본 정부를 설득해 반도체 산업의 대변혁기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보조금 예산을 확보하고 글로벌 반도체 강자들을 유치하는 데 앞장섰다.
일본 정부는 이에 화답하듯,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공장설립 부지가 부족하자, 발 빠르게 현장의 문제점을 수용해 농지, 임야에도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규제를 풀기로 했다. 세제 혜택, 보조금 지급에 이어 토지 규제 완화까지 ‘반도체 지원책 3종 세트’를 완성한 것이다. 우리는 양향자 의원 주도로 어렵사리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이 지난 봄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이미 온 마음이 내년 총선에 가 있는 정치권은 K칩스법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반도체 산업을 담당하는 국회 첨단 전략산업특위는 발족 이래 10개월간 단 5시간 회의를, 6일간 해외출장을 다녀온 것이 전부다. 정부는 K칩스법이 통과된 지 반 년이 지나 이제야 반도체 산업 후속 지원방안을 내놨다. 용인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에 연내 전력공급을 위한 로드맵을 확정하기로 하고, 핵심인재 양성을 위해 거점 대학을 내년까지 10개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정책 발표는 시작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선 지속적인 점검과 관리가 필수다.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국정감사. 바쁜 기업인들 불러 맹탕 질문에 창피 주고 벌세우는 국회의 구태는 여전했다. K칩스법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뭔지, 글로벌 전쟁에서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는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이런 걸 질문하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난상토론을 벌이는 국회의원들을 국감에서 보고 싶다. 이런 상상, 현실에선 불가능한 걸까?
[김주영 월간국장 매경LUXMEN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