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률 중독, 즉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극도의 효율성을 숭배하는 것은 현대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능률 숭배자로서 우리는 플래너를 빠짐없이 할 일로 채우고,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면서 이룩한 성취로 수첩을 빼곡히 뒤덮는 일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앞날을 예측하고 계획하며, 목표치 이상을 달성하려 애쓰는 사람이 더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대다수 현대인은 끝없는 활동을 미덕 삼아서 살아간다. 무슨 일이든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믿기에 우리는 매년 쏟아지는 ‘궁극의 생산성 도구’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한 번쯤 인생 매니저를 찾아서 이 앱 저 앱을 뒤적이곤 한다. 더 빨리 가고 더 일찍 도착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업무 속도를 높여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여 줄, 평점 높은 도구를 찾아 헤맨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우리는 몇 해에 한 번씩 완전히 새롭게 갈아엎은 업무 도구 앞에서 신입사원이 되어 허둥대곤 한다.
이러한 도구들은 정말로 헛된 시간을 절약해주어 우리 삶을 더 낫게 변화시키고, 우리 삶을 더 보람차게 만들까. 슬프게도, 별로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한때 열광했던 이런 도구가 결국 우리 삶에 남긴 것은 다신 거들떠보지 않을 데이터 조각뿐이다. 거기 담긴 모든 기록은 분명 우리 삶의 소중한 순간이고, 우리가 노력해 얻어낸 인생의 작은 성취일 텐데도 말이다.
우리 활동 대부분은 굳이 재거나 세지 않아도, 우리 삶을 더 좋게 만든다. 하루 걸음 숫자가 만 보를 넘지 않아도, 꾸준히 걸으면 우리 기분과 건강은 좋아진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장시간 이를 악물고 억지로 시간을 쏟는 것은 때때로 우리 몸과 마음에 무리를 가져온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컴퓨터 로그나 소셜미디어 피드가 아니라 우리 머리와 가슴에, 가족이나 친구와 나누는 친밀한 대화 속에 기록된다.
미국 언론인 셀레스트 헤들리의 <바쁨 중독>에 따르면, 능률적 인생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환상이다. 삶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는 제품, 시스템, 소프트웨어 등은 시간과 에너지와 힘들여 번 돈을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우리 삶을 궁극적으로 개선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도구가 권하는 대로 열심히 살수록, 우리는 더 자주 지치고 더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되면서 허송하기 쉽다.
생산성 도구는 많아도, 그 원리는 똑같다. 이 도구들은 우리를 쾌락의 쳇바퀴에 태워 우리 신경 중추를 도파민 같은 행복 물질에 중독시킴으로써 우리가 한눈팔지 않고 주어진 목표를 향하도록 몰아붙인다. 그러나 설령 목표에 도달해도 우리는 절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생산성 도구들은 곧바로 또 다른 목표를 제안함으로써 새로운 목표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강박하기 때문이다.
생산성 도구는 우리가 부지런히 움직일 때만 쓸모를 얻는다. 멈춰 서서 인생 한순간을 오래 즐기고 누린다면, 이 도구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 생산성 도구가 끝없이 우리를 새로운 목표를 향해 몰아가는 이유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탓에 기술은 우리 행복을 늘려주지 못한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선언했듯, 인생의 진짜 기쁨은 또 다른 성취를 향한 유랑이 아니라 힘써 이룩한 성과에 대한 깊은 만족에 달려 있다.
생산성 도구를 이용해서 무엇을 달성하든, 오히려 우리 삶은 영원한 불만과 공허 속에 떨어진다.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더 신속히 움직이면서 목표를 향해 돌진한 대가로 우리가 실제로 얻는 것은 유예된 행복뿐이다. 아무리 대단한 앱도 우리 인생을 더 낫게 만들지는 않는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능률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문화적 편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능률 숭배에 억압당해 있다. 현대인은 모든 일을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코 그 자체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일에 홀리고 바쁨에 중독된 채 정신없이 살아간다. 우리는 자신 또는 타인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걸 도무지 참지 못한다. 그러나 ‘일 없음’과 ‘일없음’은 다르다. ‘일 없음’은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일없음’은 시간에 쫓기지 않는 삶,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임으로써 삶의 속도를 늦추는 일을 뜻한다. ‘일없음’을 ‘일 없음’으로 여기면서 불편해하는 마음이 우리 삶을 불행에 빠뜨리는 지름길이다.
일을 일 자체로 누리지 못할 때 우리는 삶의 보람도 함께 상실한다. 한시도 쉬지 않고 죽을 둥 살 둥 일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는 잊어버린다. 측정하고 개선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욕심에 빠져서 하루를 얼마나 만족했는지보다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그 결과, 우리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깊은 만족감을 주는 활동, 즉 인간성의 표현을 잃어버린다.
현대인은 잘 쉬는 법을 배우지 않은 듯이 생활한다. 2017년 미국인이 쓰지 않은 휴가는 7억 500만 일에 이르고, 2억 일 이상은 이월되지 않은 채 영원히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노동자들은 돈 많은 기업가에게 한 해 620억달러를 기부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충분한 휴식은 좋은 삶에 너무나 필수적이다. 휴가를 전부 찾아 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인간관계에서 20% 더 만족하고, 전반적 행복감도 56% 더 높다.
주어진 휴가를 모두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가져오는데도, 지난 30년 동안 미국에서 휴가 반납 일수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능률에 대한 지나친 강박과 바쁜 삶에 대한 과도한 숭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실제로 이룬 게 없으면서도 단지 그래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죽도록 일하다 지쳐버린다. 그러나 헤들리에 따르면, 생산적이라는 느낌과 실제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활동은 다르다. 지친 마음은 우리를 일과 인생에서 함께 실패하게 만든다.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려다 우리는 오히려 불행해진다.
우리 삶에서 정작 부족한 것은 자기 삶을 스스로 돌보는 여유,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과 보내는 시간, 이웃과 어울리는 친교 등이다. 일에 파묻혀서 보내는 시간보다 인간성을 북돋우고 표현하는 비생산적 시간이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 헤들리는 “우리 자신을 기계처럼 작동하면서 가동률과 성능을 끌어올리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인간성 실현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많은 시간을 사용할 때 삶의 질은 크게 높아진다.
요즘 우리는 한 해를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한 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혹여 일 중독과 능률 숭배를 부추기는 계획은 아닌지 돌아보라. 가족이나 연인, 친구나 이웃과 시간을 보내면서 기쁨을 누리는 데 중점을 두지 않았다면 아무리 대단한 계획도 도대체 인생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