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민음사)에 나오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중년 연인 샹탈과 장마르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노르망디 해안에서 휴가를 보내던 샹탈이 갑작스레 실의에 빠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더 이상 남자들이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순간을 맞이한다. 타인의 시선이 거두어지면서 자신이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느낌 말이다. 나이가 들어 젊음을 잃었을 때, 직장에서 나와 속할 데가 뚜렷하지 않을 때, 시험을 망쳐 집안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 사람들은 갑자기 투명인간이 된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슬픔과 우울에 사로잡혀서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우리 자아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겪는 수많은 사건을 조리 있는 이야기로 고쳐 쓴다. 인생엔 이유가 있고 나아갈 방향이 있어서 나날이 그 목적을 이루려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늘 순탄한 건 아니다. 샹탈처럼 갑자기 자신이 낯설 때가 있다.
‘나’라고 믿었던 ‘나’가 더는 ‘나’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샹탈은 이젠 아무도 자신을 여자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조함과 수치심을 느낀다. 장마르크는 우울해하는 샹탈을 달래려고 ‘시라노’라는 이름을 빌려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편지를 받은 샹탈은 자신이 아직 매력적임을 알고 활력을 되찾는다. 그러나 갈수록 샹탈은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권태로운 장마르크보다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시라노에게 깊이 빠져든다. 편지를 숨긴 채 그녀는 눈앞의 장마르크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볼 시라노를 위해서 자신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시라노 덕에 매력을 되찾은 샹탈의 활기는 과연 진짜 ‘기운 참’일까. “여자는 노화 정도를 남자들이 그들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을 척도로 가늠한다”라는 장마르크의 말처럼, 한 인간의 정체성은 타인의 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환각과 기만은 삶을 거짓된 활기로 몰아넣는다. 시라노는 실재하지 않기에 그를 의식할수록, 샹탈은 현재의 나를 긍정하지 못하고 과거의 나에 붙잡힌다. 편지를 받고 거기에 반응하면서 그녀는 나날이 지금의 나로부터 멀어진다.
타인의 눈길을 의식해서 살아가는 이들은 오히려 길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자의 시선 없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근대인의 근본 문제로 성찰한 철학자가 장 자크 루소였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그는 말한다. “저마다 타인들을 바라보고, 타인들도 자기를 바라보아주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타인들로부터 받는 호의적 평가와 존경은 가치를 얻게 되었다.”
근대 이전엔 타자의 인정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 신이 운명을 점지해 주거나 해야 할 일을 계시하거나, 날 때부터 신분이나 직업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사회에선 자기 분열 또는 정체성 불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스스로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크게 차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양반은 겉과 속이 모두 양반이어야 했고, 평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수 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정해진 자아를 확인하는 순례는 있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무얼 해야 할지 몰라서 떠도는 방황은 없었다. 그러나 근대는 자유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등하고, 태어날 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아서 바라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 샹탈이 죽을 때까지 모든 남자의 시선을 끌 수 없듯, 바라는 대로 이룰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이로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인간은 자기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모으고 평판을 획득하려고 애쓸 수 밖에 없다. 루소는 이를 악덕의 원천이요, 인간 불행의 기원으로 보았다. 승자는 ‘허영심과 경멸’에 빠지고, 패자는 ‘수치심과 선망’에 휩싸이는 까닭이다.
자유가 주어져 스스로 존재 이유를 이룩할 수 있지만, 그 실현 수단이 거의 주어지지 않아 자기 존재 이유를 타자의 인정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근대인의 근본적 모순이다. 따라서 누구도 정체성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를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가 문제다. 문학은, 특히 소설은 세계와 적절히 화해하면서 욕망을 누그러뜨리고, 삶의 보람을 이룩하는 법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샹탈은 장마르크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홀로 런던으로 떠난다. 거기서 샹탈은 난교 파티의 환상에 빠져든다. 정체성을 상실한, 삶의 이유와 방향을 잃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건 식욕과 번식욕뿐이다.
“인생의 본질은 삶이 지속되게 하는 거야. 그건 출산이고 그에 선행하는 성교, 또 그보다 앞서는 유혹, 그러니까 키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팬티 (중략) 그리고 사람들에게 성교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 먹거리지. (중략) 그리고 먹었으니, 배설도 중요하지.”
하나의 삶이 먹고 싸고 유혹하고 섹스하는 동물적 삶으로 완전히 축소되는 것, 이것이 허무주의다. 쿤데라는 묻는다. “그렇다면 삶의 위대함은 어디 있단 말이에요? 우리 운명이 먹는 것, 성교, 생리대에 달렸다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을 때 자유는 완전한 불안이 된다. 난교 파티에서 샹탈은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린 채 자기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상태에 빠져든다. 쾌락이 자아를 대체하면 삶은 가치를 상실한다. 그 순간, 장마르크가 그녀를 흔들어 깨운다. “샹탈! 샹탈! 잠을 깨! 현실이 아니야!” 꿈에서 깨어난 샹탈은 실제로 필요한 건 모든 남자의 시선이 아니라 내 곁에 누운 사람의 시선뿐임을 깨닫고 그에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을 거야. 매일 밤.”
이 작품에서 쿤데라는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행위가 얼마나 모래성 같은지 보여준다. 샹탈의 불빛은 정체성 불안에 시달리는 악몽의 밤에 우리가 손에 쥔 가냘픈 희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불빛이 악몽의 밤이 찾아오는 걸 막진 못한다. 악몽의 밤에 중요한 건 장마르크, 즉 곁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타자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가 누구인지를 살펴야 한다.
장마르크는 말한다.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거야.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설사 때때로 일그러질지라도, 우정과 사랑은 자아의 부피를 유지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인생이란 우애를 얼마나 곁에 두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 곁에서 이름을 불러주며, ‘네 삶이 의미 있다, 헛되지 않았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는 한 인간은 자기를 잃지 않는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