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가 확산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컴퓨터 인프라스트럭처의 중요성 또한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하며 처리하고, AI 학습과 추론을 위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구동하기 위한 데이터센터다.
이러한 컴퓨팅 자원을 확충해두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데이터센터 구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글로벌 기업들의 이목이 쏠리는 곳이 동남아시아의 아세안(ASEAN) 국가들이다. 태국, 베트남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들이 모두 데이터센터 중심지로 떠오르는 추세다.
일례로 구글은 지난해 태국 시장에 10억달러를 투자해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클라우드 및 AI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으며, MS는 지난해 말레이시아에 22억달러 투자를 발표한 이후 올해 5월에는 말레이시아 내 MS의 클라우드 서비스 가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데이터센터 99개가 위치한 싱가포르가 가장 큰 데이터센터 중심지였다. 빅테크들의 아시아태평양지역 허브 역할을 하는 싱가포르는 빠르게 데이터센터를 늘려왔지만, 이제는 포화 상태에 다다른 분위기다. 이러한 데이터센터 흐름은 말레이시아 등 인접 국가들로 퍼지고 있다.
동남아시아에 미국 빅테크들과 글로벌 데이터센터 운영사들이 주목하는 배경에는 빠르게 성장하는 동남아 시장에 대한 선제적인 투자 차원과 함께, 전 세계 데이터센터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다.
시장조사업체 리서치앤드마켓츠에 따르면 지난해 동남아시아 시장의 데이터센터 시장 규모는 137억 1000만달러로 집계됐으며, 연평균 14.24% 성장해 2030년에는 304억 7000만달러 규모 시장으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고성장이 예상되는 이유 중 하나는 AI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AI 기술
을 도입하고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면서, 이에 따른 인프라 수요도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기존에도 각 국가와 기업들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목적으로 데이터센터를 활용해왔지만, 이제는 AI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 데이터센터 리서치 기업 DC바이트는 “태국에서는 데이터센터 사용에서 AI 수요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4분기 20% 수준이었는데 2025년 1분기에는 28%로 증가했다”라며 해당 지역에 AI 사용이 증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지난해 말 국가 AI 사무소를 설립하면서 국가 차원의 AI 기술 개발과 도입 가속화를 시작했는데, 이처럼 AI 담당 기관을 출범시키는 등 국가 주도 AI를 추진하는 곳도 많다.
이에 빅테크들도 이같은 성장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앞으로 증가할 시장의 점유율을 선점해두기 위해 앞다퉈 투자를 발표하는 것이다.
또한 데이터센터를 설립할 수 있는 여러 후보 지역 중 동남아시아는 상대적으로 토지, 전력 등을 포함한 운영 비용이 낮다는 점이 매력적인 요소다. 기존의 데이터센터 강자인 미국과 유럽의 경우 부지 부족 문제와 함께 전력 공급의 한계 등으로 AI 인프라를 무한 확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토지의 경우 제곱미터 당 가격이 싱가포르의 5% 수준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기존의 데이터센터 중심지인 싱가포르도 부지 부족과 전력 공급의 한계를 맞으며 데이터센터 확장 속도가 느려졌다는 점도 인접 국가로 수요가 분산되게 된 배경이다. 전력 부담으로 인해 싱가포르는 지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자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을 잠정 중단하는 조치를 실행한 바 있다. 해당 기간을 기점으로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확장 계획이 싱가포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말레이시아 등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유망 국가로 꼽히는 곳이 말레이시아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아세안(ASEAN) 국가 중 데이터센터가 가장 많은 국가로 싱가포르(99개), 인도네시아(84개)에 이어 말레이시아가 62개로 3위를 기록했다.
특히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싱가포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자 엔비디아도 진출해 있는 조호르 지역은 데이터센터 조사 기관 DC바이트가 선정한 동남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으로 꼽히기도 했다.
데이터센터 운영 비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전기 요금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인도네시아 전기 요금이 가장 경쟁력 있는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규모 산업 기준 인도네시아 전기 요금은 kWh당 싱가포르의 절반 수준으로 나타났다.
빅테크들은 지난해부터 앞다퉈 동남아시아 지역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발표하고 있다. 단순히 금액만 투자해 데이터센터 건물을 짓고 서비스를 시작하는 것만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은 각국 정부와 파트너십을 맺거나 현지 인력 육성에도 나서는 등 파트너십을 확장하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에 자체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글로벌 클라우드 사업자 1위인 AWS는 지난 2022년 이미 태국에서 데이터센터를 포함해 향후 15년간 총 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AWS는 태국 내에 데이터센터 구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물리적으로 분리된 데이터센터를 의미하는 가용 영역을 태국 내에 3개 제공하면서 최소 2개의 가용 영역이 확보되어야 하는 ‘AWS 리전’을 올해 초에 태국에서 정식 출시했다.
이어 AWS는 지난해 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과 함께 62억달러(약 8조 5900억원)를 중장기적으로 투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일환으로 AWS는 말레이시아에서도 지난해 AWS 리전을 구축했다. AWS는 나아가 현지 인프라 투자와 함께 매년 3500개 이상의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국가와의 파트너십에 대한 노력을 강조했다.
MS의 경우 일부 데이터센터 건립을 중단하거나 연기하는 등 데이터센터 확대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동남아 시장에 대한 관심과 투자 계획은 뚜렷하다. 지난해 사티아 나델라 MS CEO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향후 4년간 17억달러를 투자해 데이터센터를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후 방문한 태국에서도 투자 의향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구글 또한 지난해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한 투자 계획을 대거 발표했다. 지난해 5월에는 말레이시아에 20억달러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인프라 투자를 결정했으며, 태국에 또한 같은 해 9월에 10억달러 투자 계획을 연이어 공개했다. 또한 로이터에 따르면 구글은 베트남 호치민에도 데이터센터 건설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은 태국에 투자를 발표하며 “현지 기업, 교육자, 커뮤니티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인력 양성 등의 측면에서 구글의 역할도 강조했다.
특히 이들 빅테크는 각국 정상이나 국왕과 만나면서 긴밀한 파트너십을 맺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구글이 태국 투자를 발표했을 때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가 “구글의 투자는 태국의 ‘클라우드 퍼스트’ 정책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태국이 동남아의 디지털 허브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성명을 낸 것이 대표적이다.
시장 성장세가 빠른 만큼 한국 기업들도 동남아시아 시장 잠재력에 주목하고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이미 미국 빅테크가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 시장 대비 동남아시아가 상대적으로 공략 가능성이 높은 틈새 시장으로 꼽힌다.
데이터센터 영역에서는 LG CNS가 대표적이다. LG CNS는 지난 8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건설될 1000억원 규모 AI 데이터센터 사업을 수주했다”고 발표하며 동남아시아 데이터센터 사업에 뛰어든다고 선언한 바 있다.
LG CNS는 인도네이사 재계 서열 3위인 시나르마스그룹과 세운 합작법인 ‘LG 시나르마스 테크놀로지 솔루션’을 통해 계약 발주사인 현지 기업 ‘KMG’와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LG CNS가 수주한 사업은 자카르타에 10만 대 이상의 서버를 한꺼번에 수용하는 지상 11층(연면적 4만6281㎡)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프로젝트다. LG CNS는 데이터센터 구축에서 냉각 시스템·전력·통신 등 인프라 사업을 총괄할 예정이다.
KT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베트남 최대 통신사인 비엣텔 텔레콤을 보유한 비엣텔 그룹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으며 인프라뿐만 아니라 베트남 특화 AI 모델 등 전방위적인 협력을 약속한 것이다.
KT는 비엣텔 그룹과 손잡고 베트남이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언어 모델을 함께 개발하고, 이를 베트남 주요 산업에 적용하는 데도 협력할 예정이다. 또한 AI 전용 데이터센터도 같이 구축할 계획이다.
한편 AI 패권 경쟁 등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따른 위험 요소가 상존하는 만큼 기업들 입장에서는 동남아를 지정학적인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요충지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정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