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게임 팬덤과 게임사만의 축제였던 ‘게임쇼’가 ‘테크쇼’로 진화하고 있다. 독일, 중국, 일본에서 열려 매년 수 십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세계 3대 게임쇼의 경우 글로벌 게임업체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대거 참여해 기술을 뽐내는 경연장이 됐다는 평가다.
최근 글로벌 게임쇼는 게임을 중심으로 애니메이션, e스포츠,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등 연관 산업을 모두 아우르는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전시회를 표방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지난 6월 진행된 북미 온·오프라인 게임쇼 ‘서머 게임 페스트(SGF)’와 7월 열린 중국 ‘차이나조이’에서도 이같은 트렌드가 나타났다.
하반기에는 8월 21일 독일 쾰른에서 개막하는 ‘게임스컴’, 9월 26일부터 나흘간 일본 도쿄에서 열릴 ‘도쿄게임쇼’가 예정돼 있다. 이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국내 최대 게임쇼인 ‘지스타’가 열린다. 글로벌 게임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이들 게임쇼들의 외형도 대폭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 최대 게임쇼 ‘게임스컴2024’가 8월 21일부터 25일(현지시간)까지 독일 쾰른에서 열렸다. 세계 3대 게임쇼 중 하나인 미국의 ‘E3’가 28년 만에 폐지되면서 8월에 열리는 게임스컴은 세계 최대 게임쇼로 급부상했다. 주목되는 점은 IT 회사들의 참여다.
게임스컴 주최 측에 따르면 메타의 독립형 ‘혼합현실(MR, Mixed Reality)’ 브랜드 ‘메타 퀘스트’는 올해 게임스컴의 주요 파트너사로 행사에 참가했다. 메타 퀘스트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게임사들이 XR 전용 게임을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메타와 애플 등 하드웨어 제작사를 중심으로 XR 시장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게임이 XR의 ‘킬러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메타는 자사의 MR 생태계 확장을 위해 게임사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다. 게임사 입장에서는 새로운 사용자층을 확보하고, 게임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측면에서 관련 게임 개발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도 올해 게임스컴에 참가했다. 부스를 마련하고 고성능 게이밍 기능을 지원하는 디지털 가전과 모바일 제품군을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펄어비스 등 국내 게임사와 협력해 오디세이 네오G9, 오디세이 아크 등 최고 사양 모니터를 대거 소개한 바 있다.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 등 모바일 제품군은 최신 게임을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게이밍 성능이 핵심 경쟁력으로 꼽힌다. 올해 게임스컴에서 모바일 게임사들과의 협력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인수하는 등 게임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도 게임스컴에서 존재감을 알린다. MS 엑스박스(Xbox)는 올해 게임스컴에 참가해 50종 이상의 자체 개발 및 자회사·협력사 신작을 공개했다. 특히 MS는 게임스컴 현장에 총 240여 개의 시연대와 특별 극장으로 구성된 대규모 전용 부스를 선보였다.
중국 빅테크 텐센트의 경우 산하 게임 퍼블리싱 브랜드 레벨인피니트를 통해 행사에 참여한다. 레벨인피니트는 ‘듄: 어웨이크닝’ 등 다수의 신작을 출품한다고 일찌감치 계획을 공개했다. 텐센트는 특히 부스 현장에서 국내 게임사 시프트업이 개발하고 레벨인피니트가 퍼블리싱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 코스프레 무대와 라이브 밴드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지난 7월 26~29일 상하이 신국제엑스포센터에서 열린 중국 최대 게임쇼 ‘차이나조이’는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다. 올해로 21주년을 맞은 차이나조이는 중국국가언론출판국과 상하이시 인민정부가 주최하는 행사다. 북미 최대 게임 행사인 E3가 2023년 28년 만에 폐지되면서 독일 게임스컴, 일본 도쿄게임쇼와 함께 ‘세계 3대 게임쇼’ 반열에 올랐다.
올해 차이나조이 전체 전시 규모는 약 17만㎡로, 국내 최대 게임쇼인 지스타가 열리는 부산 벡스코 1전시장 면적(2만 7000㎡)의 약 5배 이상에 달했다.
주최 측은 올해 행사 전부터 독일 게임스컴, 도쿄 게임쇼 등 기존 국제 게임쇼들을 뛰어넘는 역대급 규모를 예고하고 나섰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등에 업은 차이나조이는 올해 방문객 수와 전시 규모 면에서 명실공히 도쿄 게임쇼를 뛰어넘어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평가가 나왔다.
주최 측은 전 세계 31개 국 600여 개 기업이 올해 행사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블리자드, 소니인터랙티브, 반다이남코, 유비소프트 등 해외 유명 게임사도 대거 참여했다. 퀄컴, AMD 등은 B2B(기업간거래) 부스를 운영했다.
특히 올해 행사는 텐센트, 넷이즈 등 이미 세계 시장에서 주류로 떠오른 중국 회사들이 신작 로드맵을 밝히며 안방에서 세력을 과시하는 자리가 됐다는 평가다. 최근 글로벌 게임 시장은 글로벌 모바일게임 매출 순위(작년 기준)에서 중국 회사가 1~3위를 싹쓸이할 만큼 중국세가 강하다.
실제로 올해 행사에서는 중국 게임업계 양대 산맥인 텐센트, 넷이즈를 비롯해 하이프그리프, 세기화통 등 중국 주요 게임사들이 수백여종의 신작 게임을 쏟아냈다. 중국 메이저 게임사들이 최근 한국에 잇달아 대형 신작을 출시하며 시장 공략을 공식화한 만큼 국내 게임업계도 인력을 보내 차이나조이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올 가을 열릴 국내 최대 게임쇼인 ‘지스타’에서도 IT기업들의 참여가 활발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지난해 행사에서는 네이버, 하이브, LG유플러스 등이 대거 참가했다. 특히 B2B(기업 간 거래) 전시장에서는 생성형 AI 솔루션, XR 기기 등 이른바 게임사들의 혁신을 이끌 ‘게이밍 테크’가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테크’ 성격이 짙어지는 해외 게임쇼들과 마찬가지로 올해 행사에서는 이같은 기조가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네이버클라우드의 AI 부스는 행사 3일간 게임 업계 관계자만 수백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지난해 지스타에서 커스텀 AI 개발 도구 ‘클로바 스튜디오’를 선보였다. 이는 AI 기반의 게임 캐릭터 인물 설정, 스토리 창작 지원 등에 활용 가능하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스마일게이트와 AI 협력 사업에 관한 업무협약(MOU)도 맺었다.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센터장은 그동안 게임업계 관계자가 주로 맡았던 지스타 기조 연설자로 초청되기도 했다. 그는 “게임 캐릭터 원화나 배경음악(BGM)의 초안 작업, 역할수행게임(RPG)에서의 AI 플레이어 활용 등 다방면에서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며 “생성형 AI는 게임 개발 전반에 활용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이브의 AI 음성 솔루션 자회사 수퍼톤은 AI 기반 음성 기술 ‘스크린플레이’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발화 속도, 높낮이 등도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LG유플러스는 모바일서비스 담당 부서를 중심으로 지스타 참관단을 꾸렸다. 모바일결제(DCB) 시장의 핵심 콘텐츠 중 하나인 게임업계와 전략적 네트워킹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다. DCB는 구글, 애플 등 앱 마켓에서 유료 서비스를 이용할 때 통신사 회선 번호로 결제하는 서비스로 DCB 거래 승인 대부분이 모바일 게임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신사엔 성장세가 높은 ‘틈새 먹거리’인 셈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올해 지스타의 경우에도 단순 게임 뿐 아니라 AI 등 혁신 기술 회사들의 참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외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는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세계 게임쇼에 잇따라 출격하고 있다. K-게임들은 8월 ‘게임스컴’에 참여해 신작을 출시하기 전 미리 흥행 여부를 진단해보고 해외 팬심을 공략할 방침을 세웠다. 특히 신작 출시를 앞두고 흥행 여부를 판단해 보는 한편 현장 의견을 토대로 한층 더 이용자 친화적인 게임을 내놓겠다는 구상이다.
올해 행사에는 넥슨,크래프톤,펄어비스,카카오게임즈, 하이브IM 등 국내 게임사들이 총출동했다.
중국 게임사 ‘빅3’로 불리는 텐센트, 호요버스, 넷이즈게임즈 등 중국 게임사들도 일찌감치 행사 참석을 확정했으며 중국 게임사들과의 지식재산권(IP) 경쟁도 치열히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넥슨, 엔씨소프트, 펄어비스, 네오위즈 등은 올해 ‘차이나조이’에서도 현지 퍼블리셔를 통해 게임을 선보이거나 어워드에 출품하는 형태로 행사에 참여했다.
국내 게임사들이 해외 게임쇼로 눈을 돌리는 것은 해외 시장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장 정체에 빠진 한국시장에서 벗어나 미국, 유럽 등 해외 무대로 발을 넓히려면 현지 분위기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평가다. 국내 게임사 상당수가 한국 외에도 출시국을 다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외 인지도가 높은 게임쇼를 통해 해외 팬심을 잡겠다는 의도도 큰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한국 게임산업을 대표하는 ‘3N(넥슨·넷마블·엔씨소프트)’이 올 상반기 해외 시장에서 2조원이 훌쩍 넘는 매출을 합작했다.
국내 게임 시장 성장이 정체된 사이 게임산업의 본산인 북미와 최대 시장 중국을 겨냥해 신작을 쏟아낸 게임사들의 전략이 올해부터 본격적인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올 상반기 국내 대표 게임사 3곳(넥슨·넷마블·엔씨소프트)의 해외 매출액 총합이 2조 4507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2조 2285억원에서 1년 만에 2222억원 늘어난 규모다. 업체별로는 ‘킬러 지식재산권(IP)’을 해외 시장에 쏟아낸 넥슨이 가장 높은 매출액 증가치를 보였고, 넷마블도 두각을 나타냈다.
게임사들이 해외 공략에 자본과 인재를 대거 투입하면서 국내 게임 산업 수출도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게임 산업의 수출액은 83억450만달러(약 11조 3530억원))로 전체 콘텐츠 산업 수출액(129억 6300만달러)의 64.1%를 차지했다. K-팝(8.1%), K-드라마·예능(6.4%)과 비교하면 열 배 수준의 성과다.
황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