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사랑하는 직장인 A씨에게 게임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A씨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간단하게 중국산 모바일 게임을 즐긴다. 번역은 물론 게임 플레이까지 불편한 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어 지루한 출근길을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퇴근한 뒤 A씨의 일상 역시 게임과 함께다. 일본 소니가 만든 플레이스테이션(PS)과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하는 미국산 게임들과 함께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보기 어렵지 않은 한 게임 유저의 사례다. 게임이라는 문화 상품 역시 과거에는 각국의 시장에서 익숙한 문화 속에 만들어졌다면, 이제는 점차 국경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보편적으로 잘 만든 게임이라면 어느 나라, 어느 게임사의 작품이라 해도 발굴되고 인정받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한국 게임 업계는 인구에 비해 큰 수준인 세계 4위의 국내 시장을 보루로 삼은 뒤 게임 플랫폼이 변화할 때마다 이에 빠르게 적응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인기 있는 게임을 빠르게 따라서 만드는 단순한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만 쓴 것이 아니라 PC방 문화를 바탕으로 온라인 게임의 선두주자 역할을 해왔고, 시작은 무료로 허용하되 이후 아이템 등 판매로 수익을 만드는 ‘페이 투 윈(Pay to Win, P2W)’ 모델도 만들어내며 창의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게임과 e스포츠가 주류 문화로 떠오르는 중요한 시점에 이르러 한국 게임계가 주춤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시장 규모 자체는 성장하고 있지만 더 이상 혁신이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며 미국과 중국 등 경쟁국에 비해 부족한 모습이 지적을 받고 있다.
글로벌 이용자의 기대 수준과 눈높이에 맞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달아나는 미국과 쫓아오는 중국 게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가는 美, 빅테크 무기로 게임 시장 공세
컴퓨터의 역사를 앞장서서 만들어낸 미국이 게임에서도 앞서간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기존의 게임사들 외에 압도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소위 ‘빅테크’ 기업들까지 미래 성장 동력으로 게임을 지목한 뒤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는 모양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구글 등 누구나 아는 IT 공룡들이 사업에서의 게임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특히 클라우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탄탄한 클라우드 인프라를 바탕으로 독점 콘텐츠를 확보해가며 경쟁에 나서고 있다. 콘솔이나 PC 대신 서버에서 게임을 실행하고, 인터넷 망을 통해 게임 플레이 비디오를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형태인 클라우드 게임은 비싼 고성능 PC나 게임 콘솔, 최신형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클라우드 시장에서 경쟁하던 아마존웹서비스(AWS), MS의 애저(Azure), 구글 클라우드플랫폼(GCP)이 자연스레 게임으로 전장을 넓혀가고 있는 형국이다.
MS는 탁월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레드오션’에서도 버티고 버텨온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게임 분야에서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과거 아타리가 1970년대 초 가정용 비디오 게임을 최초로 선보이며 콘솔 게임의 시초국가였으나 아타리가 매출 확대를 위해 질 낮은 게임을 찍어내다시피 하다 무너진 ‘아타리 쇼크(Atari Shock)’를 겪은 뒤 소니와 닌텐도 등 일본 기업에 콘솔 게임 시장을 내줬다. 하지만 MS는 우려 속에서도 2001년 엑스박스(Xbox)를 출시한 뒤 끝내 생존하는 데 성공한 상태다.
이제 MS는 단순히 콘솔 게임기라는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 ‘X클라우드’를 엑스박스 게임패스 얼티밋을 통해 서비스하는 중이다.
월정액 형태로 시범 서비스 당시 30여 종으로 시작한 X클라우드는 이제 100종이 넘는 게임을 보유하고 있다. 클라우드 게임이 인기를 얻고 제대로 서비스하기 위해 망 품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결국 다양한 게임 IP(지적재산권)인 만큼 MS는 게임사 인수에 힘을 쏟고 있다. 글로벌 숏폼 동영상플랫폼 ‘틱톡’ 인수전에서 밀려난 만큼 게임에 쓸 수 있는 총알도 많이 남았다.
실제로 MS는 지난 9월 75억달러(약 8조7000억원)라는 거액을 들여 제니맥스를 인수하면서 독점 콘텐츠를 강화하는 행보를 보였다. 제니맥스는 ‘엘더스크롤’과 ‘폴아웃’ 등의 게임 IP를 보유하며 세계 최대 비디오게임 개발사로 알려진 베데스다 소프트웍스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이외에도 MS는 지난 몇 년 동안 ‘닌자 시어리’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 같은 게임 개발사를 인수하며 산하의 게임 스튜디오만 어느덧 23개에 달한 상태다. 사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CEO) 역시 “게임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큰 시장”이라며 “더 많은 게임사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MS가 클라우드 게임 산업에 발을 들여놓는 사이 클라우드 산업 1위 사업자인 아마존 역시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존은 자체 클라우드 게임 플랫폼 ‘루나’를 최근 선보인 상태다. 아마존웹서비스(AWS) 클라우드로 구동되는 루나는 게임을 다운로드하지 않고도 무선으로 게임을 스트리밍할 수 있으며 PC와 Mac, iOS를 통해 즐길 수 있다.
아마존은 ‘루나+’ 애플리케이션에서 아마존의 4개 게임 제작사에서 만든 100개 이상의 게임을 출시할 예정이다. 이외에 외부 게임사 유비소프트의 게임을 별도 채널로 공급할 준비도 하고 있다. 이 모든 게임들을 월 5.99달러의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하고 자체 제작한 블루투스 게임 컨트롤러도 50달러에 판매한다.
원신
특히 아마존의 경우 자체 보유한 게임중계 플랫폼 ‘트위치’를 보유하고 있기에 이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예컨대 트위치에서 방송을 보던 유저가 게임이 하고 싶어질 때는 링크를 클릭하기만 하면 해당 클라우드 게임을 즉시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매체 CNBC는 “아마존은 클라우드 인프라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면서도 “새롭게 등장하는 기능, 콘텐츠, 수익 모델 등이 파급력을 결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글과 엔비디아 등 한발 먼저 클라우드 게임에 발을 내디딘 업체들은 MS와 아마존의 행보를 지켜보며 반격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3월 클라우드 게임 플랫폼 ‘스태디아’ 공개를 마친 뒤 11월 정식 서비스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시작한 구글은 약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지만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상태다. 무려 2017년부터 베타 테스트 형태로 지포스나우를 선보인 엔비디아 역시 게임에 필수적인 GPU를 기반으로 하는 생태계 창출에 힘썼지만 아직은 웃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이처럼 클라우드 게임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5G망을 보유한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등 통신사 위주로 해외 업체들과 손을 잡고 서비스가 시작되는 모습 정도가 관찰될 뿐이다.
시장조사업체 뉴주에 따르면 2023년 글로벌 클라우드 게임 시장 규모는 48억달러(약 5조6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중 한국의 몫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미국 IT 공룡들이 그동안 국내 게임계의 직접적인 경쟁자로 여겨지진 않았으나 클라우드와 모바일 중요성이 갈수록 강화되면서 점차 시장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미래가 그려지고 있다.
아마존 루나
▶따라오는 中, 양산형 게임? 이젠 글로벌 게임!
한때 ‘양산형’에 불과하다는 비웃음을 샀던 중국의 게임도 어느새 한국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출시된 ‘원신(영어 이름 Genshin Impact)’이 그 좋은 예시가 되고 있다. 중국 미호요가 만든 ‘원신’은 출시 직후 중국과 한국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독일 등 글로벌 모바일 마켓 매출 최상위에 오르며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전예약에 2000만 명의 이용자가 몰렸는데 그중 25%가 중국이 아닌 곳에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원신이 출시된 이후 미국 시장조사업체 센서타워는 첫 주 모바일에서만 6000만달러(약 690억원)를 벌어들였다고 발표했고, 아시아 게임 시장 전문 분석기관 니코 파트너스(Niko Partners)는 “원신이 지난 10일 기준 글로벌 누적 매출 1억달러(약 1150억원) 고지를 넘겼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PC·모바일·콘솔 멀티플랫폼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실제 미호요가 원신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앞선 조사에서 나타난 수치보다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각에서는 매출 세계 1위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이런 게임을 만든 곳이 불과 8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운 지점이다.
지난 2012년 상하이 교통대를 졸업한 3명의 학생이 의기투합해 만든 게임사 미호요는 불과 설립 8년 만에 직원 1500여 명이 넘는 커다란 게임사로 성장했다. ‘붕괴3rd’라는 게임으로 빠른 성장을 이뤄내더니 ‘원신’으로 단숨에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었다는 평가다.
중국 게임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미호요는 ‘원신’을 공개할 당시 닌텐도 스위치의 인기 게임인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을 표절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픽과 조작 등 다양한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인증되지 않은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몰래 설치해 정보를 빼가는 ‘백도어’와 홍콩·타이완·티베트·천안문 등의 단어를 필터링하는 정치색 등으로도 우려를 사고 있다. 물론 정치색과 관련된 부분, 개인 정보 관리는 당연히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표절에 불과해 인기를 얻기 어려울 거라는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고 있는 분위기다. “고양이를 보고 사자를 그리라”던 텐센트의 창업자인 마화텅의 말처럼 모방을 통해 창조까지 이어지며 중국 게임의 능력이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해서다.
엑스박스 게임패스
▶설립 8년 만에 매출 세계 1위 넘보는 中 게임社
‘원신’은 오픈월드 RPG 장르에 수집형 요소를 더하는 장르 융합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기존에 한국과 중국의 장기로 인정받던 모바일 게임 과금 요소로 수익성을 확보했으며 PC와 콘솔 플랫폼까지 글로벌 원빌드로 만들어 서구권 유저까지 잡아냈다. 비단 ‘원신’ 외에도 중국 게임의 퀄리티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텐센트 출신 개발진이 주축을 이룬 중국 게임 개발사 게임사이언스 서유기 줄거리를 기반으로 만든 ‘블랙 미스: 오공(영어 이름 Black Myth: Wu Kong)’은 출시 이전 수준 높은 영상을 공개한 것만으로 기대작 반열에 합류했고, 리크리에이트 게임즈에서 만든 파티 게임 신작 ‘파티 애니멀즈’ 역시 화제작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 개의 게임이 성공을 거둔다면 ‘대륙의 실수’로 불릴지 모르지만 이제는 개발 역량 자체가 높아졌다는 주장이 과언이 아니다. 넘치는 개발인력을 바탕으로 대작에는 힘을 주고, 유행을 많이 타는 저가형 모바일 게임은 속도전으로 치고 빠지는 일종의 투 트랙 전략이 가능해진 것이다.
자연스레 그동안 ‘크로스파이어’ ‘던전앤파이터’ 등의 인기 IP를 이용해 중국 시장을 공략해오던 한국 게임계로서는 위기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어느새 공략의 주체에서 대상이 되어버린 두려움마저 느껴지고 있다. 게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2017년 시작된 한국 게임에 대한 판호(중국 내 게임 영업 허가) 발급 중단까지 풀리지 않아 어찌 해볼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지난 8월만 해도 총 28개 게임에 대해 외자판호를 발급했지만 이번에도 한국은 판호 발급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판호를 발급받은 상태에서 개발까지 마친 넥슨의 ‘던전앤파이터 모바일’은 중국 내 사전 예약이 6000만 명을 돌파할 정도의 기대작이었지만 출시가 늦어지고 있다.
한 국내 게임사 관계자는 “혹시 중국 판호 발급이 재개된다고 해도 이제는 중국 게임보다 우리 게임이 경쟁력이 있을지 의문”이라며 “보다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시도해봐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밖에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게임이 부각되면서 당장 국내 게임사들의 매출은 늘어났지만 장기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잊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의 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