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업황 회복이 확실시됐던 반도체 산업은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라 전망이 엇갈리면서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1분기 시장 전망을 뛰어넘는 실적을 기록하며 선방했는데, 코로나19 영향이 본격화하는 2분기에 실적이 상당 부분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상존한다.
국내 반도체 투톱(삼성전자, SK하이닉스)은 강점을 가진 메모리에서 초격차를 확대하고 비메모리 등 신규 사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면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사상 초유의 위기를 타개한다는 전략이다.
SK하이닉스는 연구개발 투자로 주력 제품인 D램과 낸드플래시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코로나19 장기화할까… 2분기 반도체 업황은 여전히 안갯속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코로나19의 악조건 속에서도 반도체의 선전과 환율효과 등에 힘입어 증권가의 기대(컨센서스)를 웃도는 영업이익을 냈다. 반도체 덕분에 6조원대의 영업이익을 지켜내며 1분기 실적에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초 잠정실적을 집계한 결과 매출 55조원, 영업이익 6조4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매출은 전 분기보다 8.15%, 영업이익은 10.6% 줄어든 수치다. 메모리(D램·낸드플래시) 불황이 지속되던 작년 1분기와 비교할 때 매출·영업이익은 각각 4.9%, 2.7% 늘었다. 영업이익률은 11.6%로 2016년 3분기(10.9%)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도체의 경우 2018년 4분기 이후 부진이 계속되던 메모리에서 가격·수요 회복이 일부 진행돼 양호한 실적을 거두는 데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또 원화값이 하락해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는 환율이 우호적이었던 점도 실적에 영향을 미쳤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3월 D램(DDR4 8GB)의 고정거래가는 2.94달러로 전월 대비 2.08% 상승하며 3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코로나19 이후에도 고객사 재고 축적 수요가 꾸준히 늘어났고, 거래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재택근무, 온라인교육, 동영상·게임 등 언택트(비대면) 비즈니스 수요가 늘면서 서버 D램 수요가 늘고, 가격 역시 올랐다.
올해 2분기 반도체 산업은 언택트 환경 확산으로 서버 수요는 양호하겠지만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 부진으로 모바일 수요가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경기 침체가 심화돼 이미 재고를 상당 부분 쌓아놓은 고객사의 영향으로 반도체 부문을 지탱하고 있는 서버용 수요가 점차 약해지며 메모리 가격 상승폭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비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은 반도체 업황 회복 영향에 1분기보다는 나아지겠지만 개선 폭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전망이 대체적이다.
삼성전자는 주력 사업인 반도체 사업에 대해 코로나19 영향으로 단기적인 수요 감소는 불가피하겠지만 연내 업황 회복에는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경영현황을 설명하면서 “올해는 대외 불확실성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AI와 차량용 반도체 산업 성장, 데이터센터 업체들의 투자 증대, 5G 통신망의 본격적인 확산 등 신성장 분야를 중심으로 반도체 수요는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5G 확산세와 미국 인터넷 기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데이터 센터 투자 등 수요 전망에는 현재까지 변동이 없고 일시적인 생산 감소가 오히려 하반기 메모리 가격 상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 512GB eUFS 3.1 메모리
▶위기 속 초격차 확대 나선 삼성전자
최고속도 스마트폰용 메모리 양산·D램에 EUV 기술 첫 적용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전자는 코로나19로 경쟁사가 일부 생산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도 메모리 생산라인을 풀가동하고 차질 없이 중국에 있는 메모리 생산 공장 신규 라인을 가동하는 등 위기 속에서도 기술 초격차를 확대하면서 강점을 가진 메모리 분야에서 시장 리더십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평가다.
또한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모바일AP 등) 생산에 활용해온 극자외선(EUV) 공정 기술을 세계 최초로 D램·메모리에 적용해 생산성·성능을 높였고 경쟁사를 좀 더 멀리 따돌리며 ‘초격차’ 전략에도 속도를 붙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EUV 공정을 적용해 생산한 1세대(1x) 10나노급(1나노 10억 분의 1미터) DDR4(Double Data Rate 4) D램 모듈 100만 개 이상을 공급하여 글로벌 고객의 평가를 완료했다. 반도체 미세공정의 한계를 돌파할 채비를 갖추고 D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반도체는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포토’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회로의 폭이 좁을수록 칩 크기가 줄고 전력효율도 높일 수 있다. 칩 크기가 줄면 웨이퍼당 생산량이 증가해 원가경쟁력도 높아진다.
최근에는 회로 폭을 ㎚(나노미터·1㎚는 10억 분의 1m) 급으로 줄이는 ‘나노 공정’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10나노급은 회로 선폭이 10나노대임을 의미한다. 기존 포토 공정에 활용되던 불화아르곤(ArF)으로는 회로 미세화에 한계가 있고 미세 공정을 좀 더 진전시키기 위해 EUV가 활용되고 있다.
불화아르곤 대신 EUV를 활용하면 회로를 좀 더 미세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공정도 줄일 수 있어 성능, 수율(불량이 아닌 제품 비율), 생산성 등을 높이고 제품 개발 기간도 단축할 수 있다. EUV 공정 장비는 대당 2000억원에 달하는 데다 기술 난도가 높다.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EUV를 시스템 반도체에 활용해 왔는데 이번에 세계 최초로 메모리에도 적용한 것이다.
삼성전자 D램 메모리 생산기지인 경기도 평택캠퍼스 평택 P1라인.
▶작년 사상 최대 R&D 투자 비메모리 사업에도 박차 가하는 SK하이닉스
한국 반도체의 다른 한 축인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연구개발(R&D)에 역대 최대 금액을 투자했다. 직원 수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이 회사는 메모리 반도체 등 기존에 강점을 가진 사업 분야에서 기술력을 확보하고 비메모리 분야에서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업황 악화에 따라 작년 매출액이 전년 대비 33% 감소했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매출은 1.5배 가까이 증가하는 등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작년 연구개발 비용은 3조1885억원으로 집계됐다. 연구개발 투자액이 3조원을 넘어선 것은 회사 역사상 처음이다. 지난 2018년 2조8949억원보다 10.1% 늘어난 규모로 전체 매출에서 R&D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11.8%)도 1년 전보다 4.6%포인트 늘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연구소, 제품개발 연구소, 낸드솔루션과 미래기술 연구소 등에서 연구개발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면서 “지난해 말 현재 반도체와 관련해 1만3530건의 지식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직원 수도 작년 말 기준 2만8127명으로 2018년 말에 비해 2100여 명 늘어 SK하이닉스 설립 이후 사상 최대를 기록했는데, 올해 이후의 메모리 수요 회복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일부 인력 충원이 있었고, 이미지센서, 파운드리 등 육성 중인 비메모리 사업 부문에서도 증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의 작년 매출을 뜯어보면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가 눈에 띈다. SK하이닉스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33% 감소했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매출은 1.5배 가까이 증가했다. SK하이닉스의 2019년 D램 매출은 20조3000억원을 기록해 전년 대비 37% 감소했고, 낸드플래시 매출은 5조1000억원으로 31% 줄어들었다. 반면 비메모리 사업을 포함한 기타 항목 매출은 2018년 6500억원 수준에서 작년 1조6000억원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기타 매출 가운데 약 8000억원은 이미지센서 부문과 파운드리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 등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2018년(5500억 여원) 대비 1.5배가량 성장했다. 이에 따라 D램 부문 매출 비중은 2018년 80%에서 지난해 75%로 줄어들었다.
SK하이닉스는 모바일·노트북용 이미지센서 시장에 집중하고 있는데, 비메모리 분야 기술 확보로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개선해 안정적인 사업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의도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일본에 이미지센서 기술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개발 센터를 열고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이천·청주 사업장에 이미지센서 생산라인을 각각 1개씩 가동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기존 D램 라인 일부를 이미지센서 생산라인으로 전환해 공급과잉 상태에 있는 D램 생산량을 조절하고 이미지센서 생산량을 늘려 시장 수요에 대응했다.
현재 SK하이닉스 전체 매출에서 이미지센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제품군을 확대해 고화소·고부가가치 시장 진출을 노린다는 계획이다. 올해는 모든 CIS 제품을 ‘블랙펄(Black Pearl)’로 공식 브랜딩하고 하반기 중 0.8㎛(마이크로미터)의 픽셀 크기로 4800만 화소를 구현한 제품도 선보일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미래 핵심 수익원으로 추진하는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에서도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SK하이닉스시스템IC가 중국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산업집단과 합작법인을 설립해 건설 중인 파운드리 공장도 올해 2분기 내 준공된다. 현재 공장 인증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연말 양산이 목표다.
▶비메모리 1위 도전장 낸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관건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반도체 세계 1위를 천명한 바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일굴 ‘기적’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다. 삼성전자가 비메모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시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메모리에서는 세계 1등이지만 향후 더 큰 시장이 예고되는 비메모리에서는 1위와의 격차가 상당한 수준이다.
특히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전자에게 파운드리(반도체위탁생산)는 놓칠 수 없는 사업이다. 삼성전자는 이 분야에서 세계 1위인 대만 TSMC와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TSMC는 7나노미터(㎚·이하 나노) 미세공정(회로선폭을 줄이는 공정) 등에서 연이어 수주에 성공하는 등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벌리고 있어 만만치 않은 상대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추정치)은 작년 4분기 52.7%에서 올 1분기 54.1%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7.8%에서 15.9%로 낮아졌다.
TSMC와 삼성전자는 연내 5나노 반도체 양산에 나서며 본격적인 초미세공정 경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3나노 공정을 활용한 칩은 2022년께야 양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나노공정은 회로 폭을 나노미터급으로 줄여 반도체를 만드는 공정을 말한다. 나노공정이 미세해질수록 칩 크기를 줄일 수 있고 전력효율·성능도 개선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TSMC와의 7나노 이하의 최첨단 미세공정에서 주도권을 잡아 점유율 격차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간다는 방침이다. 미세공정 개발에 유리한 극자외선(EUV)을 먼저 활용해 기술 개발에 나선 만큼 향후 초미세 공정에서 주도권을 가져가 2030년까지 TSMC를 넘어선다는 복안이다. 양사의 파운드리 로드맵에 따르면 7나노 EUV 공정부터는 삼성전자가 미세하게 앞서거나 비등하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삼성전자는 화성에 EUV 전용 V1 라인을 가동하고 EUV 공정 기반 7나노 이하 차세대 파운드리 제품 생산에 돌입했다. EUV 노광 기술은 파장이 짧은 극자외선 광원으로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기술로, 기존 공정으로는 할 수 없는 초미세 회로 구현이 가능해 고성능·저전력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V1라인 가동으로 TSMC에 맞서는 삼성전자의 7나노 이하 제품 생산 규모도 지난해보다 3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선주문 수요가 많은 파운드리 사업의 특성상 코로나19의 여파가 주요 업체들의 1분기 실적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10나노 이하 미세공정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파운드리 업체가 TSMC와 삼성전자밖에 없기 때문에 대기 수요도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다만 코로나19 여파가 2분기부터 파운드리 시장에도 본격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상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