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패션업계의 불황 속에 휠라코리아의 나 홀로 실적 상승이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선 특정 제품을 통한 실적 향상이 아니라 휠라(FILA) 브랜드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우선 실적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2조9546억원과 3571억원, 브랜드 역사상 최대 기록이다. 올 상반기에만 매출 1조7939억원, 영업이익 2607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보다 각각 22.27%, 29.98% 성장했다. 증권가에선 이미 올 매출 3조원 돌파를 일찌감치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과연 휠라의 무엇이 브랜드의 가파른 성장곡선을 견인하고 있는 걸까.
지난 7월 25일 서울 명동에 오픈한 ‘휠라 서울점’
▶2016년 브랜드 리뉴얼, 아저씨에서 밀레니얼 세대로 타깃 이동
휠라는 191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해외브랜드다. 1970년부터 스포츠웨어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휠라는 NBA 농구스타를 기용한 스타마케팅이 성공하며 1980~1990년대 나이키, 아디다스와 함께 글로벌 시장을 주름잡는 3대 축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향격인 유럽시장에서 매출 부진이 이어지자 2000년대 초 파산위기를 맞게 된다.
사정이 급박해지자 당시 휠라의 지주회사였던 HDP가 매각을 결정한다. 1991년 국내에서 라이선스 형태로 휠라코리아 사업을 전개하던 윤윤수 회장은 M&A시장에 휠라가 매물로 올라오자 이를 놓치지 않았다. 2003년 본사를 사들인 윤 회장은 2007년 글로벌 브랜드 사업권을 완전히 인수하며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브랜드 휠라는 이후 성장세로 돌아선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지난 7월 휠라코리아 본사가 이전한 강동구 천호동의 이스트센트럴타워
2013년부터 매출이 고꾸라지더니 2016년엔 3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위기를 기회로 삼은 윤 회장의 경영노하우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같은 해 하반기부터 대대적인 브랜드 리뉴얼에 나선 휠라는 100년 역사를 내세운 헤리티지 제품을 연이어 출시하며 승부를 걸었다. 로고가 큰 티셔츠, 1970년대 유행하던 휠라 테니스화의 디자인을 계승한 제품은 레트로 열풍을 타고 밀레니얼 세대의 감성을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브랜드 리뉴얼 후 휠라의 고객층은 1020세대로 이동했다.
휠라코리아의 관계자는 “1020세대가 주 고객층이 되다보니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됐다”며 “소싱력을 강화해 생산단가를 낮춰 그만큼 그 혜택을 고객에게 돌리기로 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품의 질은 유지하면서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해 1020세대를 공략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브랜드 리뉴얼의 핵심이기도 했다.
▶휠라 부활을 이끈 윤근창 대표, 2세 경영체제 구축
2016년 하반기, 브랜드의 변화를 이끈 이는 윤윤수 회장의 장남인 윤근창 휠라코리아 대표이사(사장)다. 올 3월 정기 임원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윤 대표는 카이스트에서 컴퓨터 공학 석사를 마치고 미국 로체스터대 MBA를 수료했다. 휠라코리아가 글로벌 본사를 인수한 2007년 자회사인 휠라USA에 입사해 경영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사업 개발과 라이선싱, 소싱 업무를 담당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윤 대표는 당시 유통과 브랜드 운영 전반을 재정비하면서 인수 당시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던 휠라USA를 3년여 만에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2015년 휠라USA의 매출규모는 2007년 인수 때보다 10배나 커졌다. 윤 대표는 미국에서의 경영 능력을 발판 삼아 같은 해 7월 휠라코리아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2세 경영을 준비했다. 전략기획본부장으로 시작해 본인이 강점을 가진 풋웨어(신발) 본부를 총괄(본부장)하며 지난해 7월부터 경영관리본부장과 CFO를 맡아왔다. 업계에선 휠라코리아의 재도약 시기를 윤 대표의 합류 이후로 설명하곤 한다. 실제로 휠라코리아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2016년부터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윤 대표는 휠라코리아에 합류하며 휠라USA에서 성공한 홀세일(도매판매) 방식을 도입해 밀어붙였다. 주로 백화점이나 대리점에 납품하던 기존 전략과 달리 1020세대가 많이 모이는 신발 편집숍 유통을 병행하며 2016년 홀세일 본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그가 주도한 신발사업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휠라 ‘디스럽터2’
일찌감치 스포츠 브랜드의 성패는 신발에 달려있다고 확신한 휠라는 소싱력 강화에 오래전부터 공을 들여왔다. 2009년 5월 중국 진장 지역에 샘플 제작이 가능한 글로벌 소싱센터를 건립하고 신발 샘플을 100% 자체 개발했다. 여타 브랜드가 특정 공장에 비용을 지불하고 샘플을 제작하는 것과 달리 개발부터 품질, 단가 책정까지 휠라가 직접 관리해 운영했다.
당시 휠라USA에 근무하던 윤 대표가 진장에 3년이나 머무르며 직접 생산 프로세스를 챙길 만큼 경쟁력을 높였다. 이 과정을 통해 탄생한 제품이 ‘코트디럭스’와 ‘디스럽터2’ 등 6만9000원짜리 밀리언셀러 아이템이다.
2016년 9월 출시된 코트디럭스는 2017년 말 100만 족을 돌파했고, 국내 어글리 슈즈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디스럽터2는 2017년 7월 출시 이후 올 9월 말까지 국내에서만 300만 족 이상 팔렸다.
특히 디스럽터2는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인기가 뜨겁다. 지난해 7월, 글로벌 패션 데이터 플랫폼 리스트(Lyst)가 선정한 ‘2018년 2분기 톱10 여성 인기 아이템’ 중 2위에 올랐고, 미국 슈즈 전문 미디어 풋웨어뉴스는 2018년을 대표하는 ‘올해의 신발’로 선정했다.
현재 휠라코리아의 매출 중 신발 비중이 약 60%에 달한다. 온라인 비즈니스도 강화했다. 2016년 공식 온라인 몰을 재단장한 이후 온라인에서만 판매하는 단독제품들을 잇따라 선보이며 완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2017년 휠라 온라인몰의 매출은 전년 대비 약 10배, 지난해에는 약 3배나 성장했다.
▶적극적인 글로벌 마케팅도 주효
휠라가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실적 상승을 주도할 수 있었던 근간 중 하나는 적극적인 글로벌 마케팅이다.
2016년 10월 전 세계 휠라 자회사와 파트너사 경영진이 모인 정례회의 GCM(Glo bal Collaboration Meeting)에서 윤윤수 회장은 ‘원 월드 원 휠라(One World One FILA)’를 모토로 글로벌 공통 커뮤니케이션 강화를 강조했다.
휠라는 이후 브랜드 헤리티지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재해석하고 한국과 미국,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 공통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글로벌 브랜드의 장점을 살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의 협업도 강화했다.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를 시작으로 미국 셀렉트숍 브랜드 ‘어반 아웃피터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 ‘바하 이스트’ ‘제프 스테이플’, 전 세계 콜라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펩시’, 일본 셀렉트숍 ‘해브어굿타임’, 메이크업 브랜드 ‘베네피트’, 국내에선 빙그레 ‘메로나’, 배틀로얄 게임 ‘플레이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 ‘건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협업을 진행해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1020세대 사이에서 화두가 되고 있다.
휠라의 밀라노 패션 위크에 참석한 윤윤수 회장(가운데)
지난 9월 22일에는 전 세계 패션 메카로 손꼽히는 2020 SS 밀라노 패션 위크에 참가했다. 세계 4대 패션쇼 중 하나인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스포츠 브랜드가 단독 쇼를 개최한 건 다분히 이례적인 행사. 한 업계 관계자는 “스탠딩까지 자리를 꽉 채웠다는 건 장르를 떠나 그만큼 브랜드의 인기를 방증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펜디(FENDI)’와의 협업도 화제를 모았다.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두 브랜드가 알파벳 F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착안, 펜디 컬렉션 아이템 중 일부 디자인에 휠라 고유의 F로고를 접목시킨 협업 아이템은 지난해 2월 말 밀라노 패션 위크 기간에 열린 ‘2018 FW 펜디 레디투웨어 컬렉션’에서 공개되며 현지 관계자들로부터 “클래식한 분위기의 펜디 이미지가 휠라와 만나 한층 젊고 트렌디하게 탈바꿈했다”는 평을 얻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휠라는 최근 글로벌 아티스트 ‘방탄소년단(BTS)’을 브랜드의 글로벌 모델로 선정해 전속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방탄소년단은 내년 초 첫 브랜드 광고 이미지를 공개한다.
휠라는 방탄소년단과 ‘원 월드 원 휠라(One World, One FILA)’ 커뮤니케이션을 확대 전개해 브랜드 위상을 공고히 하고 이미지 제고의 기회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휠라코리아 관계자는 “소비자에게 합리적인 가격대의 제품을 제공할 수 있도록 소싱을 중심으로 비즈니스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했다”며 “앞으로도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품질 좋고 트렌디한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대에 지속 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최근 휠라의 글로벌 모델로 선정된 방탄소년단(BTS)
휠라코리아 지주사 전환 추진
휠라코리아가 지난 10월 2일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주사 역할을 하는 휠라홀딩스와 실제 사업을 담당하는 휠라코리아로 물적 분할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이 경우 휠라코리아와 휠라USA가 휠라홀딩스 자회사로 편입된다. 신설회사인 휠라코리아는 비상장사로서 의류 관련 사업을 총괄한다. 분할 기일은 내년 1월 1일로 예정돼 있다.
휠라는 이를 통해 경영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2007년 휠라코리아가 글로벌 브랜드 사업권을 인수한 이후 현재까지 글로벌 본사 역할과 국내 내수 부문도 함께 담당하는 구조로 운영됐다. 하지만 이번 분할 이후 휠라코리아는 국내 내수만 담당하고 휠라홀딩스가 글로벌 업무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휠라 관계자는 “이번 분할을 통해 경영 효율화를 꾀하고 지배구조 투명성도 높여 주주들의 만족도 또한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