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뜻은 조국을 위한 봉사였고 조국을 키우는 일이었으니/ 먼저 굶고 무지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교육의 횃불을 켜고 뛰었다/ 배워야 산다. 배워야 이긴다/ 배워야 내가 살고 우리가 살고 나라가 산다/ 피를 토하듯 그는 울부짖었다/ 배움에 굶주리는 어린 청소년들을 보고 주먹을 쥐었다/ 그것이 교육보험이었다./ 이 땅의 교육은 그렇게 출발했다./ 이 땅의 생명은 그렇게 다시 생명이 되었다. …”
신달자 시인은 교보생명 창업자인 대산 신용호의 삶을 이렇게 읊었다.
대산신용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는 “대산은 6·25 이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특유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으로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며 “(그가) 세계 최초로 창안한 교육보험은 이후 반백년에 걸친 한국 생명보험업계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전후 한국 경제를 일으키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고 대산 신용호 창업자 10주기
지난 9월 초 서울에선 고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자를 기리는 학술심포지엄과 추모식이 잇달아 열렸다. 올해는 그가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이들 행사엔 다수의 국내외 학자와 경제인은 물론이고 정치인과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해외에선 마이클 모리세이 세계보험협회 회장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보험인들이 직접 방한하거나 메일 또는 영상으로 메시지를 전해왔다. 잊힐 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그것도 중견그룹의 창업자를 추모하는 자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신용호 창업자가 보험업계는 물론이고 교육이나 문화를 포함한 많은 부문에 남긴 족적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9월 4일 서울 KT올레스퀘어 드림홀에서 열린 ‘대산 신용호 선생 10주기 학술심포지엄’엔 국내 보험학회 회원들과 교보생명 전·현직 임직원 등 3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심포지엄에서 이봉주 한국보험학회장(경희대 교수)은 “한국 보험업계는 유례가 없을 만큼 고속성장을 해 세계 8위 규모로 커졌다. 이 과정에서 대산 신용호 선생은 우리나라 보험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진학보험이나 아동보험 육영보험 등을 개발해 보험의 새 역사를 썼다. 미국 앨라배마대가 그를 ‘세계 보험인의 스승’으로 추대한 것도 그러한 공적이 있어서다”고 설명했다. 대산은 1983년 세계보험협회에서 ‘세계보험대상’을 받았고 1996년 7월엔 세계보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바 있다.
마이클 모리세이 세계보험협회 회장은 “대산은 교보생명을 창립해 한국 생명보험업계의 발전을 견인했을 뿐 아니라, 세계 보험산업 성장과 번영에 기여한 존경받는 선구자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대산이 “설립 초기의 IIS를 이끈 가장 존경스럽고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리더 중 한 분”이라며 “대산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하고도 길이 남을 만한 것은 ‘신용호세계보험학술대상’을 제정한 것”이라고 했다. 1997년 제정된 이 상은 매년 ‘IIS 연차총회’에서 제네바 협회(Geneva Association)와 공동으로 보험산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응용 연구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모리세이 회장은 특히 “대산은 교육과 보험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가 사랑했던 나라를 재건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그가 창안한 획기적인 교육보험은 전후 한국 사회의 재건을 위한 자본을 축적하고, 미래 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청년들에게 지속적인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세계 보험업계 스승으로 꼽혀
세계 보험업계에서 ‘대스승’으로 불릴 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대산은 사실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을 만큼 정규교육 혜택을 받지 못했다. 부친이나 형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해 늘 일제에 쫓긴데다 그 자신은 어릴 적 병치레를 하느라 입학 기회마저 놓쳤다.
대산은 그 한계를 독학과 천일독서(千日讀書)로 넘어섰다. 스스로 실력을 닦은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다롄의 도매상을 거쳐 베이징에 곡물수집상을 열어 사업가의 꿈을 키웠다. 베이징 곡물사업은 100명 이상의 직원을 둘 정도로 번창했다. 광복이 되면서 대부분의 자금이 묶였을 때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금마저 동포들을 귀국시키는 데 썼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한때 방직공장을 세워 사업을 일으켰다.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원점으로 돌아온 그는 전쟁 후 철강사업을 벌였으나 은행이 약속했던 자금을 지원하지 않자 새 사업을 찾아 나섰다. 오랜 조사 끝에 그가 선택한 사업이 보험이다. 그것도 세계에 하나뿐인 독창적인 교육보험이다.
회사명에 ‘생명보험’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류를 반려하는 관리들을 설득해 사명을 확정한 그는 1958년 8월 7일 대한교육보험을 출범시켰다. 교육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키우고, 보험으로 자립경제의 바탕이 될 자본을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회사였다. 창립과 동시에 ‘진학보험’을 출시했다. 전쟁 뒤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국민들에게 매일 담뱃값만 절약해도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상품이었다.
그러나 맨주먹으로 시작한 회사의 출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창립 후 2년은 적자가 이어졌다. 대산은 먼저 학교를 돌면서 팸플릿을 나눠주며 진학보험의 취지를 설명했다. 사장이 죽을힘을 다해 뛰니 임직원들도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렇게 교사와 학생들을 통해 보험이 알려지면서 회사는 비로소 안정성장의 궤도로 접어들었다. 교육보험은 이후 30년간 300만명에 가까운 학생들에게 입학금과 학자금을 지급했다. 그렇게 공부한 인재들이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