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심상치 않다. 우애 좋던 형제들이 한순간에 경쟁자로 변신한 듯한 모습이다.
재계에 따르면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일본 사업은 신동주 일본롯데 부회장, 한국은 신동빈 한국롯데 회장에게 경영을 맡겼다. 두 형제들 역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제까지 별다른 문제없이 지내왔다.
그러나 최근 신동빈 회장이 롯데그룹 계열사 지분을 연달아 사들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동빈 회장의 지분매입이 이어지자, 최근에는 신동주 일본롯데 부회장도 롯데 계열사 지분 매입에 나서는 등 롯데그룹의 형제 경영자들이 경영권 분쟁에 가까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분업’ 체제로 유지됐던 동남아 시장에 대한 암묵적 약속도 깨졌다. 일본롯데가 동남아시장에 진출, 한국롯데와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형제간에 벌어진 계열사 매입 경쟁
사이좋던 롯데가의 형제들이 틀어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부터다. 신동빈 한국롯데 회장이 먼저 계열사 지분을 사들였다.
신 회장은 지난 9월 9일부터 13일까지 롯데손해보험 주식 100만주(1.49%)를 매입했다. 이밖에도 올해에만 롯데푸드, 롯데케미칼,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등의 주식을 소량으로 매입했다. 지난 1월에는 롯데푸드 지분 1.96%를 늘렸고, 5월에는 롯데케미칼 6만2200주를 사들여 보유 지분을 0.3%로 높였다. 6월에는 롯데제과 6500주와 롯데칠성 7580주를 잇따라 매입했다.
동생의 선제공격에 형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신동주 일본롯데 부회장은 지난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롯데제과 주식 620주를 사들였다. 이에 따라 신 부회장의 롯데제과 지분율은 3.52%에서 3.57%로 높아졌다. 이에 앞서 그는 지난달 초에도 롯데제과 주식 643주를 매입했다. 또 올 1월에는 롯데푸드 2만6899주(1.96%)를 사들인 바 있다.
신동주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롯데쇼핑 지분 매입에 서로 민감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왜 일까. 롯데쇼핑이 바로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가늠할 수 있는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그룹의 51개 계열사들은 순환출자 고리로 연결되는데, 이중 43개 계열사가 롯데쇼핑을 거쳐 간다. 롯데칠성은 24개, 롯데제과는 12개 순환출자 고리에 연결돼 있다. 사실상 롯데쇼핑의 경영권을 확보한 이가 곧바로 한국롯데그룹의 지배권을 갖게 되는 구조다.
호텔롯데 지분 가진 신동주 부회장 우세
현재까지의 결과만 놓고 보면 두 형제의 경쟁적인 계열사 지분 매입은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동생이 한발 앞서 나가면 형님도 곧바로 따라 붙는 모습이다. 그룹 전체로 보면 양쪽 다 비슷한 속도로 보유 지분을 늘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롯데쇼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롯데쇼핑의 최대주주에 오르면 곧바로 한국롯데의 경영권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롯데쇼핑의 최대주주는 여전히 동생인 신동빈 회장이다. 신 회장은 13.46%를 보유하고 있어 최대주주에 올라 있다.
그렇다고 신 회장이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형인 신동주 부회장 역시 13.45%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간 지분율 차이가 0.01%p에 불과한 셈이다.
재계에서는 그러나 신동주 부회장의 우세를 점치는 모습이다. 압도적인 차이로 한국롯데의 경영권을 접수하지는 못하겠지만, 지분싸움으로 갈 경우 형의 영향력이 더 높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동주 부회장은 자신이 주요주주로 있는 호텔롯데를 통해 롯데제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실제 호텔롯데는 롯데쇼핑 지분 8.83%를 보유하고 있다. 신동주 부회장이 호텔롯데 지분 19.2%를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롯데쇼핑의 경영권은 신동주 부회장에게 무게추가 더 쏠리게 된다.
여기에 호텔롯데는 롯데제과 3.21%, 롯데칠성 5.92%, 롯데케미칼 12.68% 등 30여개 계열사 지분도 갖고 있다. 신동빈 회장이 올해 초부터 지분매입에 나섰던 계열사들의 지분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신 회장은 롯데제과 5.34%, 롯데칠성 5.71%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 부회장은 롯데제과 3.52%, 롯데칠성 2.83%의 지분을 소유 중이다.
이런 점 때문에 재계에서는 신동빈 회장보다 신동주 부회장이 롯데그룹 경영권 확보에 더 유리한 고지에 올라있다고 보고 있다.
‘책임경영’ 해명에도 의혹은 깊어가
롯데그룹 측은 오너 일가의 이 같은 지분매입 경쟁에 대해 “신동주 부회장의 계열사 지분 매입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면서도 “신동빈 회장이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것은 주가하락에 대한 책임경영 차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롯데제과와 롯데칠성 역시 올해 초 롯데미도파의 흡수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상호출자를 해소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덧붙였다.
재계에서는 그러나 롯데 측의 이 같은 해명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두 형제의 과거 행보를 살펴보면 최근의 지분 매입 경쟁은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실제 두 사람은 2003년 각각 롯데제과와 롯데칠성 주식을 사들인 후 올해 초까지 단 한 번도 계열사 주식을 매입한 적이 없다.
동남아 시장에서의 불편한 관계도 이 같은 의혹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달 2일 “한국과 일본 양국의 롯데가 6억명의 거대 시장인 동남아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 일본 롯데는 지난 7월부터 태국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오는 11월에는 인도네시아공장이 가동된다. 이와 관련 신동주 부회장은 “과자 브랜드 전략은 일본이 주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반면 한국롯데의 롯데제과 역시 2007년 베트남 제과업체인 비비카를 인수하며 동남아 시장 공략에 나선 상태다. 특히 신동빈 회장이 직접 세일즈에 나선 베트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남아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동남아 시장은 원래 한국롯데가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면서 “분업 구도의 해체와 형제간 지분 경쟁 등 롯데그룹에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