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져 달리던 사람이 2등을 제쳤습니다. 그럼 몇 등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1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따져보세요. 2등을 제친다고 1등이 될 수 있습니까? 2인자의 성패는 바로 이 부분에서 갈립니다.” 한 중견기업 간부가 꺼낸 성공한 2인자의 비결이다.
“아버지는 경제활동과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내조 없이 행복한 가정은 이루어질 수 없지요. 내조가 탁월할수록 아버지의 지위도 높아지고 자녀들도 장성합니다. 2인자 리더십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한 CEO 코칭 컨설턴트의 조언이다.
비공식적인 관계가 성패 결정, 2인자 다루기
“모든 걸 공유하던 상무가 핵심기술을 들고 튀었어요. 하늘이 노랗더군요.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없이 반짝 들고나가서 한동안 사람을 믿지 못했습니다.” 국내 한 IT중소기업 사장의 푸념이다.
“믿을 맨이라 생각하고 십수년 동안 해외사업을 맡겼더니 해외 거래선을 갖고 새 사업을 차리더군요. 회사가 휘청거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2인자를 두지 않습니다. 5인 위원회를 두고 모든 결정은 그 위원회에서 내립니다. 2인자가 없으니 서로 경쟁하면서 오히려 효율이 높아졌어요.”
국내 한 무역업체 대표의 후일담이다. 모두 2인자와 관련한 1인자들의 고충이 담겨 있다.
2인자 리더십이 각광받을수록 2인자를 조율하는 1인자의 능력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커리어 전문가들은 “1, 2인자 관계의 핵심은 공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관계에 있다”고 조언한다.
직급이 아니라 사석에서도 1인자가 취약한 부분을 제대로 뒷받침하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2인자와 원활한 관계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실력과 배경, 품성 등의 리더십은 1인자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Example 1. 나이가 곧 위아래?
A사장은 신사업팀을 구성하며 스펙이 좋은 B전무를 영입해 2인자로 앉혔다. 하지만 그동안 2인자 위치에 있던 C상무보다 나이가 어린 게 문제였다.
내부에서 힘을 보태줘야 할 C상무가 B전무의 나이를 거론하며 사태가 심각해졌다. 2인자라 각인된 상무가 전무를 무시하니 A사장의 신사업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접어야 했다.
A사장은 그 일이 있은 후 같은 상황이면 꼭 공개적인 코멘트를 한다.
“새로 오신 D임원은 저를 대신해 사업을 이끌어 가실 분입니다. C상무를 비롯해 전 직원이 제대로 모시기 바랍니다.”
Example 2. 2인자는 2인자로 컨트롤
E회장은 요즘 믿고 데리고 다니던 F사장이 껄끄럽다. 입안에 혀처럼 굴던 그가 간혹 목소리를 세우기도 하고, 둘이 있을 때 눙치고 엉기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맡겨 놓은 프로젝트가 제 궤도에 올라 쳐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 E회장은 F사장의 수족이라 불리는 G상무를 불러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곤 한마디 했다. “요즘 F사장 판단이 간혹 흐려지는 것 같던데. 좀 더 잘 모시게.” 이후 E회장은 임원회의 때 G상무가 F사장 의견에 끼어드는 상황을 간간히 목격한다. F사장의 태도가 달라졌음은 물론이요, 사내 경쟁체제가 서서히 고개를 드는 형국에 E회장은 요즘 고사성어를 되뇌고 있다. ‘음… 이이제이(以夷制夷)라 했던가.’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 2인자 처세
1분기 실적발표가 마무리되고 각 기업마다 인사 이동이 진행되면서 조직 내 2인자 리더십이 다시금 화두로 떠올랐다. 눈에 띄는 행보 중 하나는 2인자를 전면에 내세운 전략적 선택. 우선 지난 3월 말 주주총회에서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1000억~2000억원의 투자를 유치해 연구개발(R&D)과 브랜드에 투자할 것”이라며 발 벗고 뛰겠다던 박병엽 팬택 부회장이 이준우 사업총괄 부사장을 대표이사에 앉히고 현업을 총괄하도록 했다. 박 부회장은 최근 닥친 자금난 극복을 위해 외부 투자자금 유치에 전념한다는 계산이다.
스스로 원톱체제를 접고 투톱체제를 출범시킨 박 부회장은 “기업의 경영자와 구성원은 경영환경에 따라 확충되거나 변화되더라도 기업은 항구적으로 영속할 수 있는 구조와 기반을 가져야 한다”며 “팬택이 지속적으로 성장을 계속해 갈 수 있는 안정적인 경영구조를 구축, 발전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경영자를 꾸준하게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선 다소 의외란 반응이다. 그동안 박 부회장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관리본부를 총괄했던 윤두현 부사장이 2인자란 말이 돌았었기 때문이다. 팬택 내부에선 “이 부사장이 평소 박 부회장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 신임을 얻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1인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준비하는 게 2인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전략적 선택에 가장 필연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인자와 2인자의 관계는 이처럼 성장과 유지, 성공과 실패의 단어와 밀접하다. 삼성의 도약을 이끈 이건희-이학수의 관계가 대표적인 성공모델이라면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존 스컬리의 관계는 실패한 모델이다. 국내 금융계도 그룹의 성패를 논하며 1, 2인자의 관계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한금융그룹의 라응찬-신상훈 관계가 가장 대표적이다.
2010년 9월 2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은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이 신한은행장 재직 시절, 2006년과 2007년 투모로그룹에 438억원을 부당 대출한 혐의와 이희건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 가운데 일부를 빼돌린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현 행장이 전 행장을 고소한 것이다. 신 전 사장은 이 행장의 배후에 라응찬 전 회장이 있다며 “라 회장이 경영자문료 15억원 중 5억원을 전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금융계에선 ‘1인자와 2인자의 혈전’이란 말이 돌았다. 누가 봐도 서로 치부를 드러내며 맞선 격이었다.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신한사태의 현장이 실시간으로 중계됐고, 신한금융의 근간인 재일교포 주주들의 지지도 반대로 돌아섰다. 관련 인물 모두 은행법 위반, 금융실명제법 위반으로 검찰에 출두했다.
이 사태 이후 신한금융은 신 전 사장의 자리를 임명하지 않고 있다. 2010년 12월, 2인자였던 신 전 사장이 사퇴하면서 그룹의 2인자 자리도 사라져버렸다.
넘버2 리더십, 2인자의 네 가지 유형
흔히 2인자와 관련한 해외 기업의 성공사례로 글로벌 기업 GE가 꼽힌다. 1980~90년대 1인자였 잭 웰치 전 회장이 사람 키우는 일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잭 웰치 회장은 내부 리더십 ‘파이프라인’을 통해 2인자들 간 경쟁을 유도했고, 수평적 권력구조인 서구문화와 결합해 제프리 이멜트가 자연스럽게 후계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오너십이 강한 한국의 기업문화에선 2인자 리더십이 쉽지만은 않은 문제다.
글로벌 기업의 2인자와 후계구도가 주주와 이사회 중심이라면 오너 기업은 말 그대로 1인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1인자의 2인자 다루기’와 ‘2인자 리더십’이 국내기업의 화두인지도 모를 일이다. 매일경제 MBA팀이 분류한 2인자의 네 가지 유형은 그런 의미에서 국내기업의 2인자 유형이다.
첫째, 코디네이터(Coordinator)형
조정자, 기업 내부의 각 사업과 프로젝트를 조율하고 파트 간 충돌을 조정한다. 각 사업 분야가 자신들의 수익창출에 몰두하다 내부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세심히 관찰하면서 1인자(CEO)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이다. 삼성이나 LG 등 다방면에 사업을 펼치고 있는 대기업 그룹군에 적합한 유형이다. COO(최고운영책임자, Chief Operating Officer)가 주로 하는 역할이다. COO형 2인자라 불러도 무방하다.
둘째, 어드바이저(Advisor) 형
조언자, 이들은 산업의 트렌드를 앞서서 읽고 CEO가 펼쳐가는 사업의 방향성을 점검하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끝없이 조언한다. IT·첨단기업처럼 CEO가 주로 기술적인 분야에 관심이 높고 비즈니스 마인드가 강하지 않은 경우 적합하다. CSO(최고전략책임자, Chief Strategy Officer)가 해야 할 일과 비슷하다. CSO형 2인자라고도 할 수 있다.
셋째, 셰도 스트라이커(Shadow Striker)형
마치 축구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어 제1 스트라이커가 골을 넣을 수 있도록 돕는 것처럼 CEO의 올바른 결정(골)을 위해 최대한 많이 움직이는 2인자다. 보통 유통·식품 등 경쟁이 치열하면 매일매일 성과가 달라지고 판매량이 바뀌는 산업에는 세 번째 유형의 2인자가 필요하다. CMO(최고마케팅책임자, Cheif Marketing Officer)의 성향과 역할이 많이 반영돼야 하는 2인자다.
넷째,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형
CEO가 내리는 결정이나 선택에 있어 끝없이 반대급부를 말하면서 1인자의 결정에 실수가 없도록 돕는 역할이다. 기업이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나, 산업 전체가 위기여서 크게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 경우에 반드시 필요한 2인자 유형이다. 보통 CFO(최고재무책임자, Chief Finance Officer)에게 주어진 역할과 유사하다.
삼성의 2인자들
흔히 2인자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업이 삼성이다. 총수를 대신해 인사권을 쥐고 진두지휘하는 막강한 실세이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2인자는 모두 7명. 오실 땐 단골손님 가실 땐 남이라던가. 웃는 얼굴로 만난 이들 중 웃으며 헤어진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삼성의 2인자는 비서실장, 구조조정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등의 명칭으로 불렸다. 현재는 미래전략실장이다. 선대 이병철 회장 시대부터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인 1990년까지 2인자 자리를 지킨 이는 소병해 실장이다.
하지만 그는 이 회장과 원만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이 부회장 시절 소 실장이 뒷조사를 지시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비화. 이 회장은 취임 후 3년간 사실상 소 실장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 기간 중 상속문제와 소 실장에 대한 주변을 정리했다는 후문이다. 후임 이수완 실장은 두 달 만에 경질됐다. 최단명 비서실장으로 남았다.
그 뒤를 이은 이는 삼성생명의 이수빈 회장이다. 당시 이 실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던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질도 중요하지만 양적 성장도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가 눈 밖에 났다. 1993년부터 비서실의 수장은 현명관 실장이 맡았다. 삼성의 2인자 중 유일하게 웃으며 헤어진 인물이다. 감사원 부감사관 출신인 그는 호텔신라와 삼성종합건설 대표를 거쳐 비서실장이 됐다. 당시 재계는 이 회장의 숙원이던 자동차 사업과 관련해 행시 출신인 현 실장의 네트워크가 절실했다고 분석했다.
현 실장은 1996년 실장직에서 물러난 후 전경련 상근 부회장, 한나라당 제주도지사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 삼성물산 상임고문이다. 재무통으로 알려진 이학수 부회장은 IMF 시기 구조조정에 성공해 삼성의 도약을 이끌어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도 주도했다. 그만큼 이 회장과 궁합이 맞았다.
이심복심이란 말이 돌기도 나왔다. 하지만 2010년 이 회장은 이 실장과 결별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2인자의 힘이 커지니 자연스럽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며 “불편한 1인자가 2인자를 겨냥해 내부 비리 척결의 칼을 빼들었다”고 표현했다. 삼성은 이후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들이 줄줄이 물러났다. 이학수 부회장 체제를 정리한 이는 김순택 부회장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해 6월 물러난 김 부회장은 그러나 이학수 부회장 정리를 위한 소방수였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현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의 발탁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경영 승계 작업을 앞당기는 의미를 담고 있다. 최 부회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로 재직하면서 이재용 사장과 수시로 경영 현안을 논의할 만큼 긴밀하게 호흡을 맞춰 왔다. 미래전략실장으로서 이재용 사장의 경영 승계를 준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적임자로 꼽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