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회사들만 신나는 것 아니야?” 4월 국회의원 선거의 공천자 상당수를 지역구에서 전화조사를 통해 선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친구가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얘기를 했다.
신이 날 정도는 아니지만 정치권이 조사회사들의 더욱 큰 고객 산업군이 된 것은 분명하다. 보통 조사는 정치·여론조사와 마케팅조사 두 가지로 크게 나눈다. 마케팅조사의 비중이 80%로 압도적이지만 정치·여론조사 시장은 2000년대 들어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선거가 있어 정치·여론조사가 20% 이상으로 비중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본선 후보에 대한 사전조사와 출구조사가 주를 이뤘는데, 이제는 공천을 위한 조사까지 많은 지역에서 행해져 성장세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올해 한국의 전체 조사 시장 규모는 약 5000억원으로 추산된다. 1993년에 조사 시장 규모가 200억원이었으니, 20년 동안에 25배로 커졌다. 정치·여론조사 시장이 최초로 10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양적 신장에 어울리는 질적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질적인 문제를 볼 수 있다.
환경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조사 방식
첫째, 조사 방식이 환경의 변화를 따르지 못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랬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유선전화를 이용한 조사 방식이 가장 많이 쓰인다. 그런데 잘 알려졌다시피 집에 전화를 설치하지 않고 휴대전화만 쓰는 사람들이 많다. 전화번호부에 나오지 않는 인터넷전화를 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전체 연령대에 걸쳐 고루 집에 있는 시간도 계속 줄고 있다. 특히 젊은 층은 유선전화로 접촉하기가 매우 힘들다.
가격만을 따지는 조사
필자는 1993년 광고회사에 들어와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수립하는 일환으로 조사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전략 수립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기업의 모든 광고에 대한 사전조사를 20~25명 정도의 조사대상자를 한 곳에 모아놓고, 설문지 기입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혼용한 CLT(Central Location Test) 방식으로 하는 조사를 맡아서 30여 개 그룹에 대해 직접 진행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는 주로 해외시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부문을 맡아서 해외에서의 조사를 많이 하게 됐다. 해외와 국내의 조사는 당연한 얘기지만 여러 가지로 달랐다. 해외 조사는 국내의 조사회사와 계약하고, 그 국내 조사회사가 해외의 조사회사와 계약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바로 해외 회사와 계약해 일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아무래도 국내 조사회사를 쓰면 언어 소통도 편하고, 무리한 요구도 잘 들어주는 장점이 있다.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바로 해외 회사와 계약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조사비였다. 조사비가 생각보다 너무 비싸서 비용을 지불하는 곳을 최소화하자며 국내 조사회사를 배제했다. 당시 FGI는 미국과 유럽에선 한국에서의 통상 비용에 비해 4배 이상이 들었다. 다른 전화면접이나 대면조사도 서구 국가들의 경우 3배 이상이었다. 다른 국가들에서는 전화조사를 하는데 중국에서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면조사를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중국은 전화조사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인건비가 싸서 대면조사를 해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외 업무를 하다가 국내 광고주에 대한 전략서비스를 담당하는 팀을 맡아서 오랜만에 국내 조사 업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 게 2004년이었다. 조사 단가는 10년 전인 1994년과 달라지지 않았다. 조사회사 사람들에게 소비자조사 단가만큼 가격이 변하지 않은 것이 없어 물가안정에 혁혁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08년의 경제위기 이후 조사비는 떨어져서 놀랍게도 대면조사 단가는 조사회사에 견적을 보내달라고 하면 1994년보다 더 싼 가격을 내미는 곳이 대부분이다.
전화조사나 인터넷조사를 비용 측면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경쟁사보다 더 싼 가격을 외치는 회사를 기업들이 선택하면서 방법상의 우위는 조사회사를 선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로지 가격이 조사회사 선정의 기준으로 작용했다. 조사회사들의 수익은 악화되고 조사를 의뢰한 회사에서 얻는 결과도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는 게 두 번째 문제다.
단답식의 답만을 구하지 마라
앞의 두 가지 측면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한데, 즉각적이고 1차원적인 조사 결과만을 따지는 풍조가 조성됐다. 시험으로 치면 단답형이나 사지선다형의 1대1의 답이 나오도록 구성한 설문들이 대부분의 조사에서 쓰인다. 조사 의뢰자가 그렇게 요구하니까 그렇게 하게 된다고 한다. 복수의 광고물이나 제품 디자인 등을 놓고 어떤 것이 좋을까 소비자의 소리를 들어서 결정하는 문제들에 대해 그런 식의 단순한 설문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다. 언뜻 옳은 얘기같지만 조사 결과 수치 뒤에 숨는 비겁함 혹은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 보인다.
애론(Aeron)이란 회사는 파격적인 디자인의 사무용 의자들을 내놓으며 1990년대 초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들이 1993년에 처음으로 시장에 제품을 내놓을 준비를 하면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제품들에 대한 반응을 시험했다. 소비자 평가조사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10점 만점에서 2~6점 정도에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대답할 정도로 점수가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회사들에서는 이런 점수가 나오면 신제품 출시를 포기한다.
앞서 필자가 1년여 모든 광고물에 대한 사전조사를 진행했던 회사는 2000년대에 들어서 광고물 사전조사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더욱 높였다. 필자가 진행할 때는 점수도 점수지만 목표고객층인 조사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선이었는데, 나중에는 점수만을 따져서 자신들이 그때까지 사전 조사했던 광고물 평가 점수 평균을 넘지 못하면 무조건 광고물을 내보낼 수 없게 규정을 만들었다. 그 이후 그 회사의 광고물들은 너무나도 평범해졌다. 화제가 되는 광고가 없어졌다.
애론의 경영인들은 소비자 대상 조사에서 나온 혹평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다. 그 후의 스토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회사의 매출은 매년 전년 대비 50~70% 이상의 급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애론이 1990년대 말에 같은 형식으로 소비자조사를 하면 10점 만점에 8점 이상이 안정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정말 새롭고 좋은 것은 소비자들이 처음에 불편해하고 어색해한다. 당연히 점수가 잘 나올 수가 없다. 소비자의 생각과 행동을 조사를 통해서 쫓기도 해야겠지만 소비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조사대상자가 그런 1차원적인 형식을 강요한 까닭도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의뢰자의 요구를 수용한 조사회사의 책임도 있다. 소비자도 생각하지 못했던 소위 인사이트(Insight)를 발견하는 단초는 결코 소비자가 1차원적으로 응답한 결과를 그대로 모아놓은 데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인간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많은 제품들이 소비자들의 혹평 속에 탄생하고 시장에서 출발했다. 오죽하면 애플(Apple)은 소비자조사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자랑하겠는가? 무조건 조사를 하지 말라는 것보다는 치열한 연구, 사고, 경험에 기초한 직관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잘한 소비자조사는 더욱 굳건하고 도움이 되는 기반이 될 것이다.
그저 수치로 나타나는 결과만을 취하는 식으로 조사를 보는 관점도 지양해야 한다. 선거와 관련한 조사에서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냐?’ ‘누가 당선될 것 같으냐?’고 묻는 방식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실제 미국에서 세 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묻는 실험을 했는데, 세 번째의 당선자를 예측해보라는 질문에 실제 결과와 가장 가깝게 나왔다고 한다. 간단한 설문이라도 설계와 설문 방식에 따라 보다 정확한 예상치를 얻을 수 있다. 사전부터 조사 의뢰자와 조사 담당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조사에 자부심을 가져라
조사회사 친구들은 조사야말로 대표적인 3D업종이라고 자조적으로 얘기하곤 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나타내려니 어렵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을 많은 경우 숫자로 나타내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밤샘근무가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데이터를 출력한 용지들이 곳곳에 쌓여있고 날리다 보니 사무실이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조사를 빌려 껄끄러운 일을 처리해버리려는 의뢰자들이 많으니 위험하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조사회사에서 져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떠넘기는 경우도 많다. 이번 선거와 관련한 공천자 선정도 그렇고 기업에서도 조사 결과에 그저 결정을 맡기거나 합리화시키는 걸로 활용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3D업종이라는 데서 조사업계 사람들은 힘들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자부심이야말로 진정한 전문 분야로서 조사가 인정을 받도록 만들 것이다. 또한 조사에 책임을 미루거나 맹목적으로 조사 결과만을 따지며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일부 조사 의뢰자들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