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술 마시고 ×× 돼서 마나님에게 혼났네~!”
얼리어답터로 잘 알려진 박용만 ㈜두산 회장이 과거 자신이 사용하던 SNS에 남긴 말이다. 자산 기준 국내 재계 순위 10위 안의 대기업 총수가 하기에는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두산그룹 임직원들에게 박용만 회장의 이런 모습은 익숙하다. 권위와 격식을 버리고 언제나 소탈하게 지내는 박용만 회장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116년 동안 국내 재계의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해온 두산그룹의 혼맥은 그야말로 소탈하다. 재계 대표기업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만큼 정·재계 유력 인사들과의 혼사가 잦았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대부분 평범한 결혼을 해왔다. 중매로 결혼을 한 3세대 ‘용’자 돌림 형제들이나, 연애결혼을 주로 한 4세대 ‘원’자 돌림 자녀들을 살펴봐도 크게 눈에 띄는 혼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포목점으로 시작해 소비재기업으로, 다시 중공업그룹으로 100년 넘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두산그룹 ‘박승직’ 가문을 살펴봤다.
‘배오개의 거상’에서 시작된 두산그룹
국내 최고(最古)의 기업인 두산그룹은 올해 8월 116세가 된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란을 가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1896년 서울 종로 4가(당시 지명 배오개)에서 ‘박승직상점’이 문을 열며 두산그룹의 역사가 시작됐다.
창업주인 고 박승직 씨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면포상과 보부상을 통해 모은 종잣돈으로 당시 배오개시장에 포목점을 열었다. 이후 박승직 씨는 1905년 한국 최초의 경영인 단체인 한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되자 상임의원에 피선됐으며, 재직 시절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원의 차관을 갚기 위해 거국적으로 전개됐던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해 70원을 내놓기도 했다.
1915년에는 부인인 고 정정숙 여사가 개발한 화장품 ‘박가분’을 시판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25년 상점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박승직 창업주는 정정숙씨와 결혼해 슬하에 딸만 여섯을 두다 1910년 첫 아들인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을 얻었다. 이후 우병과 기병, 규병 등의 아들이 더 태어났지만, 둘째인 우병을 제외하고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박두병 초대 회장은 경성고상 졸업 후 아버지의 회사가 아닌 조선은행에 다니다, 1931년 대지주인 명태순 씨의 딸 계춘씨와 결혼한 뒤 박승직상점에 들어왔다. 이후 광복을 맞은 뒤 동양맥주(현 OB맥주)를 인수해 본격적인 경영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창업주였던 박승직 씨는 장남의 회사에 ‘두산’이란 상호를 지어줬다. 당시 맥주사업에 나선 장남이 부대사업으로 진행한 수송업을 위해 세운 회사의 이름으로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올려 재화가 산같이 커져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맥주사업과 동시에 진행된 수송사업은 이후 박두병 초대 회장의 부인인 명계춘 여사가 맡게 된다.
박두병 초대 회장은 1960년대 들어 두산그룹의 사세를 본격적으로 확장해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당시 코카콜라를 제조하던 한양식품과 윤한공업사,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등을 설립했으며, 한국병유리(현 ㈜두산에 합병)를 인수하며 대기업집단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