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앞둔 지난 3월9일 명동 에잇세컨즈 매장. 2월24일 문을 연 이 매장은 쇼핑 나온 젊은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에잇세컨즈는 제일모직이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출시한 SPA(제조 유통 일괄화 의류) 브랜드로 가로수길과 명동 두 곳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인근에 있는 이랜드의 SPA ‘미쏘(MIXXO)’에도 쇼핑백을 든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에잇세컨즈와 미쏘 매장 반경 300m 이내에는 유니클로와 자라, H&M, 망고 등 글로벌 SPA 브랜드가 포진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에 안방을 내줬던 토종 SPA 브랜드들이 ‘패스트 패션 시장’에 본격적인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국내 최대 패션기업인 제일모직이 최근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SPA 브랜드를 출시한 데 이어 이랜드도 해외 브랜드들이 몰려있는 핵심 상권에 대형 매장을 열었다. 중견 브랜드들도 SPA 전환을 시도하거나 글로벌 시장 진출 채비를 갖추면서 시장 탈환에 나섰다.
SPA 브랜드란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 유통, 판매를 모두 한 회사가 일괄 진행하는 브랜드다. 빠르게 신상품을 회전시키기 때문에 ‘패스트 패션’이라고도 불린다. 장점은 싼 가격과 감각적인 디자인. 제조회사가 대량 생산 방식을 통해 제조 원가를 낮추고 유통 단계를 축소해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빠르게 유통시키기 때문이다. 빠르게 바뀌는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해 만든 상품을 저렴한 값에 내놓기 때문에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20~30대 멋쟁이들에게 특히 인기다.
명동 유니클로 매장
글로벌 공룡에 잠식당한 국내 패션 시장
최근 몇 년 새 한국 패션 시장은 해외 브랜드의 공세에 잠식돼 왔다. 글로벌 공룡들은 명동과 강남역 등 서울시내 주요 상권을 이미 접수한 데 이어 지방 주요 상권까지 전 방위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삼성패션연구소와 업계에 따르면 국내 SPA 시장은 2008년 5000억원 규모에서 지난해 1조9000억원 규모로 매년 평균 56%씩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중 유니클로가 4200억원의 매출을 올려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라(2700억원), H&M(750억원)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일본 유니클로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다. 2005년 한국에 진출해 올 2월 기준 총 68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2006년 300억원(회계연도 8월 기준)의 매출을 기록한 이후 6년 만에 12배에 가까운 매출 신장을 이뤄내는 등 연평균 60% 이상 매출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경기도 용인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교외형 점포도 선보인다. 2014년까지 1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 목표다. 스페인 브랜드 ‘자라’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롯데와 체결한 독점 입점 계약이 끝난 자라는 롯데 외에도 경방 타임스퀘어, 엔터식스 등 타사로 진출해 매장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저렴한 가격과 트렌디한 디자인을 무기로 한국 시장에 깊숙이 침투해 온 반면 해외 브랜드 도입에만 열을 올리던 한국 업체들은 가격 거품 논란에까지 휩싸이며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국내 옷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인식에 경기 침체로 소비 심리마저 얼어붙으면서 매출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패션업체 사장은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들은 글로벌 SPA 브랜드를 유치하지 못해 안달이다. SPA 브랜드에 1개 층 이상을 내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국내 브랜드들이 십여 개 이상 들어갈 자리를 SPA 브랜드 하나에 내주는 셈이다. 그만큼 한국 패션이 설 땅이 좁아졌다”고 털어놨다.
거품 뺀 국내 브랜드의 부상
글로벌 SPA 브랜드들의 공세에 몰린 국내 업체들은 올해 초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거품 낀 가격으로는 생존조차 어렵다는 위기감을 갖게 된 것이다. 유통단계를 줄여 가격 거품을 걷어내고 토종 SPA 브랜드로 변신을 선언했다.
첫 움직임은 세아상역에서 시작됐다. “안방을 통째로 내줬지만 아직 늦지 않다. 한국형 SPA로 시장을 지킨다.” 세아상역은 캐주얼 브랜드 메이폴(Maypole)을 토종 SPA로 변신시키겠다고 선언하며 위와 같은 계획을 밝혔다. 메이폴은 현재 국내 시장에서 판매중인 글로벌 SPA 브랜드 제품과 비슷하거나 낮은 수준으로 가격을 내려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글로벌 패션 공룡들에 대항해 나가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세아상역 관계자는 “일시적 가격 할인이 아닌 브랜드 가격 자체를 최대 50% 인하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소비자가격을 지속적으로 낮추고 품질과 디자인은 높여 경쟁력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집업 후드티는 6만9800원에서 3만9900원으로, 크루넥 티셔츠는 3만9800원에서 1만9900원으로, 솔리드 셔츠는 5만9800원에서 2만9900원으로 각각 인하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인수한 캐주얼 의류 브랜드 톰보이도 봄 신상품부터 기존 대비 가격을 15~20% 내렸다. 톰보이 코트는 34만9000원에서 24만9000원, 점퍼는 29만9000원에서 18만9000원, 블라우스는 13만9000원에서 10만9000원으로 각각 인하해 소비자들에게 선보였다.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는 토종 SPA 브랜드도 있다. 에이다임의 ‘스파이시칼라’는 팝 컬처를 콘셉트로 지난해 2월 론칭한 한국 토종 브랜드.
지난해 싱가포르 주롱포인트몰에 입점한 데 이어 올 4월에는 말레이시아 고급 백화점, 하반기에는 중국 시장에도 선을 보인다.
대기업도 SPA 시장 출사표
국내 최대 패션기업 제일모직도 SPA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제일모직이 선보인 에잇세컨즈는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지난 3년간 공을 들인 야심작. 이 부사장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론칭을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출시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어 왔다. 에잇세컨즈는 자라보다 가격을 30% 낮게 책정했고, 유니클로보다는 훨씬 트렌디한 상품으로 구성해 차별화했다. 20대와 30대를 주 소비층으로 남성복과 여성복, 데님, 라운지웨어(집에서 쉴 때 입는 옷), 액세서리 등 5가지 제품을 선보였다. 가격대는 △여성 재킷 7만9900∼14만9000원, 블라우스 1만9900∼6만9000원 △남성 재킷 7만9900∼19만9000원, 바지 2만9900∼7만9900원 △라운지웨어 7만900~4만9900원 △가방 1만9900∼17만9000원 등이다. 에잇세컨즈는 올해 국내 매장 10곳에서 6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랜드는 미쏘 명동점 오픈을 시작으로 SPA 사업에 가속도를 낸다. 명동점은 한국 여성 체형에 맞는 디자인과 가격 경쟁력으로 차별화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직장 여성과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전략 상품을 대폭 늘렸다. 가격은 트렌치코트·재킷·야상점퍼가 4만9000~6만9000원, 블라우스·셔츠·카디건·바지 2만9000~3만9900원, 플랫슈즈 등 잡화류는 1만9000~2만9000원으로 일반 상품보다 30% 이상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외형도 키운다. 19호점인 명동에 이어 1일에는 NC백화점 부산대점에 20호점을 여는 등 올 한 해에만 20개 매장을 추가로 출점한다. 이를 통해 미쏘를 연매출 1500억원의 브랜드로 만들 계획이다. 유통업체도 SPA 사업에 눈길을 주고 있다. 이마트는 최근 자사 SPA브랜드 ‘데이즈(Daiz)’를 통해 봄 신상품을 출시했다. 남녀 피케 티셔츠를 1만1900원에, 라운드넥 티셔츠를 9900원에 판매한다. 데이즈는 이마트의 PL(Private Label·자체상표) 상품으로 출발한 뒤 2010년 SPA로 전환해서 지난해 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마트는 2015년까지 데이즈 연매출을 4000억원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기로에 선 한국 패션
전문가들은 한국의 패션 산업이 기로에 서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유니클로, 자라, H&M 등 한국 시장에 진출한 기존 브랜드와도 본격적인 경쟁을 벌여야 하는 데다 올해 글로벌 SPA 브랜드들의 2차 공습이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자라를 보유한 스페인 인디텍스그룹의 ‘오이쇼’와 미국 유명 의류업체인 아베크롬비&피치의 ‘홀리스터’가 한국 진출을 확정한 데 이어 스페인 ‘코르테피엘’과 미국 ‘아메리칸이글’ 등도 올해 한국 시장의 문을 두드린다. 특히 아베크롬비&피치는 홀리스터뿐 아니라 ‘아베크롬비 앤 피치’와 ‘아베크롬비 키즈’ 등도 들여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영국 대표 SPA 브랜드인 ‘톱숍’도 올 하반기 한국에 진출할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세계적 톱모델인 케이트 모스가 론칭한 이 브랜드는 독특하고 신선한 디자인으로 젊은 층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브랜드들이 한국에 진출하면 다시 한 번 국내 패션 지형을 뒤흔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은 이미 한국에서도 온라인 쇼핑 등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인지도를 높여온 인기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국내 패션업계는 잇따르는 해외 SPA 브랜드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가격과 디자인, 제작비용 등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소재와 디자이너, 제조시설이 한데 몰려 있는 동대문을 업계가 다시 주목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특히 디자인에 한류 바람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글로벌 시장 공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업계는 판단하고 있다. 박철규 제일모직 상무는 “에잇세컨즈의 경우 글로벌 SPA브랜드보다 물량이 적기 때문에 제작 단가를 낮추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초기에는 투자 개념으로 생각해 제품 마진을 대폭 낮춰 운영하는 한편 한국의 창의성을 발휘한 디자인으로 차별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SPA 시장은 2010년을 전후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2015년에는 3조~4조원대로 커질 것으로 추정된다. 패션업체들에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황금 시장인 셈이다. 메기를 넣은 논의 미꾸라지들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더 많이 먹고 운동하면서 더 통통하게 살찐다는 ‘메기론’처럼 국내 브랜드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퀀텀점프(Quantum Jump·대도약)’를 이뤄낼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