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에게 문제가 닥쳤다. 트라팔가에서 넬슨 제독의 함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해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나폴레옹이 영국의 통상지배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해상 침투를 준비한 것이다.
1805년 당시 주로 쓰이던 전술은 양측이 일렬로 정렬한 채 서로 집중포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넬슨 제독은 수적 열세를 극복할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국 함대를 2열로 정렬시킨 후 프랑스·스페인 함대 좌우측을 지나가게 하면서 측면을 공격했다. 선두에 선 영국 함대의 위험은 컸지만 넬슨 제독은 영국 해군보다 덜 훈련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포격수는 높은 파도로 인해 조준력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또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결집력이 약하기 때문에 경험 많은 영국 해군 지휘관과 포격수의 상대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전체 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2척을 잃었지만 영국군은 한 척도 잃지 않았다.
호레이쇼 넬슨 제독
넬슨 제독의 승리는 좋은 전략의 고전적인 예다. 언제나 그렇듯이 뒤돌아보면 너무나도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전략이었다. 넬슨 제독의 전략에는 행렬, 삼각방정식, 빈칸 채우기 등 경영전략 도구가 전혀 없다. 대신 유능한 리더는 노력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슈를 한두 가지 확인한 후 여기에 행동과 자원을 집중했다. 좋은 전략은 우리들에게 목표나 비전을 향해 앞으로 돌진하는 것 이상을 하도록 한다. 즉 좋은 전략은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조직의 리더들은 많은 경우 이렇다 할 전략이 없음에도 전략이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나쁜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나쁜 전략은 선택과 집중의 힘을 무시하고 상충되는 요구사항과 이익을 포함하려 한다. 미식축구 쿼터백이 그의 팀원들에게 말하는 유일한 충고가 “승리하자”인 경우와 같이 나쁜 전략은 광범위한 목표, 야망, 비전, 가치 등의 언어를 포괄함으로써 리더십의 실패를 감춘다. 물론 이 요소들은 각각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전략을 대체할 수 없다.
나는 이번 글을 통해 나쁜 전략의 특징을 소개하고 이것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고 실수하지 말기 바란다. 널리 퍼져있는 것만큼 부지불식간에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목표와 슬로건으로 무장되어 있는 정부는 문제 해결능력을 갈수록 잃어버리고 있다. 기업 이사회도 바람에 불과한 전략 계획을 승인한다. 미국 교육 시스템은 목표와 기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성적 부진에 대한 원인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는 뒤쳐진다.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들이 리더에게 더 많이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카리스마와 비전을 넘어선 좋은 전략을 요구해야 한다.
나쁜 전략의 특징들
나는 지난 2007년 워싱턴D.C.에서 열린 국가안보 전략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나쁜 전략’이라는 용어를 발표했다. 세미나에서 내 역할은 사업적 그리고 기업전략적 관점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나에게 어느 정도 심각한 설명을 기대했을 것이다. 또 비즈니스 전략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메커니즘에 대해 기대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많은 비즈니스가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과 함께 일을 한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나쁜 전략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이 세미나가 열린 그 해부터 지금까지 나는 임원들과 함께 ‘나쁜 전략’의 개념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쁜 전략의 핵심 특징을 다음 네 가지로 요약했다. ①도전 회피 ②목표와 전략 구분 실패 ③나쁜 전략적 목표 설정 ④무의미한 추상화 등이다.
도전에 직면하지 않기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농기계 맥코믹
전략이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안이다. 장애물을 뛰어넘는 접근 방식, 즉 도전에 대한 대응이다. 만일 도전이 정의되어 있지 않다면 전략의 질을 평가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전략을 평가할 수 없다면 당신은 나쁜 전략을 거부할 수 없거나 좋은 전략을 향상시킬 수 없다.
인터내셔널 하베스터(International Harvester)는 나쁜 전략의 첫 번째 특징을 아주 어렵게 알게 되었다. 이 회사의 전략&재무 기획가들은 지난 1979년 7월 <기업전략계획: 인터내셔널 하베스터>라는 두꺼운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것은 각 부서가 만들어 놓은 다섯 가지 전략기획서를 하나로 합쳐놓은 것이었다.
이 전략계획은 구성이 탄탄했고 내용이 상세했다. 예를 들어 이 전략보고서에는 과거 이 회사의 기초가 되었던 맥코믹(McCormick) 수확기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하베스터의 핵심 사업인 농기계를 살펴보며 각 부문에 대한 정보와 시사점을 담았다. 전체적인 내용은 딜러와 유통업자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제조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농기계 시장 점유율도 16%에서 20%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포괄적 전략이다. 다시 말해 회사의 각 시장 점유율을 증가시키고, 각 사업별 비용을 줄이고, 이에 따라 매출과 수익을 향상시키는 전략이다. 과거와 미래 수익 전망치를 보여주는 요약 그래프는 거의 완벽한 하키 스틱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매출 하락세가 즉시 회복될 것 같았다.
하베스터를 인수한 테네코의 내비스타. 오늘날 중대형 트럭과 엔진의 선두 메이커가 됐다.
이 전략의 문제점은 하베스터의 비효율적인 생산 설비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농기계 사업분야에서 말이다. 또 하베스터가 미국 산업계에서 최악의 노사관계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간과됐다.
그 결과 이 회사의 수익률은 한동안 경쟁업체의 5분의 1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하베스터의 또 다른 문제는 비효율적인 근무 조직이었다. 이 문제는 새로운 기계에 투자하거나 매니저들에게 시장 점유율을 높이라고 압박을 가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하베스터는 행정 인력을 감축함으로써 1~2년 동안 이익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6개월 동안 끔찍한 파업으로 인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베스터는 농기계 부문을 포함한 여러 사업을 테네코(Tenneco)에 매각했다. 내비스타(Navistar)로 다시 명명된 트럭 부문의 경우 오늘날 중대형 트럭과 엔진의 선두 메이커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만일 당신이 장애물을 확인하고 분석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전략을 가질 수 없다. 대신 당신은 고무줄 같은 목표나 예산 혹은 희망사항만 가지게 될 뿐이다.
목표를 전략으로 착각하기
2년 전 채드 로건(가명)이라는 CEO가 내게 ‘전략적 사고’를 주제로 그의 그래픽아트 회사의 경영진과 함께 일해 볼 것을 요청했다. 로건은 그의 전반적인 목표가 ‘20/20 계획’이고 이것은 매우 간단하다고 설명했다. 풀이하자면 매출이 매년 20% 증가하고 이익은 최소 20% 증가한다는 목표였다.
나는 로건에게 “20/20 계획이 매우 공격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이에 로건은 “이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식축구 선수로 내가 배웠던 것은 승리하기 위해 힘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건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래서 20/20은 무리한 목표일 수 있지만 승리의 비밀은 목표를 높여 잡는 것. 우리는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다시 설명했다.
“채드. 어떤 회사가 당신이 꿈꾸는 그런 획기적인 점프를 이룰 때면 대개 그동안 쌓아올리던 핵심 역량이 있거나 업계에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변화가 있다. 당신 회사에선 어떤 이유에서 그럴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자 로건은 인상을 찌푸리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치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듯이 짜증나 보였다. 그는 서류가방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밑줄 쳐진 곳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는 “이 부분이 바로 잭 웰치가 말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달함으로써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실제로 할 수 있게 된다.”(로건이 말한 웰치의 발언은 물론 매우 중요한 문구다. 맞다. 웰치는 다소 무리한 목표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러나 웰치는 “만일 당신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경쟁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간다’는 표현은 내 머리 속에서 세계 1차 대전 중인 1915~17년에 있었던 ‘그레이트 푸시(Great Push)’사건을 연상시켰다. 이 사건은 한 세대의 유럽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동기를 유발하는 연사들이 미국보다 유럽 경영학 강의의 단골손님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한 군대는 동기가 부족해서 고통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능한 전략적 리더십이 부족해서 고통받았다. 리더는 ‘마지막 한 번의 푸시’를 요청할 수 있을지라도 리더의 일은 그 이상이다. 리더의 책무는, 즉 전략가의 책무는 푸시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조건을 만들고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략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전략적 목표
나쁜 전략의 또 다른 특징은 모호한 목표다. 이 문제가 드러나는 방식은 달성해야 할 목표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다. 전략인지 목표인지 잘못 이름 붙여진 채 길게 할 일을 늘어놓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해야 할 일을 정리한 리스트일 뿐이다. 이런 리스트는 종종 기획회의에서 더 힘을 얻는다. 많은 참석자들이 달성하고 싶은 것들을 추가로 나열하게 되기 때문이다. 회의는 몇 가지 중요 아이템에 집중하지 않고 하루 종일 온갖 전략 계획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곧 회의 참가자들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이 다름 아닌 계획의 나열임을 깨닫게 된다. 그럼 이를 ‘장기’ 계획이라고 다시 이름 붙인다. 이는 계획들 중 아무 것도 지금 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최근 나는 미국 북서부 지역의 조그만 도시의 시장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기획위원회의 전략적 계획은 47개의 전략과 178개의 행동 계획을 담고 있었다. 행동 계획 중 122번은 ‘전략 계획을 만들라’였다.
두 번째 나쁜 전략 유형은 목표로 하는 상황에 대한 단순한 재선언이다. 여기에는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이 없다. 리더는 핵심 문제를 확인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전반적인 대안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뒤이은 전략 목표가 원래 문제만큼 달성하기 어렵다면 그 전략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반대로 좋은 전략은 한두 가지 핵심 목표에 에너지와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효과를 낸다. 이 한두 가지 목표는 달성될 경우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또한 전략의 핵심 문제와 행동 사이를 이어준다. 즉 바람과 단기적 목표 사이를 이어준다. 따라서 좋은 전략이 설정하는 목표는 현재 주어진 자원으로 달성될 가능성이 높다.
의미 없는 추상화
3D그래픽 칩의 선두주자 엔비디아의 제품 / 본사
2류 전략 혹은 나쁜 전략의 마지막 특징은 생각의 부재를 감추기 위해 고안된 피상적인 추상화다. 이것은 명백한 것을 여러 캐치프레이즈에 결합시켜 마치 전문지식처럼 꾸미는 것이다. 대형 소매은행의 내부 전략 메모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우리의 기본 전략은 소비자 중심적 매개의 하나다.”
여기서 매개란 말은 회사가 적립금을 받고 돈을 대출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자 중심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은행이 더 나은 조건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경쟁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은행의 메모엔 이러한 차별성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소비자 중심적 매개’라는 표현은 무의미한 추상화일 뿐이다. 이런 추상화 표현을 없앤다면 은행의 기본 전략은 그냥 은행이라는 뜻이다.
나쁜 전략은 왜 그렇게 많은가?
나쁜 전략의 뿌리는 많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딱 두 가지만 말하겠다. 이는 선택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과 빈칸을 ‘비전, 미션, 가치, 전략’ 등 공허한 말로 채워 넣는 식의 계획이다.
선택 불능
전략은 집중을 요구하고, 이에 따라 선택이 동반된다. 그리고 선택이란 다른 것은 후순위로 미루고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이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을 땐 전략이 취약해진다. 나는 지난 1992년 디지털 이큅먼트 코퍼레이션(DEC: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사의 임원들과 전략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1960~70년대 혁신적 미니컴퓨터의 선두였던 DEC는 새로운 제품인 32비트 PC의 등장으로 여러 해 동안 주도권을 뺏기고 있었다. 극적인 변화가 없는 이상 이 회사가 오래 생존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 임원회의에 세 명의 임원만 참가했다고 가정하자. 첫 번째 임원인 ‘알렉’은 DEC가 언제나 컴퓨터 회사였기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더 좋은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것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임원 ‘비버리’는 DEC가 쌓아올려야 할 유일한 차별적 자원은 소비자 관계라고 느꼈다. 따라서 비버리는 알렉의 전략을 무시하고 소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 해결식’ 전략을 주장했다. 세 번째 임원 ‘크레그’는 컴퓨터 산업의 핵심은 반도체 기술이고 회사는 자원을 더 나은 반도체 ‘칩’ 설계와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선택이 필요했다. 칩과 문제해결식 전략은 회사의 극적인 변화를 대변했다. 그리고 각 전략은 완전히 새로운 기술과 근로환경을 요구했다. 대개의 경우 현상유지적인 알렉의 전략이 실패할 것 같지 않다면 다른 위험스런 대안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칩과 문제해결식 전략 두 가지를 동시에 실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 사이에 공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회사의 핵심적인 대변화를 동시에 두 가지씩이나 진행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똑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 명의 임원이 상반되는 전략을 주장하는 바람에 회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DEC의 최고경영자인 켄 올센은 회의 참가자들에게 합의에 도달해 보라고 주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사실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참가자 대다수가 현상유지 전략보다는 문제해결식 전략을 선호했고 칩보다는 현상유지를, 또 문제해결식보다는 칩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셋 중 어떤 것이 선택되더라도 대다수는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딜레마는 DEC의 문제만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이 같은 역설이 실제로 존재 가능함을 처음으로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우(Kenneth Arrow)의 ‘콩도르세의 역설(Condorcet’s paradox)’은 그 어떤 투표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에 따라 회의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DEC는 고품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데이터 처리의 리더로 우뚝 서겠습니다.” 이같은 무의미한 말은 물론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합의를 강요받은 개인이 도달한 정치적 결과일 뿐이다.
켄 올센은 1992년 6월 이 회사 반도체 부문을 이끌던 로버트 팔머로 교체됐다. 팔머는 칩이 바로 최종 전략이라고 선언했다. 셋 중 한 가지 전략이 드디어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려 너무 늦었다. 팔머는 회사의 손실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었지만 회사를 엄습하는 강력한 PC의 물결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1998년 DEC는 컴팩(Compaq)에 인수됐고 3년 뒤 다시 HP에 인수됐다.
괄호 채워 넣기 식 전략
잭 웰치가 말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달성하기’는 달변가의 연설, 책, 달력, 메모, 웹사이트 등 수 많은 곳에서 인용된다. 이 긍정적인 사고의 마법은 카리스마 리더십에 대한 아이디어와 공유된 비전의 힘을 북돋아주었고 일종의 공식처럼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이야기 전개는 다음과 같다. ①비전을 가진 혁신적인 리더가 ②사람들에게 조직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도록 이끌며 ③그들에게 비전을 달성하도록 힘을 실어준다.
2000년대 초까지 비전 주도의 리더십과 전략의 결합은 전략기획에서 빈칸 채우기 식 시스템을 창출했다.(‘비전 미션 전략’을 인터넷 검색 엔진에서 검색해보면 사용되는 수많은 예가 나온다) 빈칸은 대개 다음의 말로 채워진다.
【 비전 】 학교·회사·국가에서 당신의 비전을 세우는 것이 미래에 세우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현재 인기 있는 비전은 최고의 비전이거나 주도하는 비전 혹은 가장 잘 잘려진 비전인 경우가 많다.
【 미션 】 학교·회사·국가의 목적을 위해 분명하면서도 정치적인 말이 쓰인다. 혁신, 인류 진화, 지속가능한 해결책 등이 미션을 의미하기 위해 흔히 쓰이는 예들이다.
【 가치 】 회사의 가치를 잘 묘사하는 표현이 쓰임. 이 가치들이 논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키워드로는 ‘정직’, ‘존중’, ‘우수성’ 등이 있다.
【 전략 】 기대·목표로 대변되지만 이것들을 전략으로 부른다. 예를 들어 ‘우리 주주의 가치를 창출하고 우리 고객의 성장을 일으키는 사업 포트폴리오에 투자하기.’
이같은 전략기획은 회사, 학교 이사회, 대학 총장, 정부 기관 등에서 앞다퉈 활용된다. 당신이 관련 서류를 훑어본다면 마치 결정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는 듯한 그런 말을 쉽게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전략이 낳는 심각한 문제는 실제로 효과적인 전략을 고안하고 실행하기를 원하는 누군가가 이같은 공허한 수사와 나쁜 예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좋은 전략의 요건
나는 지금까지 독자 여러분이 좋은 전략과 나쁜 전략 사이의 확연한 차이점을 충분히 이해했기를 바란다. 이제 좋은 전략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팁을 제시하며 마무리하겠다. 이는 좋은 전략의 기본 골격이다.
1. 진단 문제점으로 드러난 것에 대한 설명. 현 상황에서 중요한 몇 가지 양상을 확인함으로써 복잡한 것을 단순화해준다.
2. 가이드라인 진단에서 확인된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된 총괄적 대응 방식.
3. 논리적 행동 가이드라인을 달성하기 위해 조율된 구체적 행동지침.
초기 창업단계에선 취약했지만 지금은 3D 그래픽 칩의 선두 주자로 성장한 엔비디아(Nvidia’s)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엔비디아의 첫 번째 제품인 3D 영상그래픽보드는 상업적으로 실패작이었다. 1995년 당시 경쟁업체인 3Dfx 인터액티브(Interactive)사가 빠르게 성장하는 3D 그래픽칩 시장을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컴퓨터 업계 거인인 인텔(Intel)이 자체 3D 그래픽 칩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진단 결과. “우리는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CEO 젠슨황의 전략은 신규 3D 그래픽 칩을 현재 업계 기준인 18개월마다 출시하는 대신 6개월마다 출시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가이드라인은 ‘업계 수준보다 세 배 더 빠르게 더 좋은 칩을 출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빠른 출시 주기를 달성하기 위해 이 회사는 몇 가지 논리적 행동을 강조했다. 우선 3개의 개발팀을 만들었다. 이 팀들의 업무는 다소 중복되었지만 칩 제조와 소프트웨어 드라이버 개발을 신속히 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뮬레이션 장비에 투자했다. 곧 이 회사는 보드업계에서 드라이버 개발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이 전략은 놀랄 만큼 효과적이었다. 인텔은 1998년 3D 칩을 도입했지만 신제품 출시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서 1년 뒤 3D 그래픽 칩 사업을 접었다. 2000년 3Dfx 채권자들은 엔비디아와 힘들게 경쟁하는 이 회사의 파산을 이끌었다. <포브스>는 지난 2007년 엔비디아를 ‘올해의 기업’으로 선정했다.
전략을 야망, 리더십, 비전 혹은 기획과 동일시하는 많은 견해가 있지만 이런 것들은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전략은 이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행동이다. 전략의 핵심은 언제나 같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을 파악하고 뚫고 나갈 방안을 설계한 뒤 이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집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