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현지시간) 저녁 베를린 시내. 최근 개막한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인 ‘IFA 2022’를 찾은 관람객들로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큰 도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가 매우 어두웠다. 독일 정부가 주요 시내 가로등 점등을 최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에너지 정책 전환에 더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장기화되며 가스비와 전기료가 폭발적으로 오른 게 원인이다.
거리 상점들도 예년 같으면 켜두었을 간판의 불을 꺼둔 곳들이 많았다. 독일의 현재 전기료는 불과 1년 전과 비교할 때 10배 가까이 오른 상황이다. 윤현철 코트라 독일 함부르크 관장은 “저녁 늦게 퇴근할 때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로등이 꺼져있다”며 “특히 주택 지역 주변은 매우 어둡기 때문에 치안과 안전이 우려될 때도 많다”고 말했다.
독일 시민들의 더 큰 걱정은 다가오는 겨울이다. 전기요금 인상이 다음 달 한 차례 더 예고되어 있고, 난방에 들어가는 가스비도 계속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난 현지 기업 관계자는 “유럽 소비자들의 에너지 비용 공포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이라며 “에너지 전환을 지나치게 서두른 것은 아닌지 확인할 ‘진실의 시간’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독일 베를린 중심부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그로스베렌스트라베 지역의 이벤트 공간 ‘캔(CAN)’을 찾았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임을 감안해도 해당 공간을 제외하고는 거리에서 거의 모든 건물들의 불이 꺼져 있었다. 이곳에서 LG전자는 자사 신제품을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신청자를 대상으로 칵테일 파티를 운영하고 있었다. 파티에 참석한 베르너 씨는 불 꺼진 독일 거리에 대해 묻자 “최근에는 독일의 유서 깊은 할로겐 가로등을 전기 소모가 적은 LED 조명으로 바꾸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며 “백년이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설비가 이렇게 전기요금으로 인해 무너진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유럽 전역에서 불어 닥치고 있는 ‘에너지 비용과 전쟁’ 분위기는 실제 IFA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최근 엄격해진 전자제품 에너지등급 기준을 도입했다. 이를 의식한 글로벌 제조사들은 저마다 에너지 소비 효율을 극대화한 제품들을 앞세워 전시에 나섰다. 보쉬, 지멘스 등 유럽 대표 기업들은 최고 효율 기준인 A등급 제품임을 상징하는 ‘A’를 전시관 전면에 큰 글씨로 내세웠다. 밀레는 올해 전시한 전 제품에 각각 효율 등급을 안내하는 태그를 별도로 붙였다. 밀레의 현지 전시 담당자는 제품을 소개하며 “올해 ‘IFA’의 A는 A등급의 A를 의미하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LG전자 ‘2도어 상냉장 하냉동 냉장고’ 신제품 인테리어컷
▶에너지 등급 기준 강화 추세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에너지에 민감한 유럽 소비자가 전기료와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지난해 3월부터 더 엄격해진 냉장고 에너지등급 기준을 도입했다. 제품 등급도 A+++, A++, A+ 등으로 표기하는 기존 방식에서 소비자들이 보다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A~G로 바꿨다.
현지 관람객들은 에너지 비용이 실제로 가장 큰 최근 고민이라고 입을 모았다. 보쉬 전시관에서 신제품을 구경하던 시모나 씨는 “이탈리아도 전기요금이 최근에 20%나 올랐다”라며 “독일만큼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에너지난은 유럽 전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하루에 한 번 세탁기를 돌리는데, 야간에 사용하면 전기요금을 할인해줘서 밤에만 빨래를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보쉬관에서 제품을 소개하던 직원은 “이번에 나온 세탁기 신제품은 기존 A등급 제품보다 전력 소비량이 10% 줄어든 대신 가격은 역대 나온 제품 중 가장 비싸다”며 “그럼에도 이 제품에 관심을 가지는 관람자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들 기업들은 이런 전기료 전쟁이 유럽 지역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장에서 만난 한 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유럽뿐 아니라 국내 시장에서도 전기료가 제품 선택에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면서 “고효율 전기 제품 개발 노력을 더욱 가속하고 보급도 넓힐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에너지 관련 소비자 인식이 높은 유럽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에너지 효율 1위’ 가전업체가 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번 IFA에서 삼성전자는 유럽의 에너지 소비효율 최고 등급(A등급)보다 에너지 사용량을 10% 더 줄일 수 있는 제품들을 소개했다. 스마트싱스의 ‘AI 에너지 모드’(국내명 ‘AI 절약 모드’)를 사용하면 에너지 사용량을 여기서 더 절감할 수 있다. 필수 가전인 세탁기는 최대 70%까지 에너지 절감이 가능하다. 찬물 세탁과 ‘에코 버블’ 모드를 작동하면서 기존 세탁시간보다 좀 더 길게 세탁하는 방식이다. 냉장고의 경우 올 연말까지 AI 절약 모드 활용과 온도 조절 등을 통해 최대 30%까지 에너지 사용량을 줄일 계획이다.
이렇게 줄어드는 에너지 사용량을 감안해 연간 전기요금 지출액으로 환산하면 신모델 냉장고(상냉장·하냉동 냉장고)의 경우 연간 1만7828원이다. AI 절약 모드에서 최대 절약 옵션까지 사용하면 최대 1만2480원으로 줄어든다는 계산이다. 드럼세탁기(비스포크 AI 모델 11㎏)는 한국 전기 요금 기준으로 1만3610원, AI 절약 모드 추가 사용 시 3673원으로 대폭 절감된다. 국내에서 삼성전자가 출시한 제품 중 에너지 소비 효율 1등급을 획득한 제품 비중은 냉장고 78%, 세탁기 68%, 건조기 100% 수준이다.
▶삼성, 소프트웨어 통해 에너지 절감
삼성전자는 지난 2월 선보인 ‘스마트싱스 홈 라이프’를 바탕으로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통해 에너지 절감률을 더 확대하겠다는 목표도 공개했다. 현재 스마트싱스 에너지 서비스로 추가 절감할 수 있는 에너지 사용량은 냉장고 10%, 세탁기 60%, 건조기 35%, 에어컨 20% 등이다.
이 중 냉장고는 내년 25%까지 절감 폭을 늘릴 계획이다. 에너지 효율 증가의 핵심 전략인 ‘연결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향후 유럽에서 출시할 신제품에 와이파이(Wi-Fi) 기능을 적용해 내년 말까지 와이파이 탑재 모델 비중을 100%(현재 26%)로 확대할 계획이다. 와이파이 기능이 없는 모델은 단종된다. 삼성전자에 현재 스마트싱스와 연결된 글로벌 가전제품 수는 975만 대로 이달 말 1000만 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IFA 전시장에서 HCA(홈 커넥티비티 얼라이언스) 시연회를 열고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독일 그룬딕 등 타사 제품을 스마트싱스로 제어하는 모습을 직접 선보였다. 삼성전자와 LG전자, GE, 하이얼 등 글로벌 13개 사가 참여한 HCA는 소비자가 하나의 스마트홈 플랫폼으로 가전제품을 모두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연결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에너지 효율 등급 ‘A’를 전면에 내세운 보쉬 전시장 입구. <사진 오찬종 기자>
삼성전자는 스마트싱스 기반으로 실질 에너지 사용을 ‘제로(0)’로 만드는 ‘제로 에너지 홈’ 프로젝트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태양광 패널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고 가정용 배터리를 구축, 이를 저장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싱스 기반의 유기적 연결성을 활용해 국내외에서 ‘제로 에너지 홈’ 프로젝트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에너지를 각 가정에서 직접 생산하고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지속 가능한 주거’를 만들기 위해 태양광 패널 전문업체 한화큐셀과 가정용 태양광 인버터 시장의 선도 브랜드인 SMA와 협력 중이다. 협업을 통해 영국 친환경 주택 개발업체인 ‘에토피아(Etopia)그룹’이 공급하는 6000세대에 넷제로 홈 구축에 필요한 홈 IoT 솔루션과 EHS, 가전제품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아울러 스웨덴 친환경 주택 개발업체인 ‘S 프로퍼티스 그룹(S. Properties Group)’이 공급하는 2000세대 규모의 스마트 빌리지 구축에 필요한 홈 IoT 솔루션과 가전제품을 글로벌 홈네트워크 업체인 ABB와 협업해 공급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국내에서는 한국 최초로 구축되는 스마트시티인 ‘부산 에코델타시티(EDC)’에 15종의 가전제품을 공급해 입주자들이 스마트싱스 앱을 통해 전력 소비량 모니터링 등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
박찬우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부사장은 “스마트싱스에 연결되는 가전제품이 많아질수록 향후 글로벌 에너지 절감을 위한 유용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LG전자도 에너지 효율을 높인 2도어 상냉장 하냉동 냉장고를 출시하면서 에너지와의 전쟁에 동참했다. LG전자에 따르면 신제품은 유럽 냉장고 에너지등급 가운데 최고인 A등급이다. 특히 유럽 기준 연간 소비 전력량이 LG전자의 기존 A등급 냉장고와 비교해도 10% 줄어든 99㎾h/y(킬로와트시) 수준이다. 이를 국내 기준 전기료로 환산하면 연간 약 2만5000원에 불과하다.
▶LG, 핵심부품 구조 개선
신제품은 LG전자 냉장고의 차별화된 핵심부품인 ‘인버터 리니어 컴프레서’를 탑재했다. 모터가 회전 대신 직선운동을 하는 리니어 컴프레서는 동력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손실이 적어 일반 컴프레서보다 에너지 효율이 좋다. LG전자는 신제품의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열교환기 등 핵심부품의 구조를 개선하고, 냉기가 더 골고루 전달될 수 있도록 유로(流路)도 재설계했다. 신제품은 슬림한 디자인을 갖춘 384ℓ 용량의 상냉장 하냉동 냉장고다. 공간 효율을 중시하는 유럽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면서 여러 칸에 다양한 식재료를 효율적으로 나눠 보관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 제품은 차별화된 냉장 성능을 갖췄다. ‘24시간 자동정온’은 냉장실 내부의 온도변화를 ±0.5℃ 이내로 유지시켜 냉장 칸에 있는 음식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한다. 또 ‘도어쿨링+’ 기능은 냉장 칸 맨 위쪽에서 나오는 강력한 냉기로 냉장고 도어까지 고르게 냉각시킨다. 와인을 최대 5병 보관할 수 있는 냉장 칸의 와인랙도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