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플레이션’이 본격화되고 있다. 자동차(car)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인 카플레이션은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에 따른 생산 차질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자동차 판매 가격이 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테슬라를 비롯한 수입차들은 가격을 꾸준히 인상하며 카플레이션에 대응하고 있다. 프로모션은 이제 옛말이 됐다. 국내 완성차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가격 인상에 특히 민감하다. 가격을 조금만 인상해도 많은 비판을 받는 만큼 그동안 연식변경 모델 출시 때는 인상 폭을 1% 내외로 최소화해왔다. 일부 옵션을 추가하면서 가격을 인상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신차 가격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소형보다는 이윤이 많이 남는 중대형 차량 중심의 판매 전략으로 영업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2021년 국내 평균 신차 판매 가격은 4420만원으로 2020년(3949만원) 대비 471만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의 지난해 승용 모델 평균 가격은 4759만원으로 전년 대비 13.8% 올랐고 기아의 지난해 레저용 차량(RV) 가격도 4130만원으로 전년 대비 13.9% 상승했다.
국내 차량의 대당 평균 가격도 4416만원으로 처음으로 4000만원 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같은 차량 가격 상승 현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당분간, 적어도 내년까지는 연식변경 모델이나 신차 가격의 상승 폭은 과거와 달리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 구입하는 차가 가장 싸다.
▶팰리세이드 450만원 올랐다
지난해 말 출시된 싼타페 연식변경 모델은 판매 가격이 이전 모델 대비 최대 240만원, 약 6%가량 올랐다. 디젤 모델의 경우 240만원으로 약 7.7%나 상승했다. 디젤의 가격 상승 폭이 더 큰 이유는 강화되는 배출가스 기준에 맞춰 저감장치를 추가 장착한 탓이긴 하지만 업계는 오름세가 심상치 않다고 봤다. 과거에 연식변경 모델은 디자인이나 파워트레인 변화가 없는 만큼 가격 변화가 크지 않았다. 편의사양을 추가해도 가격은 10만~20만원가량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싼타페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제네시스 GV70 연식변경 모델 가격도 4791만원에서 4904만원으로 113만원 인상됐다.
올해 초 기아가 출시한 모하비의 경우 4869만~5694만원에서 4958만~5781만원으로 올랐고 현대차의 코나도 2.0 가솔린 기준 1962만~ 2648만원에서 2144만~2707만원으로 인상됐다. 평균적인 인상 폭은 100만원 이상이다. 기아가 5월 출시한 준대형 세단 K8 연식변경 모델의 가격은 트림에 따라 최대 60만원가량 올랐는데 최근 출시된 차량 중 가장 낮은 가격 상승률을 보였다. 대형 SUV의 절대 강자인 팰리세이드는 부분변경 모델을 출시하며 기존 대비 260만~450만원가량 인상했다.
수입차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 4월 메르세데스벤츠는 8년 만에 중형 세단 ‘더 뉴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 완전변경 모델을 선보이며 최저 가격을 6150만원으로 책정했다. 전 모델보다 600만원이나 높은 가격이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비롯해 다양한 편의 장치를 추가했지만 그래도 가격 상승 수준이 과거와는 다르다. 탄탄한 팬층으로 가격 상승에 있어 눈치 보지 않는 테슬라는 1년 새 수차례나 가격을 올렸다. 지난해 2월 모델3 스탠더드 트림 가격은 5479만원이었는데 6월 현재 7034만원이다. 1년 새 28%나 올린 셈이다. 모델Y, 모델S 등도 비슷하다.
2020년 하반기부터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일본 등 전 세계 각지에서 신차와 중고차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국가별 자동차 가격 상승률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영국 28.3%, 이탈리아 10.2%, 독일 8.6%, 프랑스 3.2% 등이다. 자동차 가격 상승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
지난해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로 인해 현대차 울산 1공장 휴업에 이어 아산공장까지 가동이 중단됐다.
▶차량용 반도체 부족… 2년 지속될 것
전 세계 자동차 가격이 빠르게 오른 가장 큰 이유는 자동차 생산 부족이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가격 압박이 심해졌다. 가장 큰 원인은 차량용 반도체 부족 때문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자동차 전자장비, 엔진 등을 제어하는 핵심 부품이다. 계기판에 내·외부 온도나 타이어 공기압이 표시되고,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공조장치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반도체 덕분이다. 과거에는 차량에 탑재되는 반도체 수가 적었지만 전기장치 부품(전장)이 늘어나면서 소요되는 반도체 수도 늘어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솔린 등 내연기관차 1대에는 200~300여 개, 하이브리드차에는 500~700개, 전기차에는 1000여 개 반도체가 탑재된다. 자율주행차는 더 많은 센서가 요구되는 만큼 2000여 개 반도체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19가 확산되던 2020년 초 완성차 업체들은 차량 판매가 감소될 것으로 보고 반도체 주문량을 줄였다. 반도체 제조사들은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줄이는 대신 가정·정보기술(IT) 기기를 비롯해 클라우드, 서버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 생산을 확대했다. 하지만 자동차 수요가 오히려 늘어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수급이 빠듯한 상황에서 지난해 화재·한파에 따른 정전 등으로 반도체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일까지 발생하자 완성차 업계가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공장 가동을 멈추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하이브리드차, 전기차 같은 인기 차종은 주문하면 1년 이후에나 받을 수 있는데, 이는 현재 차량용 반도체 리드 타임(주문 후 공급까지 걸리는 시간)과 일치한다”며 “단기간에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신차 출고가 12~18개월로 길어지자 이색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바로 출고가 가능한 전시 차의 경우 과거에는 찾는 사람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전시 차 판매 시 제공되던 프로모션도 없어졌다. 현대차 대리점 관계자는 “연식변경 모델이 나오면 전시 차 구매가 언제부터 가능한지 묻는 전화를 상당히 많이 받는다”며 “일반적으로 전시 한 달 뒤에 판매하는데 대기가 밀려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중고차 가격도 상상 이상이다. 특히 아이오닉5나 EV6, 쏘렌토 하이브리드 등 신차 출고 시 18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인기 차종의 경우 2만㎞ 이상 탄 모델도 신차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최근 국내 철강사들은 원재료 가격 상승을 반영해 철강 제품 가격 인상에 나섰다.
▶전쟁에 봉쇄에… 원자재 가격 상승
차량용 반도체 부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2월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자동차 부품 공급망에 불확실성이 가중되며 불을 끼얹었다. 전쟁 장기화에 따라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러시아산 네온(Ne)과 팔라듐(Pd) 공급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에서 제작하는 자동차 부품인 ‘와이어링 하네스’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공급 문제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 경제 제재에 따른 국제 유가 상승과 러시아 육상 운송 제한에 따른 물류비용 증가 등이 자동차를 포함한 제조업 전반의 인플레이션을 이끌고 있다.
차체에 들어가는 철광석 가격 급등도 불을 지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철강과 니켈 등 주요 원자잿값이 빠르게 치솟고 있다. 철강과 완성차 업계는 최근 강판 가격을 t당 15만원 인상하는 것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철광석 가격은 지난해 말 t당 120.19달러에서 최근 150달러로 25% 이상 올랐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은 자동차 가격에 그대로 반영된다.
여기에 주요 완성차 기업들은 수년 전부터 대당 이익률이 낮은 소형 세단이나 해치백 생산을 줄이고 수익성이 높은 SUV나 프리미엄 차종의 비중을 확대해가고 있다.
한국자동차연구원 이호중 연구전략본부 책임연구원은 산업동향 보고서를 통해 “특히 코로나19 이후 주요 완성차 기업들은 자동차 반도체 공급난에 맞서 수익성이 높은 차종을 보다 많이 생산해 판매 대수 감소에 따른 실적 하락을 상쇄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또한 2025년 발효 예정인 환경기준 ‘유로7’에 따라 대부분의 차종에서 파워트레인 전동화 등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제청정교통위원회(ICTC)는 지난 4월 디젤 트럭이 유로7 충족에 필요한 기술 비용이 최대 4700유로, 우리 돈으로 630만원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차량 가격 상승은 코로나19로 전 세계를 휩쓴 전동화 패러다임 전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배터리 가격 때문에 가뜩이나 전기차는 내연기관 차량 대비 값이 비싼데 최근 배터리 원자잿값이 급등하면서 전기차 가격 또한 급등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배터리 핵심 원자재로 꼽히는 니켈은 지난해 말 t당 2만9000달러에서 최근 3만3000달러로 상승했다. 코발트와 알루미늄 가격도 크게 올랐다. 러시아는 세계 3위 니켈 생산국인데 전쟁 이후 공급 불안으로 가격이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최근 “리튬 가격이 미친(insane) 수준까지 올랐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반도체 공급난 풀려야 안정
카플레이션의 가장 큰 원인인 수요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량용 반도체 공급이 원활히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차량용 반도체의 특수성 때문에 신규 업체의 시장 진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차량용 반도체는 첨단 기술이 탑재된 반도체라기보다 극한 환경에서 무리 없이 작동하는 제품이다. 이 같은 특수성 때문에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NXP와 인피니온, 르네사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일부 업체가 오랫동안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TSMC, 인피니온 등의 생산 업체들의 증설이 마무리되고 추가 생산이 시작되어야 제품 부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데 업계는 물량이 풀리는 시기를 적어도 내년으로 보고 있다. 일단 지금과 같은 출고 적체 현상이 적어도 1년가량은 더 이어진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