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랑 둘째 터울이 6년인데, 첫째가 어릴 땐 유아음악이나 영상을 보여주려고 관련 파일을 다운받거나 CD, DVD를 샀어요. 그런데 둘째를 키울 땐 넷플릭스나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대부분 해결되더군요. 한 달에 1만원 남짓으로 아이는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고, 엄마는 부담에서 홀가분해졌어요. 불과 5~6년이 지났을 뿐인데 육아환경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서울 목동에 사는 8년 차 전업주부 이소형 씨(36세, 가명)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트렌드와 서비스에 “요즘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고 답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온라인 주문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기본이에요. 여기에 전자기기나 침대 매트리스, 하다못해 과일, 커피, 맥주까지, 구독서비스를 통해 세심한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게 달라진 점이죠. 작정하면 아예 밖에 나가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이 가능해요. 격세지감이란 말이 왠지 세대 차이처럼 느껴지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격세지감 아닐까요.”
팬데믹 이후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자 구독경제(Subscription Economy)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구독경제는 소비자가 일정금액을 지불하고 원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주기적으로 제공받는 경제모델이다. 소유보다 경험을 중요시하고 자신이 가치를 둔 것에 지속적으로 지출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주 소비층으로 떠오르며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선 구매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고, 기업 입장에선 안정적인 매출 확보와 함께 이용자를 묶어두는 ‘록인(Lock-in)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심혜정 한국무역협회 신성장연구실 수석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전통적인 구독서비스는 최대한 많은 유통 채널을 이용해 제품을 많이 파는 데 집중했지만 구독경제 모델은 고객의 데이터를 수집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유통채널도 이에 맞게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심 수석은 “제조업자가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고객에게 접근할 수 있어 고객의 데이터를 확보해 관리하는 게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며 “데이터가 쌓일수록 고객에게 정교한 추천(Curation·큐레이션)이 가능해 판매자와 고객이 지속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글로벌 구독서비스는 고성장 중이다. 글로벌투자은행(IB)인 크레디트스위스(CS)에 따르면 전 세계 구독경제 시장 규모는 2015년 4200억달러(약 501조원)에서 지난해 5300억달러(약 632조원)로 몸집을 불렸다. 크레디트스위스는 2023년 전 세계 기업의 75%가 구독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국내 시장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시장 규모는 지난 2016년 25조9000억원에서 지난해 40조1000억원으로 54.8%나 증가했다. 정부가 올해 소상공인 온라인 판로지원 사업으로 구독경제를 거론한 배경이기도 하다. 손님 많은 터에 상권 들어서는 건 당연한 일. 이러한 시장상황에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저마다 차별화된 구독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쯤 되면 진검승부가 시작된 셈이다.
▶카카오·네이버도 구독서비스 강화
지난 3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국내 증시를 들썩이게 한 주인공은 ‘쿠팡’이었다. 뉴욕증시 상장에 성공한 쿠팡의 성장 비결은 ‘구독경제’였다. 쿠팡은 2900원만 내면 구매금액에 상관없이 무료 배송, 당일 배송, 새벽 배송 등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로켓와우클럽’이란 구독서비스로 국내 시장을 점령해나갔다. 물론 국내 온라인 시장의 강자는 네이버와 카카오다. 이들 두 기업도 구독경제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업계에선 “진정한 강자들이 나섰다”고 평가한다. 우선 네이버는 지난해 6월 선보인 구독서비스 ‘네이버플러스 멤버십’에 집중하고 있다. 월 4900원을 내면 제품 구매 시 금액의 최대 5%를 포인트로 적립해주는 구독서비스다. 이 외에 웹툰, 영화, 디지털 콘텐츠 체험팩 같은 서비스도 같이 제공하고 있다. 이 서비스는 지난해 말 기준 가입자 수 250만 명을 넘어서며 당초 목표였던 2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네이버는 올 3월 애널리스트데이에서 판매자 솔루션 강화, 다양한 구매 방식 지원, 멤버십 생태계 확대, 풀필먼트 강화, 글로벌 진출 등 커머스 부문 5대 성장 전략을 제시하기도 했다. 오는 7월 스마트 스토어 사업자가 보유한 상품을 활용해 정기 배송에 나서는 구독형 커머스를 비롯해 부동산·IT·해외주식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구독형 지식 플랫폼을 출시할 예정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네이버는 ID를 가진 고객이 4200만 명이나 된다”며 “구독경제의 가장 큰 축인 고객을 이미 확보한 가운데 전자상거래까지 섭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카오는 지난해 11월부터 카카오톡 채널로 렌털, 정기배송을 신청할 수 있는 상품구독서비스를 시작했다. 바디프랜드, 위니아에이드, 위닉스, 한샘 등 20여 곳에 달하는 업체가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올 1월에는 월 4900원에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이모티콘 플러스’와 사진·동영상·파일·링크 등 각 채팅방에 흩어져 있는 데이터를 한곳에 모아 보관하는 개인용 월정액(월 990원) 클라우드 서비스 ‘톡서랍 플러스’를 출시했다. 이모티콘 플러스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약 15만 개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최대 5개까지 마음에 드는 이모티콘을 내려 받을 수 있다. 톡서랍 플러스는 100기가바이트(GB)의 클라우드 저장 공간을 제공한다.
지난해 말 개발자 콘퍼런스 ‘if카카오2020’에선 카카오톡 채널을 활용해 콘텐츠부터 상품·서비스까지 모두 구독하도록 서비스를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콘텐츠와 상품을 두 갈래로 구독 모델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구독서비스에 나선 이유는 이미 갖추고 있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의 기술력으로 구독경제 시장에 빠르고 안정적으로 진출할 수 있고, 서비스가 안착되면 지속적인 수익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GS25에서 소비자가 더팝플러스 구독서비스 대상 상품인 ‘브레디크 순우유스틱빵’을 살펴보고 있다.
▶유통가 사로잡은 구독경제
국내 시장에서 구독경제가 가장 활발한 분야는 유통업계다. e커머스 관련 기업뿐만 아니라 백화점부터 편의점, 심지어 제품을 제조하는 식품기업에 이르기까지 안정적인 수익을 위한 정기구독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 우선 지난해 5월 강남점 우수고객을 대상으로 과일 구독서비스를 선보인 신세계백화점은 올 4월부터 서비스 지역을 본점까지 확대했다. 신세계의 과일 정기구독은 월 구독료 22만원으로 바이어가 직접 선정한 26만원 상당의 백화점 제철 과일을 매주 문 앞에서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10개월 만에 구독 신청 고객이 3배나 늘며 호응도가 높았다. 고객들의 구독 연장 비율도 높게 나타났다. 올 3월 기준 과일 정기 구독을 이용한 고객의 80%는 기존 고객인 것으로 집계됐다. 롯데백화점을 비롯해 마트, 슈퍼, 롭스, 하이마트, 홈쇼핑 등 롯데그룹 7개 유통계열사의 온라인몰을 하나로 합친 롯데온도 지난해 9월 ‘여섯시오븐’이란 빵 구독서비스를 내놨다. 딸기 식빵 등 오프라인 매장에서 인기를 끈 제품을 매주 1회씩 한 달에 4번 배달한다.
편의점 업계는 직접 방문해 수령하는 방식의 구독서비스로 고객에게 어필하고 있다. CU가 업계 최초로 내놓은 ‘캔맥주 구독 서비스’는 월 구독료 6900원만 내면 매달 캔맥주 3캔을 편의점에서 수령할 수 있다. GS25는 월 2500원에 ‘더팝플러스카페25’ 커피 전 메뉴를 25%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월 최대 60잔까지 구매가 가능하다. 이 외에도 월 3990원에 베이커리, 프레시푸드, 요리·반찬 등 주요 먹거리 상품을 15개까지 20% 할인받을 수 있는 ‘더팝플러스한끼플러스’ 서비스도 선보였다. GS25의 구독서비스인 ‘더팝플러스’ 이용자는 올 3월 전월 대비 43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GS25는 오는 5월부터 새로운 구독서비스인 ‘더팝플러스생리대’를 진행할 예정이다. 월 2500원을 지불하고 한 달간 GS25의 생리대 전 상품을 25%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이용자는 월 최대 10개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식품업계에선 생수가 대표적인 구독 품목이다. 지난해 제주삼다수의 정기배송 주문량은 약 26% 늘었다. 다양한 샐러드를 주 3~5회에 걸쳐 배송해주는 CJ푸드빌 ‘더플레이스’의 ‘더 샐러드 클럽’은 지난해 서비스 출범 직후 50일 동안 550여 개의 구독권이 완판됐다. 예상보다 높은 반응에 CJ푸드빌은 ‘더플레이스’의 구독 메뉴를 추가하는 한편, ‘더스테이크하우스’와 ‘계절밥상’에도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파리바게뜨는 월간 커피·샐러드·샌드위치 세트 구독서비스를 직영점에서 가맹점으로 확대했다. 뚜레쥬르도 직영점을 중심으로 시행했던 월간 커피 정기구독서비스 매출이 30% 이상 증가하자 가맹점으로 범위를 늘렸다. 월 1만9900원을 내면 하루 1잔의 아메리카노가 제공되는 서비스로 30일간 매일 마신다면 한 잔에 700원으로 커피를 즐기는 셈이다.
건강기능식품을 인공지능으로 추천 배송해주는 모노랩스의 구독서비스 ‘아이엠’
▶카드·통신사도 서비스 확장
카드사나 통신사도 유통플랫폼 역할을 자처하며 속속 구독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최근 KB국민카드가 선보인 ‘케이빌(K-Bill)’에선 월 1만9900원으로 신선 수산물 정기구독이 가능하다. 매월 10일, 20일, 30일에 각각 건어물, 회, 구이용 생선이 무작위로 발송된다. 반려견을 위한 서비스도 눈에 띈다. 현대카드의 ‘펫팩’은 반려견의 간식, 장난감, 관리용품을 정기배송해준다. 프리미엄과 베이직 중 등급을 선택할 수 있고, 이용료는 6개월 기준 각각 8만원, 5만원이다.
롯데카드의 ‘카셰어링팩’은 월 이용료 4900원에 그린카 2시간 이용권, 이디야커피 아메리카노 쿠폰, CU 1000원 할인쿠폰이 주어진다. 문화생활 혜택만 모은 하나카드의 ‘컬쳐케어’는 월 2900원에 매달 CGV 3000원 영화 할인쿠폰과 지니뮤직 음악감상 100회 이용권이 문자메시지로 발송된다.
국내 통신사들도 구독서비스의 한 축이다. 휴대전화요금, 인터넷TV(IPTV),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음악 플랫폼 등 통신사가 제공하는 대부분 서비스가 바로 구독경제 모델이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통신사는 가입자 수가 많고 탄탄하다”며 “전국의 영업점을 중심으로 타사의 제품을 함께 팔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구독서비스에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가장 발 빠른 통신사는 SK텔레콤이다. 대리점에서 SK매직의 렌털 상품을 직접 체험해보고 구독할 수 있고, 최근엔 파리바게뜨에서 빵을 사면 최대 30% 할인받을 수 있는 ‘파리바게뜨 구독서비스’도 출시했다. 월 구독료 4900원으로 하루 3만원, 월 10만원 구입 한도 내에서 할인 혜택이 적용된다.
LG유플러스는 자사 고객을 대상으로 카카오VX가 개발한 홈 트레이닝 서비스인 ‘스마트 홈트(월 2만9700원)’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한다. 또 VIP 멤버십 고객을 대상으로 ‘네이버플러스 멤버십’을 한 달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도 운영 중이다.
네이버의 월정액 유료 회원제 구독 모델 ‘네이버플러스 멤버십’
▶자율주행·전기차 시대 앞두고 배터리도 구독
이미 구독서비스가 활발한 자동차 업계에선 최근 현대차그룹의 움직임이 화두다. 현대차는 정기적으로 차량을 빌려 타는 구독 외에 올 하반기부터 차량 내 통합제어기를 무선으로 업데이트하는 무료 소프트웨어 구독서비스도 시행할 방침이다.
자율주행을 위해 꼭 필요한 핵심기술인 통합제어기는 차량 내 각종 센서 장비가 따로 담당하던 차량 주변 사물 인식 기능을 하나로 통합·관리하는 장치다.
현대차는 지난 2017년 1세대 통합제어기를 구축했고, 올 하반기에 새로 도입할 2세대 통합제어기부터 딥러닝 기반 영상 인식이나 원격 대리주차 기능을 지원할 예정이다. 여기엔 무선 업데이트(OTA·Over The Air) 기능도 탑재된다. 현재 이러한 주행 관련 소프트웨어를 차량 정비소에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자동차관리법상 불법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6월 OTA적용과 관련해 정부에 샌드박스(규제 유예)를 요청했고,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시행이 가능해졌다. 현재 국내에서 OTA 서비스가 가능한 기업은 테슬라와 현대차, 기아뿐이다.
현대차가 올해 안에 시범 실시할 전기차 배터리 리스(대여) 사업도 대표적인 구독서비스다. 현대차는 물류 분야에선 현대글로비스, 배터리 분야에선 LG에너지솔루션, 택시 플랫폼 분야에선 KST모빌리티와 협약을 맺고 전기택시·트럭을 대상으로 시범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택시 플랫폼 사업자가 전기차를 구매한 뒤 배터리 소유권을 리스 운영사인 현대글로비스에 팔면, 이후 택시 사업자는 전기차 보유 기간 중 월 단위로 배터리 리스비를 지급한다. 이렇게 되면 사업자는 사실상 배터리 가격을 뺀 상태로 싸게 전기차를 구매할 수 있다. 저렴하게 전기차를 사들인 후 배터리만 월 구독하는 셈이다.
지난 3월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전호겸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구독서비스로의 전환은 모든 기업에게 필수적이며, 구독의 범주는 제한되어 있지 않기에 서비스에 대한 상상력과 다양성이 매우 중요하다”며 “2023년이 되면 약 75%가 구독경제화된다고 하는데,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위해 정부와 관심 있는 대기업이 나서면 좋겠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