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원말명초, 중국을 휩쓴 전염병… 중국에서 생선회를 먹지 않는 이유
입력 : 2020.03.05 09:35:02
수정 : 2020.03.05 16:36:13
중국은 한국, 일본과는 달리 생선회를 거의 먹지 않는다. 왜일까? 날것을 먹지 않는 음식문화, 그리고 토양과 물이 안 좋기 때문 등등의 이유를 꼽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옛날에는 회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은 사실 생선회의 나라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생선회를 먹고 또 즐겼다. 생선회뿐만 아니라 육회도 좋아했다. 고기를 날로 먹는다는 뜻의 회(膾)라는 한자를 만들어 낸 나라가 중국이다.
역사도 뿌리 깊다.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주나라 출토품에도 회가 보인다. 당시 무덤에서 혜갑반이라는 이름의 그릇이 나왔는데, 구운 자라와 날고기로 전승 기념잔치를 열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상류층 음식에서도 회는 빠지지 않았다. 생선회가 아닌 육회지만 논어에 공자는 장이 없으면 회를 먹지 않는다고 했고, 맹자에는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는 말이 보이니 원뜻은 ‘구운 고기와 날 생선처럼 사람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에도 회를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다.
중국인의 생선회 사랑은 기원후에도 계속됐다. 3세기 역사책 <삼국지>에는 광릉태수 진등이 생선회를 많이 먹어 기생충 때문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4세기 진나라 관리 장안은 가을이 오자 고향의 농어회가 먹고 싶다는 핑계로 낙향했고, 7세기 수양제 역시 금제옥회라는 농어회 맛에 빠졌다. 생선회가 특히 널리 유행했던 시기는 7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당송 시대다. 당송 팔대가를 비롯해 당대 문인들의 시와 문장에 생선회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태백은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 마시고 시를 짓는다며 흥겨워했고, 왕유는 시녀가 들고 있는 금 쟁반에 놓인 잉어회를 노래했으며, 백거이는 아침 밥상에 올라 온 잉어회를 노래했다. 생선회를 즐겨 먹는 현대의 한국인, 일본인이 무색할 정도로 아침부터 생선회를 먹었다.
중국 대표 미식가로 꼽히는 소동파 역시 목숨과 바꿔도 좋을 맛이라며 복어회를 찬양한 것을 비롯해 생선회를 소재로 쓴 시가 여러 편이다. 뿐만 아니라 생선회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북방 유목민족인 여진족의 금나라와 몽골의 원나라에서도 생선회가 인기였다. 금나라 의학서인 <유문사친>에 여진의 귀족들은 치즈인 유락, 양고기 사슴고기의 육포와 함께 생선회를 좋아한다는 기록을 남겼고 몽골 출신으로 원나라 황제의 어의였던 홀사혜도 <음선정요>에 생선회 요리법을 적어 놓았다.
그런데 일일이 예를 들기가 번거로울 만큼 생선회 찬양이 끊이지 않았던 중국에서 명나라 이후 갑자기 생선회가 사라졌다. 문헌에서 생선회를 먹는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명나라 때는 생선회 먹는 조선 사람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광해군 때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병사들이 조선 사람의 생선회 먹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물고기를 날로 먹는 것은 오랑캐의 습관이라며 더럽다고 흉봤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중국인은 회를 먹지 않는다면서 조선 사람이 생선회 먹는 것을 보고 낯설어 한다고 전했다. 명나라 병사들이 생선회를 안 먹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군사는 요동 출신이었다. 산골 출신들이었으니 생선을 날로 먹는 것 자체가 이상했을 수 있다. 또 하나 임진왜란 때인 명나라 말기에는 중국에서 이미 생선회 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문헌상으로 원말명초부터 생선회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명나라 말에는 생선회를 낯선 오랑캐의 음식쯤으로 취급하게 됐다.
기원전 8세기 주나라부터 당을 거쳐 13세기 송과 원나라까지 그토록 생선회를 좋아했던 중국이었는데 명나라 이후 돌연 생선회가 사라진 배경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꼽지만 원인 중 하나로 전염병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나라와 명나라 때 전염병이 만연하면서 두려움 때문에 그토록 즐겨먹던 생선회를 먹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생선회가 사라진 14세기 중국 상황을 이해하려면 같은 시기 유럽의 실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말명초인 14세기 후반, 유럽은 페스트인 흑사병의 대재앙을 겪을 때였다.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전염병이라는 흑사병으로 이 무렵 유럽에서는 엄청난 희생자가 생겼다.
1346년부터 1353년까지 8년 동안 사망자가 적게는 7500만 명, 많게는 2억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한다. 흑사병으로 인해 당시 유럽 인구의 30~60%가 줄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옆집에 살던 이웃 혹은 직장 동료 3명 중 1명 내지 2명이 어느 날 갑자기 정체 모를 전염병으로 인해 희생된 셈이다.
옛날에 비해 의학이 훨씬 발달한 현대에 나도는 사스나 메르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전염병에 대해 품었을 공포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흑사병이 한때 광풍처럼 유럽을 휩쓴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14세기에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17세기 런던 인구의 20%를 죽음으로 몰고 간 런던 대역병을 비롯해 18세기까지 수백 년간 크고 작은 전염병이 무려 100여 차례 발생했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다. 유럽이 흑사병에 시달릴 때 아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어 동양은 무사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14세기 중후반 이후 중국 역시 전염병에 시달렸다.
칭기즈칸 시대 몽골군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의 유럽으로 전파됐다는 흑사병이 동쪽의 중국으로는 퍼지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이 무렵의 중국 역시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의 약 30% 이상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유럽의 흑사병처럼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전 지역에 널리 퍼진 것이 아니라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했기에 유럽 흑사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고 역사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정사인 <원사>와 <명사>만 봐도 곳곳에서 전염병인 역병 발생 관련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원나라 때의 천재지변을 기록한 <원사> ‘오행지’에는 제3대 무종 황제가 즉위하던 해인 1308년 봄, 역병이 널리 퍼졌다고 나온다.
“소흥과 경원 대주에 전염병이 돌았다. 죽은 자가 2만6000여 명에 이른다.”
절강성의 대표 도시 세 곳에 동시에 전염병이 퍼졌으니 절강성 전체에 전염병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 수도 당시 도시 인구를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간단하게 한 줄로 적혀 있지만 피해상황이 꽤 심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행지>에는 4년 후인 1312년 수도에 큰 전염병이 돌았다고 적혀있다. 역시 단어 몇 개로 간단하게 적었지만 절강에서 멀리 떨어진 북경까지 퍼졌다는 것이니 이 무렵 중국은 곳곳에서 전염병에 시달린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유럽에서 1346년 흑사병이 대재앙을 일으키기 직전, 중국에도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지낸 것도 바로 이때의 전염병이 원인이었다. 주원장이 부모를 잃은 전염병은 원나라 11대 황제인 혜종 때 있었던 일이다. 혜종은 재위 기간이 1333년부터 1369년까지 35년으로 이때는 원나라 역사에서 전염병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재위 기간 중 전염병이 돌았다는 기록이 12차례나 적혀 있으니 평균적으로 3년에 한 번 꼴로 전염병이 유행했던 셈이고, 즉위 20년째 되던 해에는 매장 인원만 20만 명이 넘었다고 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유럽의 흑사병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던 것처럼 중국 역시 전염병 유행은 이후 수백 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영락제 때인 1409년에는 강서와 복건 등지에서 전염병이 돌아 7만8000명이 사망했고 1411년에는 등주와 연해 등에서 600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밖에도 1455년 남경의 대 참상과 1643년 여름에 전염병이 돌아 북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생선회 이야기로 돌아와서, 고대부터 원나라 초기까지 생선회를 즐겼던 중국인이다. 그런데 원말명초를 전후로 생선회가 사라졌다. 일부 음식 사학자들이 그 배경으로 중국의 전염병 역사(溫疫史)를 지적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