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경의 1막1장] 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 가녀린 여성 아닌 21세기 근육질 남성무용수 백조
입력 : 2019.10.10 10:38:23
수정 : 2019.10.10 10:38:56
2001년 개봉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최정상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탄광소년의 성장기를 그린 290만파운드(약 500달러, 약 60억원) 저예산 가족영화였다. 제작비 몇 십 배의 대박을 올린 <빌리 엘리어트>는 미국에서만 2200만달러(약 262억원)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영화, 도서, 뮤지컬로 장르를 변화하며 아직도 전 세계에 그 위상을 떨치고 있다. 스티븐 달드리(58) 감독은 1984년 봄부터 무려 51주 동안 계속되었던 영국 탄광노조의 파업을 배경으로 어느 소년의 동심스토리를 구상했다. 이 콘텐츠의 탄생에는 매튜 본(59)이라는 혁혁한 공신이 숨어있다. 발레는 투투를 입고 공기의 저항을 반하며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우아한 여자무용수, 발레리나가 꽃이다. 1995년, 영국의 35살 젊은 안무·연출가 매튜 본은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를 남성 백조만 등장하는 현대적인 버전으로 새롭게 구상해 영국적 발레리노 캐릭터를 빚어냈다. 영화 엔딩 부분에는 발레리노로 성장한 빌리가 힘차게 도약하는 장면이 삽입되었는데 이는 실제 <백조의 호수> 공연 중에 촬영한 것으로 성인 빌리 역으로 출연한 아담 쿠퍼(49)는 초연부터 <백조의 호수>를 이끌었던 당시 대표 발레리노였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가 없었더라면,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주인공을 소년에서 소녀로 변경해야하지 않았을까.
▶무용계의 지형을 바꿔놓은 댄스뮤지컬
1995년 11월, 영국 새들러스 웰스 극장에서는 고결한 여성무용수들의 백조가 아니라, 깃털바지를 입고 상의 탈의한 남성무용수들이 박진감 넘치게 등장했다. 동요한 일부관객은 야유를 퍼 부었고, 몇몇은 보란 듯이 공연 중에 극장 문을 박차고 나갔다. 허나 공연이 진행될수록 매튜 본이 창조한 백조들은 살아 움직여 관객의 시선을 고스란히 흡입했고 관객들은 역사적인 신작에 집중하느라 미동도 못할 정도였다. 왕자가 백조에게로 비상하는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끝나자, 극장은 천장을 뚫을 것 같은 열광적인 기립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평단과 언론의 호평으로 이어져 ‘눈물을 멈춰라. 마지막 장면이 당신의 심장을 춤추게 할 것이다(헤럴드)’ 등의 찬사가 뒤를 이었다.
영원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는 유약한 ‘왕자’와 그가 갖지 못한 강인한 힘과 아름다움, 자유를 표상하는 존재인 ‘백조’ 사이에서 펼쳐지는 가슴 아픈 드라마로 탈바꿈했다. 어떠한 사랑을 가질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보편적인 욕망과 자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백조의 호수>는 역사상 가장 롱런하는 무용공연이 된다. 매튜 본이 댄스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고전 발레’와 ‘현대 무용’ 양 장르로만 구분되던 무용계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1995년 올리비에 최우수 무용공연상 수상으로 평단의 인정을 받은 매튜 본은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연출가로 발돋움하며 무용계의 그에 대한 불만과 의심을 불식시켰다.
▶‘무용계의 이단아’로 손가락질 받던 매튜 본
지금이야 혁신의 대명사이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무가로 추앙받지만, 그는 <백조의 호수>로 성공을 구가하기 전까지 권위적인 무용계의 전통과 관습에 맞서야 했다. 낯설고 파격적인 시도로서 무용계 일각에서는 ‘고전 발레를 파괴하고 걸작을 엉망으로 만드는 애송이’라는 빈정 어린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매튜 본의 독창성과 대담성은 거저 나온 것이 아니다. 현대무용스쿨인 라반센터를 졸업했지만 입학하기 전까지 22년 동안 그는 무용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런던 출신의 그는 어릴 적부터 영국 뮤지컬의 메카, 웨스트엔드와 영화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며 공연과 영화 속 스토리를 경험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학습과 훈련으로는 접근하지 못할 상상력을 이용한 극적 내레이션과 표현방식을 통달할 수 있었다. 이후 BBC 방송국 기록보관소 직원, 국립극장 안내원으로 근무하며 자신의 꿈을 키운 그는 라반센터에 입학했다. 현대무용학교를 졸업한 27세 매튜 본은 바로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해 번뜩이는 환상적 아이디어를 무대에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최고의 기량과 미학으로 이룬 ‘발레의 명품화’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신 ‘발레의 대중성’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의 작품에는 발레, 현대무용, 뮤지컬, 영화, 탭 댄스, 사교댄스 등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모든 움직임 양식이 총망라된다. 그는 권위의 올리비에상만 8번 수상했으며, 토니상 최우수 안무가상, 최우수 연출가상 등 40개의 국제적인 상을 수상했다. 그는 ‘007시리즈’의 명배우 주디 덴치(85)와 함께 최다 올리비에상 수상자이다. 2016년에는 영국의 찰스 황태자로부터 현대무용계 최초로 기사작위를 수여받는 영예를 안으며 그는 명실상부한 영국을 대표하는 예술 브랜드가 되었다.
▶‘공연계 마이더스 손’의 터치
차이코프스키의 웅장하고 애달픈 음악은 그대로 고수하며 ‘공연계 마이더스의 손’답게 그는 고전작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명작을 창작했다.
배경은 1950년대 영국 왕실이다. 남 부러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여왕은 하나뿐인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다. 유약한 왕자는 여왕의 기대를 번번이 져버린다. 여왕은 왕자를 강력한 군주로 발돋움시켜야 하다보니 왕자가 갈구하는 칭찬, 애정 표현, 인정은 애써 외면했다. 모성결핍 왕자의 유일한 위안이던 여자친구마저 왕위를 노리는 세력에게 사주 받아 접근한 것이 밝혀지자 왕자는 절망해 자살을 결심한다. 물속에 뛰어들려는 순간, 백조를 만나 삶의 희망을 얻은 왕자는 왕실로 돌아온다. 어느 날,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은 왕실 무도회에 백조와 꼭 닮은 ‘낯선 남자’를 앞세워 여왕을 유혹하게 한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른 왕자는 급기야 어머니인 여왕에게 총까지 겨눈다. 극도의 신경쇠약에 탈진한 왕자는 백조의 품에 안겨 죽음으로 영원한 안식을 찾게 된다. 2003년, 2005년, 2007년, 2010년에 한국을 찾아 이미 8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전설의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가 올해 9년 만에 한국 무대를 밟는다. 이번 공연은 무대, 조명, 의상을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무용수들을 중심으로 더욱 강력해진 ‘백조‘의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신비로운 호수와 화려한 왕실 무도회, 런던 뒷골목 등 왕자의 환상과 현실 속 감흥적 공간은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백조로 분한 남성무용수들의 관능적이고 역동적인 군무는 강한 힘과 카리스마를 발산해내며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 - 120분
·공연일시 : 2019년 10월 9일(수)~10월 20일(일) 평일 8pm, 주말·한글날 2:30pm/7:3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