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돈 없으면 빈대떡·갈치구이? 갈치·삼치·꽁치·준치… ‘치’자 돌림 생선의 재발견
입력 : 2019.03.12 14:09:34
수정 : 2019.03.12 14:10:29
흘러간 옛 유행가 가사에서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으라고 노래한다. 시대가 바뀌어 지금은 빈대떡이 그렇게 만만한 음식이 아니지만 약 70여 년 전에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울 때 먹는 전형적 서민음식이었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요즘은 갈치가 비싼 생선 대접을 받지만 250년 전쯤 19세기 초 한양에서는 또 달랐다. 유행가 속 빈대떡 신사를 조롱하는 것처럼 당시 속담에서는 돈 떨어지면 집에 가서 갈치나 구워 먹으라고 했다. 조선 순조 때 문헌인 <난호어목지>에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소금에 절인 갈치를 사먹으라(不欲費錢鏹須買葛侈鮝)’고 나온다. 맛있는 생선이지만 갈치 값이 그만큼 쌌기에 생긴 소리였을 것이다.
18~19세기 한양에서는 갈치가 무척 흔했나 보다.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가 당시 한양의 모습을 시로 남겨 놓았는데 종로의 육의전 풍경쯤으로 추정된다. 어물전에 쌓인 갈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갈치는 이렇게 여러 생선과 함께 도성 주민의 입맛을 유혹했다. 좋은 갈치는 잡아서 모두 한양으로 올려 보냈으니 어촌에서는 오히려 갈치를 먹기 어려웠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싱싱한 갈치와 좋은 준치는 모두 한양으로 올려 보내고 촌마을에는 가끔씩 새우젓 파는 소리만 들린다는 글을 남겼다. 갈치가 한양 시장으로 몰렸던 만큼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관청에 물품을 납품했던 공인, 지규식이 남긴 <하재일기>에 ‘일꾼에게 술값으로 1냥 5전을 지급했는데, 1냥은 안주인 갈치 값’이라고 했다. 한 냥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밤에 참외 1냥 어치를 사먹었다고 한 것을 보면 갈치 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갈치가 귀해진 한국 바다와 달리 조선 바다는 갈치가 많이 잡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 년 열두 달 내내 잡혔으니 <임원경제지>에는 동해와 서해, 남해에서 모두 갈치를 잡는데 계절에 따라 많이 잡히는 지역이 다르다고 기록했다. 갈치는 오랜 세월 서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흔했던 만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소금에 절이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운반도 쉬운 데다 값싸고 맛도 좋아 옛날부터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었기에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소금에 절인 갈치나 사 먹으라는 말이 생겼다.
▶망어(亡魚)라는 의미의 삼치
지금은 국민적 사랑을 받지만 옛날에는 그다지 대접 받지 못했던 생선이 또 있다. 삼치가 그런 물고기였다. 농어목 고등어 과의 등 푸른 생선인 삼치는 살짝 기름진 데다 맛은 담백하고 육질마저 부드러워 생선을 썩 좋아하지 않아도 삼치만큼은 즐겨 먹는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런 생선이었기에 조선시대에 임금님한테 진상을 했는데 도리어 삼치로 인해 파직 당한 관리가 있었다. 삼치라는 생선 이름이 그래서 생겼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조선 중기에 전라도에 부임한 신임 관찰사가 관내를 순시하던 중 한 어촌 마을에 들렀다고 한다. 고을 현감이 마침 그곳에서 잡은 생선으로 회를 떠 관찰사를 대접했는데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다. 충성심이 대단했던 관찰사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임금님도 드셔봐야 한다며 도성으로 올려 보냈고 며칠이 지나 도착한 생선을 맛본 임금이 인상을 찌푸렸다.
생선이 이미 상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임금이 관찰사를 파직시키니 칭찬을 기대했다 벼슬에서 쫓겨나게 된 관찰사가 “망할 놈의 생선 때문에 망했다”며 탄식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물고기를 망어(亡魚)라고 불렀는데 발음이 불편했는지 나중에는 삼 마(麻)자를 써서 마어로 바뀌었고, 한자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백성들이 순 우리말로 고쳐 삼치가 됐다는 것이다.
삼치가 정말 그래서 생긴 이름일까?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를 정색해서 풀어보면 생선 때문에 인생 망친 관리가 진짜 있기는 있었다.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관청인 사옹원에서 부패해 악취가 나는 망어(亡魚), 꿩, 오리고기를 공물로 받았다.
<승정원일기> 인조 13년의 기록인데, 상한 음식을 보냈으니 징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현지 관리가 처벌 받았다. 파직당한 관리가 망할 생선이라고 욕해 망어가 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삼치의 또 다른 별칭이 망어였다. 삼치는 망어라는 이름 때문에 구박을 당했다.
<난호어목지>에 삼치는 맛좋은 생선으로 북에서는 마어(麻魚), 남에서는 망어(亡魚)로 부르는데 바닷가 마을에서는 좋아하지만 사대부들은 망할 망(亡)자가 들어있어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멋대로 이름을 지어놓고 별별 핑계로 다 구박했으니 삼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더욱 기막힌 것은 삼치가 사실은 망할 생선이어서 생긴 이름이 아니라 맛이 좋아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우해이어보>에 관련 설명이 보인다. 이 물고기는 삼차(參差)라고 읽는데 맛은 방어와 비슷하지만 더 새콤하며 산뜻한(尤醦) 맛이기에 현지인들은 삼어, 참어(醦魚)라고 부르며 진미로 여긴다고 기록했다. 갈치나 삼치나 모두 흔하고 친숙한 생선이었기에 생겨난 스토리 같은데 너무 익숙하다보니 잘못된 편견까지 생겼다. 멸치 꽁치 가물치 등등 ‘치’자 들어가는 생선이 무더기로 받았던 오해다.
▶치로 끝나는 생선은 싸구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보면 한자로 물고기 ‘어(魚)’자가 들어가는 생선은 고급 어종인 반면 한글 ‘치’로 끝나는 생선은 저급한 싸구려 물고기라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갈치나 삼치 꽁치 같은 치자 생선은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이밖에도 일일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다양한 말이 있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치’는 주로 토종 물고기에 붙는 이름이다.
<아언각비>에서 정약용이 우리말 생선 이름에는 ‘치’자가 들어간다면서 준치, 날치, 갈치, 멸치 등을 예로 들었다. 국립수산과학원의 연구논문에도 치자로 끝나는 생선 이름은 대부분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자주 먹거나 봐왔던 친숙한 어류였다고 밝히고 있다. 고대로부터 즐겨 먹던 생선이기에 생활 속 언어에 한자어 대신 고유어가 남아있는 것이니 치자 들어가는 생선이름이 결코 낮잡아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준치가 대표적 예다.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처럼 얼마나 맛있으면 생선이 썩어도 제 값어치를 한다는 소리가 생겼을까. 준치는 한자 이름이 여럿이다. 그중 하나가 ‘진어(眞魚)’인데 문자 그대로 진짜 생선이라는 뜻이다. 풀이 하자면 준치와 비교해 다른 생선은 모두 가짜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름만 봐서는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이 생길 만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시어(時魚)’라고도 불렀다. 물고기 어(魚)변에 때 시(時)자를 쓰는데 제철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졌다가 이듬해가 되어서야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3월 하순부터 준치가 잡히는 계절로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시어는 살이 통통해 맛은 좋지만 가시가 많다’고 기록했다.
진짜 물고기라고 할 만큼 맛은 좋은데 아무 때나 맛볼 수 없는 생선이니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해 중국에서는 시어를 곰발바닥 샥스핀, 제비집수프와 함께 예부터 전해지는 여덟 가지 산해진미 중 하나로 꼽았다.
양자강 시어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청나라 때는 시어를 산채로 운송해 황제에게 보내기 위해 백성들이 엄청난 고생을 했다. 양자강에서 북경의 자금성까지 약 1300㎞, 삼천리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살아있는 시어를 날랐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날랐지만 운송 도중 죽거나 신선도가 떨어져 실제 황제가 먹을 수 있는 생선은 1000마리 중에서 서너 마리에 불과했다. 덕분에 우스갯소리도 생겼다. 황제가 하사한 신선도 떨어진 시어를 맛 본 관리가 남쪽 양자강을 여행하다 진짜 시어를 맛보고는 가짜라고 우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양자강 시어가 우리 준치와 같은 생선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문헌을 종합해 보면 준치 종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썩어도 맛있다는 생선, 준치지만 단점도 있다. 잔가시가 많아 잘못 먹으면 목에 가시가 걸려 고생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시어다골(時魚多骨)’, 맛있는 준치에는 뼈가 많다는 말이다. 권력이나 재물을 너무 탐하면 불행이 닥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교훈인데 요즘 세상에도 유효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