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최근 이라크 출장 중에 사전 예고 없이 현장을 방문한 비스마야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 의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한화그룹이 다시 통 큰 승부수를 던졌다. 김승연 회장의 복귀와 함께 ‘빅딜’을 통해 재계에 존재감을 알린 것이다. 지난해 11월 25일 한화그룹은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 등 삼성 계열사 인수를 추진하며 단숨에 방위사업과 석유화학사업 부문 선두로 올라섰다. 또한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토탈 인수를 통해 석유화학사업 부문 매출 규모가 18조원에 이르러 석유화학산업에서 국내 1위의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인수자금만 2조원에 가까운 돈을 풀어 큰손 역할을 톡톡히 했다.(삼성테크윈 8400억원, 삼성종합화학 1조600억원, 실적에 따라 1000억원 추가 옵션) 이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근 15년 동안 국내 재계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진 가장 큰 규모의 인수합병이다.
이번 빅딜을 통해 한화그룹의 자산규모는 50조원대로 늘어나 재계 서열 10위에서 9위로 올라서게 됐다.
2002년 대한생명 인수로 재계 20위권에서 10위권으로 진입한 후 12년 만의 순위 상승이다.
한화그룹은 1952년 김승연 현 회장의 부친인 김종희 선대 회장이 화약사업으로 태동한 터라 방산 산업과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번 인수합병은 모태 주력 산업분야에 동력을 집중해 내실을 다지는 사업 포트폴리오의 재편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한화그룹 측은 “이번 M&A를 통해 한화그룹의 지난 60여 년 역사 동안 줄곧 그룹 성장의 모태가 돼 온 방위사업과 석유화학사업의 위상을 국내 최대 규모로 격상시켰다”고 자평하며 “방위사업과 유화사업의 핵심역량 강화를 위한 이번 딜이 성사됨으로써 ‘선택과 집중’ 전략에 기반한 중장기 사업구조 재편 작업을 일단락했다”고 설명했다.
기계·로봇사업 시너지 노려
이번 빅딜 전까지 한화그룹이 놓인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석유화학 분야는 중국 업체들의 공급과잉으로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었고 야심차게 신사업으로 추진했던 태양광 사업은 2012년 이후 업황이 부진해 손실이 상당했다.
이번 빅딜은 지난해 2월 법정재판을 마치고 6개월 넘게 요양을 하면서 그룹의 비전에 대해 심각하게 고심해온 김승연 회장이 꺼내든 카드다.
돌파구는 기존 주력 사업인 석유화학과 그룹의 모태인 방위산업분야 강화였다. 한화는 지난해 9월 방산업체인 삼성탈레스의 인수를 삼성 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삼성이 호응하며 거래가 진전되고 대상은 탈레스의 모기업인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삼성토탈 등 석유화학 계열사까지 확대됐다. 초여름부터 유가가 급락하면서 내부에서 화학사업 인수에 대한 우려도 나왔지만 김 회장은 직접 나서서 빅딜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한화그룹의 삼성계열사 4개사에 대한 경영권 인수는 기존 사업포트폴리오의 안정성과 성장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거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화그룹=태양광’이라는 지난 몇 년간의 이미지를 한화그룹의 주력사업이 방산, 화학, 태양광, 금융으로 바꾸는 무형의 효과를 얻었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외부 인력이 유입되면서 기존 석유화학 사업부분에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화가 삼성토탈 인수로 정유 사업에 15년 만에 재진출하는 점도 주목된다. 1970년 미국 유니언오일과 합작으로 경인에너지를 세우고 정유 사업을 시작했던 한화는 합작 청산으로 한화에너지로 이름을 바꿔 달았고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현대그룹과의 빅딜을 통해 한화에너지를 현대오일뱅크(당시 현대정유)에 매각한 바 있다.
삼성테크윈의 경영권과 삼성탈레스의 공동경영권을 갖게 된 한화그룹은 주력분야인 방산 산업 외에 타 산업분야와의 시너지도 기대하고 있다.
삼성테크윈은 영상보안장비(CCTV), 칩마운터(반도체 칩 장착 장비), 가스 터빈 및 K-9 자주포 등을 생산하는 정밀 기계업체다. 공동경영권을 갖게 된 삼성탈레스는 2000년 삼성그룹과 프랑스 탈레스인터내셔널과의 50대50 지분 합작으로 설립된 회사로, 구축함 전투지휘체계, 레이더 등 감시정찰 장비 등의 군사 장비를 생산하는 방산 전자회사로 알려졌다.
한화그룹은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 인수를 계기로 방위사업 자체의 규모 확대뿐만 아니라 기존의 탄약, 정밀 유도무기 중심에서 자주포, 항공기·함정용 엔진 및 레이더 등의 방산전자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해 차세대 방위사업에 적합한 포트폴리오를 확충하게 됐다. 삼성테크윈의 사업영역 중 하나인 로봇 무인화 사업 육성에도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10월에 합병한 기계부문(구 한화테크엠)의 산업기계 기술에 삼성테크윈의 메카트로닉스 기술을 통합해 공장자동화, 초정밀 공작기계, 태양광 제조설비 등의 분야에서 시너지를 노리겠다는 복안이다.
기존 국방용 무인기 기술에 삼성테크윈의 영상처리 및 정밀 제어기술, 삼성탈레스의 소프트웨어 기술을 더해 중장기적으로 무인시스템과 첨단 로봇사업 분야 등으로도 적극 진출한다는 청사진도 그리고 있다.
진격의 M&A 역사 그리고 성장
이번 대규모 인수합병은 재계에 미친 충격파가 컸지만 낯설지는 않다. 한화그룹은 지난 30년간 석유화학, 금융, 호텔, 유통, 태양광 등 굵직한 M&A를 성사시키면서 그룹 규모를 키워왔다. 성사된 M&A 역사가 한화그룹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양화학 울산1공장
한화는 흔히 방산 산업의 색채가 강해 ‘의리 있고 투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실은 대형 인수합병을 통해 성장한 실리적이고 스마트한 기업에 가깝다. 현재 (주)한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회사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한화의 이름을 얻은 후 성장한 케이스로 봐도 된다. 이러한 빅딜의 중심에는 김승연 회장이 있었다.
1981년 2차 오일쇼크로 인해 다우케미칼이 글로벌 석유화학 경기가 크게 위축되자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의 매각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프라스틱공업을 인수하여 PVC를 생산하고 있던 한화그룹은 PVC 원료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한양화학 인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인 석유화학 경기는 불황을 겪고 있어 내부에서도 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김승연 회장은 뚝심으로 1982년 양사를 인수해 처음으로 한화그룹을 국내 10대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1980년 7300억원 규모이던 한화그룹 매출은 1984년 2조1500억원으로 성장했고 2013년 3조5914억원의 매출을 올려 업계 1위를 지키며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위)명품관 이스트, (아래)대천 파로스
1985년에는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의 전신인 명성콘도를 손에 넣었다. 당시 리조트 업계 선두주자였던 정아그룹의 명성콘도는 무리한 시설 확장과 자산관리 부실, 불법 자금조달 등으로 파산해 정리 절차를 개시하고 있었으며 1988년 당시에는 자본잠식(-400억원) 상태에 이른 상황이었다.
1985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이후 사명은 한국국토개발로 변경됐으며 단순 콘도미니엄사업에 치중했던 것에서 벗어나 종합레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7년 근 10년 만에 법정관리에서 벗어난 현재 골프장, 콘도, 워터파크 등 레저 분야는 물론 단체급식과 식자재 사업에도 진출해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 레저 기업으로 성장한 바 있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중화학 분야에 편중된 사업구조를 개선하고 B2C 사업으로 다각화를 검토하던 중 ㈜한양의 부도로 M&A 시장에 나온 매출 1000억원, 자본금 4억원 규모의 적자 기업인 한화갤러리아의 전신인 한양유통을 인수해 큰 성공을 거뒀다.
2000년대 들어서 한화그룹의 M&A는 주로 금융부문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02년 인수한 한화생명(구 대한생명)이 대표적이다.
2013년 말 기준 매출, 수입보험료, 총자산 등에서 보험업계 2위에 자리한 한화생명은 인수 당시 고용 안정화 및 무배당 정책 등으로 누적손실만 2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부실기업이었다. 인수 6년 만인 2008년 부실을 털어내고 연간 이익 약 500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성장했고 현재는 그룹 전체 매출 비중의 절반을 담당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대규모 인수합병을 통해 고비 때마다 회사를 성장시켜 온 한화그룹이지만 굴곡도 있었다. 2008년 대우조선해양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지만 인수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며 3150억원의 이행보증금을 포기해야 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2년에는 큐셀을 인수하고 중국의 솔라펀파워도 사들이며 태양광 투자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인수 당시 파산기업이었던 큐셀을 인수 2년 만에 성공적으로 턴어라운드시켰고 한화솔라원까지 포함해 글로벌 태양광 업계 3위 수준으로 도약했지만 업황 부진으로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불투명한 상태다. 몇 년 동안 성공적이라 평가받을 만한 인수합병 사례가 없었던 만큼 이번 빅딜에 큰 관심이 쏠려 있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이라는 전례가 있는 만큼 자금 조달 여력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화그룹은 여유로운 태도를 내비쳤다.
한화그룹 측은 “㈜한화, 한화케미칼, 한화에너지 등 인수 3사의 경우 보유 현금과 매년 창출하는 잉여 현금흐름 등을 보면 충분히 조달 가능한 수준”이라고 주장하며 “인수대금을 2~3년 동안 분납하기로 약정해 대금 지급시점까지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화생명 지분매각 등을 통해 추가 자금 확보에도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기간 삼성맨으로 지내온 직원들을 ‘의리로써’ 한화맨으로 효과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김 회장은 이를 의식한 듯 이라크 출장 중 직원들에게 “최근 그룹이 획기적인 M&A를 성사시키며 대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며 “방산과 석유화학 등 주력 사업 분야에서 삼성의 새로운 가족과 함께 세계 일류기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자”고 말한 바 있다.
여러 인수합병 경험을 통해 잡음 없이 조직 간 문화통합을 이뤄내겠다는 것이 한화그룹 측의 계획이다. 이를 위해 효과적인 인수합병을 위해 합병 후 통합(PMI) 전담팀도 구성했다. 통합되는 삼성 계열사 직원을 100% 고용 승계하고 처우와 복리를 현재 수준과 동일하게 유지하는 한편 현재 삼성 계열사 임원진도 최대한 유임시킨다는 방침이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삼성의 기업 문화를 존중하고 우수 인재 보호와 조속한 안정화, 합병 이후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기계·방산 부문과 유화 부문으로 구분해 PMI 전담팀을 만들어 12월 15일부터 가동한다”고 밝혔다. 명운을 걸고 수장의 복귀와 함께 한화그룹이 던진 회심의 승부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