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거꾸로 보자. 우리가 그동안 봐온 지도 속의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을 머리에 이고, 힘겹게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달라진다. 한반도는 더 이상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매달린 반도가 아니다. 오히려 유라시아 대륙을 발판으로 삼고, 드넓은 태평양의 해원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는 모습이다.”
(김재철 회장의 저서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중에서)
재계서열 38위(공기업 제외), 자산규모만 3조1037억원(2012년 회계연도 기준)에 이르는 동원그룹은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알짜배기’로 소문난 그룹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식품가공업체로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조업이 아닌 원양어업을 통해 지금의 대기업을 일궈냈다는 점에서 동원그룹이 성장해온 발자취는 더욱 특별하다.
이뿐 아니다. 동원그룹 창업주 김재철 회장은 자신이 직접 창업을 해 맨손으로 지금의 기업을 일궈낸 몇 안 되는 창업세대다. 특히 일흔이 넘은 고령에도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하며 젊은 CEO 못지않은 활동량과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며 재계의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다.
‘재계의 장보고’로 불리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더 높은 명성을 쌓고 있는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 부지런함을 무기로 남들보다 한발 앞서 바다로 나섰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동원 참치잡이 원양어선
원양어업에서 금융업까지
김재철 회장의 삶을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도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대학입시에서부터 ‘마도로스’란 직업을 선택한 것, 그리고 회사를 설립하기까지 계속된 도전을 이어왔다.
1935년 전남 강진의 농촌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회장은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에 따라 동생들 대신 홀로 학교를 다녔다. 우수한 성적으로 강진농고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후 대학입학을 앞두고 그의 첫 번째 도전이 시작됐다. 서울대 농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허가까지 받아 놓은 상태에서 부산의 수산대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학졸업 전,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김 회장은 다시 무모해 보이는 도전정신을 발휘했다. 당시 수산대 졸업생들의 경우 대부분 수산청이나 수협 같은 관계기관에서 근무하거나 선생님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느닷없이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김재철 회장은 당시 “제가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하니, 모두들 객기로 여기는 듯 했다”면서 “결국 항해 중에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승선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렇게 어렵사리 탄 배가 바로 우리나라 첫 번째 원양어선인 ‘지남호’다. 1958년 지남호의 승선자로 바다를 접한 김 회장은 이후 8년간 마도로스 생활을 이어가며 ‘참치 잘 잡는 선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바다생활을 직접 몸으로 익힌 김 회장은 1969년에 ‘동원산업’을 설립한다. 그리고 바다로 나가 잡은 참치를 미국의 참치캔 1위 업체인 스타키스트에 팔아 막대한 규모의 달러를 들여왔다. 이렇게 자금을 모은 김 회장은 1981년 동원식품(현 동원F&B)을 설립하며 종합 식품회사로 변신을 시작했다. 동원식품은 동원산업이 원양어업을 통해 잡은 참치를 캔으로 가공했는데, 이게 바로 오늘날의 동원그룹을 있게 한 베스트셀러 상품인 ‘동원참치캔’이다.
같은 해에는 한신증권을 인수해 동원증권(현 한국투자금융지주)을 세웠으며, 성미전자, 동원건설(현 동원시스템즈) 등을 인수하며, 식품-전자-건설-금융을 잇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96년에는 중국을 비롯해 해외 현지법인을 잇달아 설립하며 현재의 ‘동원그룹’이란 면모를 갖추었다.
2000년에는 식품사업부문을 동원F&B로 분할한데 이어, 2001년에는 지주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며 후계구도를 완료했다. 특히 한신증권을 인수해 만든 동원증권이 2003년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며 금융과 산업을 모두 갖춘 독특한 구조의 대기업 집단으로 진화했다.
장관부터 법조계까지 화려한 혼맥
원양어업으로 시작해 동원그룹이란 대기업을 일궈낸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또다른 면에서 재계전문가들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바로 혼맥이다. 김 회장은 부인인 조덕희 여사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는데, 사돈댁들이 모두 쟁쟁하다. 장관에서부터 법조인, 국가정보원장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이들을 사돈으로 두고 있다.
먼저 김 회장의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대표 겸 한국투자증권 부회장은 제28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고병우 씨의 딸 소희 씨와 1992년 봄에 결혼했다. 고려대 김동기 석좌교수의 주례로 치러진 이날 결혼식에는 국내외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화제가 됐다.
이화여대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고씨는 김 부회장과 사이에서 동윤·지윤 남매를 두고 있다. 김 부회장의 장인인 고병우 전 장관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 동아건설 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경영협회장으로 대외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2003년 5월 동원금융지주(현 한국금융지주) 사장에 올라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3월 동원증권 사장에 취임하면서 “한국투자증권이나 대한투자증권 중 한 곳을 인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는 데 성공해 그의 뚝심을 보여줬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오너 2세’가 아닌 능력 있는 기업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재철 회장의 장녀 은자 씨는 1989년 서울지검 정택화 검사(사시 25회)와 결혼했다. 정 검사는 광주지검 부부장검사, 대구지검 안동지청장, 부산고검 부부장검사, 의정부지검 형사1부 부장검사, 대구고검 검사를 거쳐 현재 광주고등검찰청에 재직 중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외아들 연욱 군이 있다. 정 검사의 부친은 유원연료공업 정권영 사장이다.
이화여대 정외과 출신인 둘째딸 은지 씨는 고(故) 김택수 전 국회의원의 4남인 김중성 씨와 1992년 10월 결혼했다. 김 전 의원은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낸 중량급 정치인으로 24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1971년부터 8년 여 동안 맡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김한수 한일그룹 창업주의 친동생이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민선과 현선 두 딸을 두고 있다.
이들 부부는 김재철 회장과 친한 천신일 세중여행사 회장이 1988년 여행사에서 어린이들을 인솔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프로그램(CISV)의 대학생 리더로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는 게 주변에 알려진 얘기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김종성 씨는 나라종합금융 상무이사를 지낸 후 2001년 미국 뉴저지로 건너가 투자관리회사인 세인투자관리를 설립해 현재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원그룹의 한 축인 동원엔터프라이즈(동원F&B 등 식품지주회사)에서 핵심역할을 하고 있는 둘째아들 김남정 부사장은 3년 여의 열애 끝에 1998년 10월 워커힐호텔에서 신수아 씨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동찬과 서연 남매를 두고 있다.
신씨는 33대 법무부 차관과 25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신건 전 국회의원의 셋째 딸이다. 김재철 회장과 신 전 의원이 사돈관계가 되는 셈이다. 신 전 의원은 국민의 정부 시절 불법 감청을 지시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돼,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함께 법정에 서기도 했다.
김재철 회장
국민식품 베스트셀러 ‘참치캔’
김재철 회장은 경영능력과 화려한 혼맥 외에도 ‘뛰어난 통찰력’과 ‘수려한 문장력’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그는 엄청난 독서량을 통해 앞을 내다보는 경영인의 혜안과 통찰력을 키운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김 회장은 대단한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마도로스 시절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 정박하면 헌책방에 들어가 무게 단위로 파는 책들을 무작위로 사들여 항해 과정에서 모든 책을 읽었다고 한다.
또한 김 회장은 미국 하버드대 최고경영자과정 시절에 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1981년 동원식품을 설립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수업 중에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되면 참치통조림을 먹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동원식품을 설립해 참치캔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동원참치캔은 출시 이후 4~5년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88올림픽과 함께 국민식품으로 성장하며 지금의 베스트셀러 상품이 됐다.
증권업에 뛰어들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하다. 김 회장은 1982년 한신증권을 80여억원에 사들이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하버드대학 MBA 출신들이 증권사를 선호하는 것을 보고 고급인재들을 모으기 위해 증권업에 뛰어들었다고 밝혔다. 한신증권은 1996년 동원증권으로 사명을 바꾼 뒤, 2003년에는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며 증권가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했다. 2004년에는 동원그룹에서 계열분리 됐다.
재계에서는 김 회장의 이 같은 사업 수완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다. 한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창업세대 특유의 근면성실함과 독서와 학업을 통해 다진 지식, 그리고 한번 결정하면 굳세게 밀어붙이는 추진력 등 대기업 창업자들의 갖고 있는 성공 DNA를 제대로 보여준다”면서 “특히 맨손으로 창업해 직접 현장에서 벌어들인 자금으로 지금의 동원그룹을 세웠다는 점, 1970년대부터 글로벌을 무대로 활동했다는 부분에서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우리나라 경제사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종열 기자 사진 매경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