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국내에서 헤지펀드라고 하면 투기성 자금이 연상됐다. 그러나 이는 헤지펀드의 본래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고 있는 오해다. 물론 헤지펀드에 투기성이 짙은 자금이 포함돼 있기는 하다. 하지만 더 많은 헤지펀드는 투기보다는 오히려 투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헤지(Hedge)’의 사전적 의미도 투기와는 거리가 멀다. 헤지는 ‘집이나 정원, 도로 주변에 덤불이나 나무의 잔가지들을 얽어 만든 울타리’를 뜻한다. 이런 사전적 의미가 금융 용어로 차용되면서 ‘위험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다양한 방법으로 절대수익을 추구하는 투자기법’으로 확대됐다.
헤지펀드는 원래 투기와 거리가 멀어
투자 위험을 막는 방법, 즉 헤지 수단은 매우 많다. 자산을 다양한 곳에 배분하거나 현물 주식을 사면서 동시에 선물주식을 매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확실하게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을 찾아 투자하는 것도 ‘헤지’의 한 방법이다. 따라서 ‘헤지펀드=투기성 자금’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선입견일 뿐이다.
최근 국내에도 본격적인 헤지펀드가 도입되는 방안이 추진되면서 이런 오해는 많이 풀리고 있다. 투기 세력이기 때문에 헤지펀드를 배척해야 한다는 기존 태도보다는 우리도 헤지펀드 기법을 적극 도입해 자산증식과 자산관리에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수요에 부응해 자산운용사뿐 아니라 증권사들도 외국 헤지펀드와 전략적 제휴를 맺거나 전담 부서를 신설하는 등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금융당국도 올해 하반기 관련법이나 규정을 정비해 국내 금융업체들이 적극적으로 헤지펀드를 운용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이르면 올해 말부터 헤지펀드 열풍이 불어 올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여전히 헤지펀드의 본질이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일반 투자자는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국내 증권가는 물론 자산운용사들도 헤지펀드를 직접 운용할 만큼 실력을 갖춘 곳은 거의 없다.
헤지펀드는 기본적으로 사모펀드 영역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사모펀드는 보유 자산이 많은 투자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수단이다. 이런 측면에서 헤지펀드도 마찬가지다. 소액으로 돈을 불리려는 일반 개인 투자자에게는 사실상 무용지물(無用之物)일 뿐이다.
헤지펀드에는 기관이나 법인이 주로 투자하고 개인들은 일정 자산 규모를 갖춘 적격 투자자만 참여할 수 있다. 그만큼 문턱이 높다는 얘기다. 금융당국은 헤지펀드 법을 정비하면서 개인의 적격 투자 요건의 수위를 어떻게 결정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준을 너무 낮추면 헤지펀드 투자로 손실을 볼 투자자들이 양산될 위험이 있고 수위를 높이면 도입 초기부터 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적격 투자자 요건이 너무 까다로우면 부자들만 헤지펀드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투자 자격에 가이드라인을 두는 등 일정 규제가 있기는 하지만 헤지펀드는 공모펀드와 비교해 운용이 자유롭다. 때문에 어떻게 운용하든 그 결과는 전적으로 투자자가 책임져야 한다. 또 공모펀드와 달리 돈을 빌려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물론 차입(레버리지) 규모를 무한정 늘릴 수는 없다. 그러나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원금 이상의 손실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공모펀드보다 훨씬 리스크를 크게 한다. 심지어 헤지펀드는 투자자들에게 운용 내역을 성실하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투명성이 공모펀드보다 많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헤지펀드에 내포된 다양한 장점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
그럼에도 헤지펀드는 투자자 입장에서나 자본시장 발전 측면에서 적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투자자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운용을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거나 시장의 흐름과 관계없이 절대수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들이 헤지펀드 비중을 점차 늘리고 있는 것도 이런 특징 때문이다. 서정두 한국투자신탁운용 글로벌운용본부장은 “연기금 등 각국 기관들은 헤지펀드가 다른 투자 수단에 비해 쉽게 운용 목표를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이런 인식이 확산되면서 헤지펀드 시장에서 기관투자자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국내 기관투자가들도 외국 헤지펀드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정사업본부와 교직원공제회를 시작으로 수천 억원대의 헤지펀드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투자자뿐 아니라 자본시장 전체 발전을 위해서도 헤지펀드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헤지펀드는 다양한 방식으로 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투자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예를 들어 헤지펀드는 기술력이나 잠재력이 뛰어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 벤처기업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다. 기존 자본시장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투자 수요를 끌어들여 시장의 파이(규모)를 키운다는 점도 헤지펀드의 긍정적인 기능에 속한다. 헤지펀드는 또 중소 운용사나 자문사에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한다. 비교적 자유롭게 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스타 펀드매니저가 탄생한다. 헤지펀드 도입은 이런 운용 전문가를 육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헤지펀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금융시스템을 교란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헤지펀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속성 때문에 일부 헤지펀드는 무분별한 투자 행위를 한다. 특히 헤지펀드의 공격적인 공매도는 시장의 변동성을 높여 일반 투자자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이와 함께 원금 이상을 투자할 수 있는 점을 활용해 과도한 레버리지를 일으키다가 큰 손실을 보면 해당 헤지펀드뿐 아니라 대형 금융기관의 파산을 불러올 위험도 생긴다.
지난해 11월11일 장 마감을 앞두고 2조5000억원 가량의 프로그램 매도 폭탄이 터졌을 때도 배후에 헤지펀드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금융당국 조사 결과 범인은 도이치증권으로 밝혀졌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거래가 나올 때마다 헤지펀드는 의심을 받는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통상 헤지펀드가 현물과 파생상품과 연계한 거래를 많이 하기 때문에 금융시스템을 교란하는 사건만 발생하면 의심을 받는 것”이라며 “과거 각종 금융 사건에 많은 헤지펀드들이 연관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독 헤지펀드를 금융시스템 교란자로 지목하는 것은 헤지펀드의 폐쇄적인 속성과 더불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큰 수익을 올리는 기술을 시기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배후에 헤지펀드의 무분별한 투자행위가 있었다는 전제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은 헤지펀드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에 나섰다. 미국은 지난해 7월 포괄적 금융개혁법인 토드-프랭크 법을 근거로 헤지펀드를 옥죄기 시작했다. 작년 말에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내부자거래 수사 과정에서 헤지펀드 업체 3곳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기도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다이아몬드백 캐피털 매니지먼트와 레벨 글로벌 인베스터스, 로크 캐피털 매니지먼트 등은 각각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운영하는 헤지펀드들이다. 유럽연합(EU)의 유럽증권시장청(ESMA)도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헤지펀드시장 지속적 성장
전 세계 차원에서 단행되고 있는 규제 강화에도 글로벌 헤지펀드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선진국에서 투자활동을 하던 헤지펀드들이 신흥시장으로 움직이면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계기로 선진국들이 규제를 강화하자 신흥시장을 적극 공략하는 방향으로 주요 헤지펀드들이 전략을 바꾸고 있다는 얘기다.
신흥시장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제 성장 속도가 빠른 아시아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소로스펀드를 비롯해 무어 캐피털과 바이킹 글로벌 인베스터스, 맨그룹 산하 GlG 파트너스 등 대형 헤지펀드들은 지난해 아시아에 새로 거점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헤지펀드의 아시아 투자 비중도 큰 폭으로 늘고 있다. 헤지펀드 전문 조사기관인 헤지펀드리서치(HFR)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헤지펀드 자금 1조9000억 달러가 넘어섰다. 이중 7~10%가 아시아시장에 투자됐을 것으로 HFR는 추정하고 있다.
헤지펀드는 1966년 <포춘> 기사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차입 투자와 공매도 같은 헤지펀드 투자 기법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주식 외에 대체투자시장이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부터 헤지펀드 시장이 성장했지만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때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사건이 터지면서 잠시 주춤했다. 금융시장의 충격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2000년대부터 헤지펀드는 본격적인 팽창의 시대를 맞는다. 2000년 4900억 달러 수준이었던 헤지펀드 자산은 2005년까지 연평균 1000억 달러 이상 증가하면서 1조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2006년과 2007년에는 더 많은 자금이 헤지펀드로 유입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에는 1조8600억 달러를 넘어섰다. 금융위기 직후 1조4000억 달러로 규모가 급감했지만 2009년과 2010년 다시 순유입세로 전환하면서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여러 개의 헤지펀드를 담은 헤지 오프 헤지펀드(재 간접 펀드)를 포함한 헤지펀드 수도 2007년 1만 개를 돌파했다가 금융위기 이후 크게 감소했지만 다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HFR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헤지펀드 수는 9237개로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단독 헤지펀드는 작년에만 300개 가까이 새로 생겼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헤지펀드의 절대금액 비중은 3~5%에 그친다. 하지만 활발하게 거래하고 있기 때문에 뉴욕과 런던 등 주요 선진국 증시 매매 물량의 40%, 투자 차입금의 50%, 외환 거래량의 10% 이상을 차지할 만큼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헤지펀드의 역할은 크다.
선진국 시장의 침체에도 헤지펀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앞서 지적했듯 신흥국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지펀드 컨설팅 업체인 유레카헤지에 따르면 아시아에 투자된 펀드 자금은 2009년 1000억 달러를 넘었으며 올해는 18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중 10~20%가 한국 주식이나 채권, 파생상품시장 등으로 흘러들어 올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매월 집계하는 외국인 자금 규모가 400조~500조원 규모라는 점을 감안할 때 50조원 가량을 헤지펀드 자금으로 볼 수 있다.
국내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헤지펀드가 핫머니로 변질돼 금융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지만 자산가에게 다양한 투자 수단을 제공하고 자본시장 규모를 확충하는 데 기여하는 장점이 있다”며 “헤지펀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도입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금융당국과 업계가 협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헤지펀드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오해
‘헤지’ 수단만큼이나 헤지펀드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골드만삭스는 포괄적으로 헤지펀드를 규정한다. 즉 “일정 정도의 위험과 수익률을 목표로 정해 그것에 적합한 투자전략을 구사하며 대체로 시장 방향성과 관계없이 절대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헤지펀드”라고 정의했다. 규제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곳도 있다. 미시간대는 “차입(레버리지)이 자유롭고 규제 당국의 감독을 받지 않는 사모펀드”라고 말한다.
이밖에 ‘소수의 부유한 투자자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높은 수익을 얻는 수단’, ‘투기적인 기회를 찾아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포트폴리오’, ‘레버리지, 공매도, 파생상품 사용에 제약이 없고 접근이 일부 투자자에게만 제한된 파트너십 또는 유한회사 형태의 사모펀드’ 등 많은 전문기관들이 헤지펀드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헤지펀드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다. ‘헤지’라는 말에 현혹돼 헤지펀드는 무조건 위험을 회피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고수익을 추구하는 일부 헤지펀드는 의도적으로 헤지를 하지 않는다. 또 헤지펀드라고 모두 유능한 펀드매니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손실을 보는 헤지펀드 매니저가 더 많다. 규제 문제도 그렇다. 헤지펀드도 투자상품인 만큼 규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헤지펀드가 위험한 곳에 투자한다는 선입견도 선입견일 뿐이다. 헤지펀드는 성과 보수가 비싼 편이지만 수수료나 보수 체계가 복잡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