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31일 중국 장쑤성 난징시에서 개최된 국제통화 개혁에 관한 G20 회의에서 국제통화제도의 개혁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날 회의에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가운데) 등이 참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소위 양적완화 정책에 따른 달러 가치 하락으로 현재의 달러중심 국제통화제도(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IMS)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사실 IMS 개편 움직임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누증 등으로 미 달러화 가치가 불안해질 때마다 수면 위로 부상해온 해묵은 문제다.
최근의 논쟁은 2009년 3월 저우샤오찬 중국인민은행 총재가 특정국가(현재의 미국)의 통화가 아닌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 SDR)을 초국가적 준비통화(super-sovereign reserve currency)로 채택하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됐으나 당시 추가적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미국이 약달러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전 세계적인 환율분쟁이 발생했다. 중국, 브라질 등 신흥시장국을 중심으로 이번 기회에 달러 중심 IMS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중국인민은행 총재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고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해 가을 G20 서울정상회담 직전 위안화를 포함한 5개국 통화를 포괄하는 국제통화를 만들어 금 가격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새로운 IMS를 제의하기도 했다. G20 서울정상회담에서는 중국, 브라질, 프랑스 등이 새로운 IMS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중국 후진타오 주석은 금년 1월 중순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현재의 IMS를 “과거의 산물(product of the past)”이라고 언급해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기축통화는 제1의 국제통화
기축통화란 글로벌 차원의 통화 기능을 수행하는 제1의 국제통화를 의미한다. 국제통화의 지위를 결정하는 주요 요건으로는 신뢰성(confidence), 유동성(liquidity), 거래망(transactional network)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현재 국제통화로는 달러 외에 유로화 및 엔화 정도가 있는데 이중에서도 달러가 단연 제1의 국제통화이고 유일한 기축통화이기도 하다.
국제통화와 기축통화는 종종 국제언어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영어·스페인어·불어·중국어 등을 국제통화로, 이중 가장 널리 통용되는 영어를 기축통화로 비유할 수 있다. ‘미국 달러와 자유시장 메커니즘’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IMS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최근 제기되고 있는 개편 논의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IMS는 브레튼우즈 시스템 붕괴 이후 시장의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지탱되는 것으로서 국가 간 조약이나 협약이 뒷받침되지 않아 문제점 해결을 위한 노력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IMS 체제의 태생적 문제점은 트리핀의 딜레마, 과도한 특권, 조정시스템의 부재, 과도한 외환보유액 확충 유인 등이 주로 지적되고 있다.
문제점1 : 트리핀의 딜레마
먼저 1947년 현재의 IMS가 출범할 당시 벨기에의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제기한 소위 ‘트리핀의 딜레마’를 보자.
기축통화국은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통화를 전 세계에 공급해야 하나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해당국(미국) 경제의 대외부채 확대로 통화의 신뢰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유동성을 확대하자니 신뢰성이 떨어지는 딜레마에 봉착하는 것이다. 반면 기축통화국이 대외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면 통화 공급이 줄어들어 세계적으로 교역이 위축되고 디플레이션 위험이 증대된다.
즉 트리핀의 딜레마는 특정국(예: 미국)이 기축통화국의 역할을 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현재의 IMS에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경상수지 누적 적자 규모가 급증하고 이로 인해 2000년 들어 미 달러화 가치의 급락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다수의 전문가들은 현행 IMS가 이미 ‘신뢰성 한계(credibility threshold)’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문제점2 : 기축통화국만 누릴 수 있는 과도한 특권에 대한 불만
기축통화국은 화폐를 제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액면가치 간의 차익을 나타내는 시뇨리지, 저금리 차입 등 ‘과도한 특권’을 독점적으로 누린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 얻는 글로벌 시뇨리지에 힘입어 민간소비를 연평균 0.6%포인트씩 높일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 및 교역 규모에 비해 이러한 특권이 너무 크다는 것이 교역국들의 불만이다.
미국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이고 교역 비중도 11%에 불과한 데 비해 전 세계 외환거래의 85%가 달러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미 달러의 영향이 과도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문제점3 : 글로벌 불균형 극복을 위한 조정 시스템의 부재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의 IMS는 실질적으로 시스템이 아니므로(non-system) 기축통화의 신뢰성이 크게 저하되더라도 이를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미국은 경기 활성화 등을 위해서라도 대외불균형(경상수지 적자)을 시정하려고 하지만 수지 흑자국은 이를 조정할 유인이 별로 없어 환율분쟁이 수시로 발생한다.
IMS 개혁 필요성에 공감하는 대부분 학자들은 불균형 조정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 간 조약’이 IMS의 핵심요소 중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G20 서울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경상수지흑자/GDP’ 비율의 예시적 가이드라인 설정이 IMS에 불균형 조정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으나 G20 체제하에서는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제점4 : 과도한 외환보유액 확충 유인에 따른 부작용
자유시장 메커니즘을 토대로 하는 현 IMS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이는 주로 신흥시장국의 외환위기 원인으로 작용했다. 신흥시장국들은 불규칙한 자본유출입에 따른 외환위기 발생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확충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세계 전체의 외환보유액은 1995년 1조3000억 달러(세계 GDP 대비 5%)에서 2009년 8조4000억 달러(세계 GDP 대비 14%)로 급증했는데 이 가운데 3분의 2를 신흥시장국이 보유하고 있다. 과다한 외환보유액은 해당국의 통화관리에 적지 않은 부담을 줄 뿐 아니라 대부분 외환보유액이 미 국채에 다시 투자되면서 미국의 장기금리 하락, 자산가격 거품 발생 등 부작용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문제점투성이인 현재 IMS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미 달러화의 기축통화시대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IMS 변경 논의는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 그만큼 IMS의 대안도 다양하게 제시됐다. 그렇지만 기대효과나 실행 가능성 측면에서 다음 두 가지 방안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안1:실질적 복수기축통화
유로화나 위안화가 달러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하는 방안이다. 실질적 복수기축통화체제가 자리 잡으려면 유력한 국제통화 후보인 유로화와 위안화가 국제교역, 금융거래 등에서 상당한 역할을 함으로써 달러화의 비중이 자연스럽게 낮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후보통화가 기축통화로서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이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먼저 유로화는 일부 회원국의 재정 위기로 유럽통화연맹(EMU)체제 자체의 지속성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거래 확대의 필수조건인 신뢰성을 당분간 확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위안화의 경우 중국의 경제 규모가 크게 확대되고 있으나 중국 정부가 금융자유화 및 국제화에 여전히 소극적이어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위안화 결제권 이외 지역으로 사용 범위를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실질적인 복수기축통화체제가 정착될 경우 이득(시뇨리지 발생)과 비용(대외불균형 감수)이 어느 한 국가에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기 때문에 IMS가 더욱 안정적이 될 수는 있으나 이는 국가 간 협약이 아닌 각국의 금융국제화 추진 의지, 시장의 선택 등에 의존하고 있어 정착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안2:IMS의 제도화(초국적 기축통화의 창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와 같이 국가 간 협약(multilateral agreement)에 의해 바람직한 IMS를 재창출하는 방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의되는 주요 사안으로는 초국적 기축통화의 창출, 국제자본 이동과 규제의 표준화, 대외불균형 조정의 강제성 부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은 특정 국가의 통화가 아닌 인위적 통화를 만들어 이를 기축통화로 사용하자는 것인데 현재의 IMF SDR(특별인출권)과 과거 케인즈가 주장했던 방코르(Bancor) 등이 그 예다.
초국적 기축통화는 현 IMS의 문제점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표 참조). 그러나 초국적 기축통화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첫째, 초국적 기축통화 표시 금융시장의 육성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통화가 기축통화로 정착되려면 금융상품의 표시통화로 광범위하게 활용돼야 하는데 새로운 금융시장이 발전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관련국 간 이해관계도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다. 2009년 중국이 제기했던 SDR 기축통화론이 추진동력을 얻지 못했던 것도 SDR표시 금융시장 창설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둘째, 초국적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세계중앙은행’의 창설이 불가피한데 각국의 이해가 얽혀 실현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SDR의 발행 주체인 IMF로 하여금 세계중앙은행 역할을 담당하게 하거나 새로운 기구를 설립해야 하는데 지배구조를 둘러싼 각국 간 대립 가능성, 각국이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는 문제 등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또 세계중앙은행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세계정부’의 개념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다. 미국 버클리대학의 아이켄그린 교수가 “하나의 글로벌 정부가 없으면 글로벌 중앙은행도 없으며 결론적으로 글로벌 통화(초국적 통화)도 없다”고 한 것은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셋째, IMS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IMS는 대공황, 전쟁 등 극심한 외생적 충격이 발생한 후에야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심각한 외생적 충격임에는 틀림없으나 IMS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쉽게 이끌어낼 만큼 강한 충격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상황이다.
달러 역할 지속되면서 신흥국 위상 확대 반영 예상
달러 이후 기축통화 후보로 주목받는 중국 위안화
IMF는 IMS의 두 가지 대안이 달러 중심의 현 시스템보다 공정성(과도한 특권 제거 및 선진국으로의 자본 집중) 및 안정성(환율변동성 및 글로벌 불균형 조정) 면에서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실행 용이성과 정치적 선택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다양한 이점에도 현실적 대안이 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IMS 개편에 관해서는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이루어지겠지만 상당 기간 현재와 같은 ‘달러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시장 메커니즘 중심’ 체제가 유지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다만 현 시스템이 갖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들은 지속적인 논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즉 경상수지/GDP 비율의 예시적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보장 장치 마련(트리핀의 딜레마 완화), 위안화의 국제화 추진 및 EMU체제의 공고화 노력(과도한 특권의 완화),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을 위한 노력 지속(신흥국의 외환보유액 축적 필요성 완화) 등을 들 수 있다. 지난 4월14일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는 SDR 구성 다변화에 관한 논의를 지속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IMS에서 신흥시장국의 위상은 현재보다 확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