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입니다. 호외 받아 가세요.”
지난 10월 8일 도쿄 신바시역 앞 광장. 요미우리신문이 발행한 호외를 손에 쥔 50대 남성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벨상 기타가와 씨’라고 검은 띠로 인쇄된 제목의 기사를 읽던 그는 “일본인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10월 초부터 발표되는 노벨상 주간에서 6일 사카구치 시몬 오사카대 특임교수(74)가 면역 반응을 억제하는 ‘조절T세포’의 존재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어 8일에는 기타가와 스스무 교토대 특별교수(74)가 ‘금속-유기 골격체’(Metal-Organic Frameworks·MOF)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발표됐다.
일본에서는 두 명의 과학자가 연달아 노벨상을 받으면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일본이 한 해 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2015년 이후 10년만이다.
노벨상 소식을 전한 야후재팬의 기사 댓글에는 ‘고물가로 고통받는 일본인들에게 큰 희망을 줬다’ ‘어린 아들의 장래희망이 과학자로 바뀌었다’ ‘끈기 있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무한한 경의를 느낀다’ 등 칭찬 일색의 글들이 올라왔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도 일본 학자가 연이어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데 대해 “독창적 발상에 의한 진리의 발견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아 자랑스럽다”며 “우리나라(일본) 연구력의 탁월함이 평가받은 것이 국민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도 일본 학자가 연이어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데 대해 “독창적 발상에 의한 진리의 발견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아 자랑스럽다”며 “우리나라(일본) 연구력의 탁월함이 평가받은 것이 국민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기타가와 스스무 일본 교토대 교수는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인 노벨상 수상 후보자는 아직 많이 있다”고 희망 섞인 발언을 했다.
그는 “최근 일본인 과학자의 논문 인용수가 줄어드는 등 다양한 지표에서 연구력 저하가 우려되고 있지만 중요한 기초 연구를 하는 일본인 과학자 수는 여전히 많다”며 “유능한 연구자를 키우기 위한 노하우는 일본에서도 잘 작동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주류 언론도 일본인 노벨 과학상 수상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독창적인 분야에 대해 지적 호기심을 갖고 끈기 있게 추적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본의 과학 사랑 연구 문화가 작동했다는 분석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인 2명의 노벨상 연구는 독창적이어서 초기에는 비판받기도 했다”며 “과학의 세계는 단기간에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 많고 나중에 응용할 곳이 발견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올해 수상자 2명을 포함해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은 모두 30명이다.
그중 3명은 국적을 미국으로 바꿨지만 일본에서 출생해 일본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다.
이들과 별개로 원폭 피해자 단체인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지난해 개인이 아닌 단체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분야별로 보면 물리학상 12명, 화학상 9명, 생리의학상 6명으로 나뉜다. 총 27명 중 2000년 이후 수상자가 22명에 달한다. 최근에는 연평균 1명꼴로 수상자를 배출한 셈이다.
닛케이는 “2000년 이후 일본 과학자 수상이 지속되는 양산 시대에 들어갔다”며 21세기 이후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미국 다음으로 많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21세기에 일본 과학자의 노벨상 수상이 급증한 이유와 관련해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은 과학기술을 재건의 기둥으로 삼았다”며 “일본 수상자는 평균 40세 전후에 성과를 내고 20∼30년 후에 상을 받았다”고 짚었다. 일본이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자리잡았던 1970∼1990년대에 축적된 기초과학 연구 성과가 뒤늦게 빛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노벨 과학상 수상 비결로는 상업성과 관계없이 하나의 우물을 끈기 있게 파는 것을 꼽을 수 있다.
1958년 일본이 기후현 폐광 가미오카에 중성미자 관측장치인 ‘가미오칸데’ 구축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산업계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패전 후 일본 경제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일본 정부와 기업은 거금을 들여 장비를 건설했다.
약 30년이 흐른 1987년 연구를 이끈 고시바 마사토시 도쿄대 교수는 중성미자 관측에 성공했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제자인 가지타 다카아키 도쿄대 교수는 1990년대 가미오칸데보다 성능이 뛰어난 ‘슈퍼 가미오칸데’를 설계했다.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던 시기였는데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또 한 번 당시 돈으로 1000억원을 쏟아부었다. 슈퍼 가미오칸데는 1998년 중성미자에 질량이 있음을 밝혀냈고 이는 2015년 일본에게 또 한 번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줬다.
이러한 연구의 중심이 되는 곳은 1917년 설립돼 ‘일본 노벨상의 산실’로 불리는 기초과학연구소 ‘리켄(RIKEN·理硏)’이다. 리켄은 수십 년에 걸친 장기 투자로 탄탄한 기초과학 연구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30년 후에나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연구들이 상당수 진행되고 있다.
‘남들 다 하는 연구는 하지 말라’는 일본 학계의 분위기도 중요한 요소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연구를 진득하게 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해 주는 것이다.
특히 150년 전 창립할 때부터 ‘자유’를 학풍으로 삼아온 교토대의 학풍도 무시 못 한다.
노벨 과학상의 3분의 2를 교토대 출신이 해냈다. 이번에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 두 명도 모두 교토대 출신이다.
김형도 교토대 공학연구과 고분자화학전공 교수는 “한국에서 연구실을 운영하려면 교수가 대학원생에게 적절한 인건비를 줘야 하는데, 돈이 안 되는 연구를 할 경우 연구실 운영비도 마련하기 힘들다”며 “이 때문에 기업 등으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실용 연구에 매달리게 되고, 기초 연구는 자연스럽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연구실 운영에 인건비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지원은 정부가 하기 때문. 적절한 자격을 갖춘 박사과정 학생의 경우 문부과학성으로부터 연간 최대 290만엔(약 27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국연구재단과 유사한 일본학술진흥회(JSPS)에서도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며 “채택이 되면 월 20만엔, 연구비는 1년에 1000만엔을 받을 수 있는데 채택률이 20~25%에 달하고 매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상위권 대학의 이공계 학과 학생의 경우 석사 진학률이 90%에 달할 정도로 학문 열기도 뜨겁다.
일본은 학사 과정이 대부분 3학년 때 끝나기 때문에 석사 진학생들은 4학년 때부터 연구실에서 공동 연구에 참여한다. 석사 과정 2년을 포함해 3년을 함께 하기 때문에 석사 과정 학생의 연구 성과도 높다는 분석이다.
김 교수는 “기업에서도 중앙연구소를 두고 우수한 학생을 뽑아 인재로 키운다”며 “교토의 실험기기 제작회사인 시마즈제작소에 근무하던 다나카 고이치 주임연구원이 2002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것은 이런 이유”라고 강조했다.
다만 최근 일본 내 연구 환경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젊은 연구자가 감소하고 유력 논문 수도 늘지 않고 있다.
문부과학성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21∼20 23년 발표된 인용 횟수 상위 10% 자연과학논문 순위에서 일본은 역대 최저인 13위에 그쳤다.
1위는 중국, 2위는 미국이었고 한국은 9위였다.
도쿄신문은 일본 정부가 재원 부족 등을 이유로 국립대에 주는 운영비 교부금을 삭감하고 특정 분야에 재원을 많이 배분하는 ‘선택과 집중’ 정책을 추진하면서 좋은 연구가 나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의식한 듯 사카구치 시몬 오사카대 명예교수는 지난 6일 노벨상 수상자 발표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며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비슷한 독일과 비교하면 면역 분야에서 일본 연구자금은 3분의 1 수준”이라며 정부의 지원을 촉구했다.
기타가와 교수도 “새로운 연구자 육성을 위해 연구 시간을 어떻게든 확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세계 학계를 보면 실험의 데이터 분석 등으로 연구자를 지원하는 인력이 충실한 연구기관이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며 “기초연구에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에 더해 연구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한 시라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승훈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