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농심 본사는 과거 벽돌공장 자리였다. 주변에는 돼지나 닭을 치던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약 1만 평 규모의 부지를 당시 평당 1000원 정도에 구입했다. 율촌은 이곳에 향료와 TV 조립공장을 세우려고 했다. 향료는 검토 단계에서 폐기됐고 TV 조립공장은 꽤 진도가 나갔다. 그럴 만도 한 게 민영방송인 TBS가 TV 개국을 준비하고 있었던 만큼 머지않아 TV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KBS가, 그것도 서울 지역에만 방송이 되고 있던 터였다. 협력사는 일본의 마쓰시다 전기. 그런데 마쓰시다 관계자가 부지를 둘러보고는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 부지가 좁았다. 율촌은 새 입지를 마련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사업은 유야무야 됐다. 율촌이 그다음에 손댄 사업은 시계 조립. 제법 진척이 있었다. 일본 시티즌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상공부의 사업 승인까지 받았다. 공장도 지었는데 이번엔 외환 사정이 발목을 잡았다. 시계는 정밀기계라 현미경이나 측정, 검사 장비가 등이 필요한데 이를 들여올 외화가 없었다. 17만달러가 필요했는데 신용장을 개설할 수가 없었다.
사업에 대한 이 정도의 좌절은 율촌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청년 때부터 장사에 눈을 떴다. 6·25 전란 때 부산에 피란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틈만 나면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때 손댄 사업이 쌀장사였다. 전시에 장마당은 자고 나면 물건값이 오르다시피 해 좋은 물건만 제때 확보하면 이문을 남기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사람도 많이 모여들고 하니 쌀장사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부산은 대한민국의 최대 도시였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은 1023일간 임시수도가 된다.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폭탄은 피했지만 난리통까지 벗어나진 못했다. 거의 매일 같이 새벽 5시만 되면 부산역은 열차 편으로 도착하는 피란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부산은 해방 직후 해외동포들이 밀려들면서 인구 폭발을 경험한다. 그래봐야 28만 명 정도였는데 전쟁 막바지에 부산은 인구 100만 명의 도시가 된다. 미군 기름종이와 양철 조각으로 비만 가릴 정도의 지붕을 얹은 판자촌들이 공동묘지에 까지 빼곡히 들어섰다. 작은 부주의는 화재로 이어져 당시 부산은 불산이라 불렸다. 불산이라는 부산에서 일어난 대화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족히 3건은 된다. 1953년 11월 27일 저녁 영주동 판자촌에서 발생한 화재. 시속 11.8㎞의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주택 3132채 소실. 이재민만 3만 명에 달했다. 이듬해 용두산 공원 판자촌에서 또 화재가 발생해 200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일어난 국제시장 화재. 1953년 1월 30일, 율촌이 동아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는 불이 나던 날 밤 시골에서 올라온 부친과 함께 잠을 자다가 변을 당했다. 가재도구 하나 챙기지 못하고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장사는 둘째치고 살던 집도 건사하지 못했다.
율촌의 삶과 철학을 담은 자서전 <농심으로 이루리라>에 따르면 사실 당시 쌀장사는 불도 불이지만 ‘관리’의 실패였다. 가을 추수기에 달구지 세 대 분량의 쌀을 사서 빈방에 쌓아두고 봄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닌 게 아니라 겨울이 지나자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때다 하고 물건을 풀려고 하니 웬걸 쌀가마니에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쌀알에 퍼렇게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막 도정해 마르지 않은 쌀을 통풍도 안 되는 방에 쌓아둬 생긴 참사였다.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실패를 경험한 그로서는 실패할 때마다 좌절하기보다는 거기서 교훈을 얻으려고 했다. 오히려 실패의 경험이 안목을 넓혀주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는 데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러고 시작한 사업이 라면이었다. 그의 나이 70 정도인 2000년 언저리에 기업사 전문 작가 김주성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벌이면서도 종래 결실을 못 보곤 했던 것이 라면과 인연을 맺으려고 그랬나봅니다.”
그래서 그 1만여 평 대방동 부지에 라면 공장을 세우게 된다. 그게 1965년이었다. 공장 건물은 이미 시계 조립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어놓았기 때문에 설비만 들여오면 됐다. 제면기, 스프 제조 설비, 포장기 등이 주요 설비였는데 제면기와 스프 봉지 접착기만 일본 우에다 철공소에 주문을 냈고, 나머지는 자체 제작하거나 국산을 사용했다. 드디어 하루 50개 들이 1344박스의 라면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공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세월은 흘러 큰 형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롯데라는 회사명을 ‘농심’으로 바꿨다. 20년 지나서였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러 창립 30주년이 되던 해 율촌은 본사 이전을 단행한다. “우리 농심 식구들이 앞으로 30년 더, 그리고 100년의 여정을 함께할 보금자리를 만들자”면서. 그런데 시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산구 서계동에 있던 본사를 옮긴 자리가 바로 대방동 공장 터였다. 율촌은 농심이 태어난 뿌리에서 미래를 설계하고자 한 것이다. 대신 건물은 중앙 공간을 비운 신개념의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만들었다. 3동의 건물이 각각 거리를 두고 자리 잡고 중간에 정원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여유를 두었다. 이 건물 1층에 지난 30년간 농심이 걸어온 발자취를 담은 기록물과 사진 등을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현관에 들어가면 안내를 하는 자리에 농심의 철학이 담긴 ‘개물성무(開物成務)’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그 옆으로 들어가면 전시관이 있다. 메인 로비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농심의 역사. 총 5편이다. 창업과 성장 기반을 구축한 1965~1977년. 롯데라면과 새우깡이 나온 시기. 이어 ‘정상을 향해 나아가다’라는 주제의 1978~1989년. 농심으로의 사명 변경과 안성 스프공장 건설, 그리고 히트상품 출시의 시기. 세 번째 코너는 ‘도약의 나래를 펴다’라는 1990~1999년. 농심이 그룹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시장을 개척한 시기. 그리고 네 번째 2000년 이후의 ‘세계로 미래로’. 농심 아메리카 설립, 백산수 공장 건설, 스마트팜 기술 개발 등을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 오늘의 농심이 있다. 그룹 계열사를 일괄할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사진 갤러리와 율촌의 어록이 새겨진 벽면을 지나 짧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투어를 마치게 된다.
솔직히 나는 이 모든 것보다 전시관의 이름에 놀랐다. 농심의 정신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명칭, 역사관도 아니고 기념관도 아닌 바로 ‘창조관’. 그 창조라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농심의 철학 개물성무와 맞닿아 있다. 성무(成務)는 일을 이룬다는 뜻이고 그 앞의 개물(開物)은 사물을 연다는 뜻인데 이게 바로 창조다. 율촌은 개물성무의 철학, 창조의 정신을 1981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풀었다.
“남을 따라 하기만 하면 남보다 잘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이치요,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교과서대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을 따라 하기보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스스로 부딪혀서 연구하는 게 산지식을 얻는 지름길이다. 이런 아픔을 감수해야만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남 따라 하는 건 껍데기만 갖는 것”이라는 율촌의 일갈. 라면의 후발 주자인데도 새로운 시도를 통해 시장을 열고 오히려 선발 업체가 뒤따라오게 만들었다. 가업을 승계한 신 회장은 선친을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님 말씀 중 나에게 가장 뼈저리게 와닿는 것은 ‘계산쟁이는 굶어 죽는다’는 말입니다. 장차 이익이 날 것으로 예상되는 일을 추진할 때 계산쟁이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해 수치계산에 빠지고 만다. 원래 계산이란 일어난 결과에 대해서조차 정확한 답을 구하기 어려운 법인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정확한 손익을 가늠하겠다고 매달린다. 그러다 보면 답도 얻기 전에 옆에 와 있던 기회는 달아나고 빈손이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돈을 벌려면 새로운 설비와 제품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아버님입니다.”
계산쟁이였다면 안성의 스프공장은 없었을 것이고, 안성탕면과 신라면의 신화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현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