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이 많을수록 고민은 단순해진다. “어디에 두면 안전할까?”“어떻게 지켜낼까?”고액자산가에게 자산관리란 단순한 수익률 경쟁이 아니라, 보존과 익명성, 그리고 이동성의 문제다.
이들은 세금을 합법적으로 최소화하면서도, 자산이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한다. 그래서 신탁(Trust), 제2국적 취득, 역외 법인 같은 구조는 그들에게 익숙한 전략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전통적인 루트에 전혀 다른 문법의 자산이 등장했다. 바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나 원화 등 법정화폐의 가치를 1대1로 연동한 디지털 자산이다. 가격이 크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자산가들에게는 일종의 ‘디지털 현금’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자산가가 미화 100만달러를 싱가포르로 옮긴다고 가정하자. 과거였다면 세무보고, 외환신고, 은행심사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하면 단 몇 분 만에 거래가 끝난다. 거래 기록은 블록체인에 남지만, 그 안에 적힌 건 단지 ‘지갑 주소’일 뿐이다.
누가 보냈고, 왜 보냈는지를 알 수 없다. 완전히 투명한 장부 위에서, 철저히 익명으로 움직이는 구조다. 이 이중성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의 매력이며, 동시에 각국 규제 기관이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대부분의 자산가들은 불법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자금세탁이 아니라, 자산이동의 효율화다. 문제는 그 효율이 너무 뛰어나다는 점이다. 국경 간 송금이 10분만에 가능하고, 수수료는 기존의 1/50 수준에 불과하다. 이를 ‘혁신’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규제의 사각지대’라 부를 수도 있다.
일부 자산가들은 이 구조를 활용해 세금이 높은 국가에서 낮은 세율의 국가로 자금을 옮기거나, ‘기부금 명목’으로 자기 재단에 이전하기도 한다. 현행 법체계로는 이를 명확히 불법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아직 입법이 완비되지 않아, 합법과 위법의 경계가 흐릿한 중간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산의 이동은 제도권의 감시망 밖에서 이루어지며, 겉으로는 투명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흔적을 최소화한 형태로 남는다. 조세회피와 자금세탁의 경계는 언제나 얇고, 기술은 그 경계를 더욱 희미하게 만든다.
스위스의 한 프라이빗뱅커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자산가들이 항공편으로 금괴를 옮겼다면, 이제는 지갑 주소만 바꾸면 된다.”
스테이블코인은 자산의 물리적 이동을 ‘정보의 이동’으로 바꿔 놓았다.두바이, 싱가포르, 홍콩 등 금융 허브에는 이미 스테이블코인을 기반으로 자산을 관리하는 패밀리 오피스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들은 이를 이용해 미술품을 구입하고, 해외 부동산 계약금을 송금하며, 비상장 기업 투자까지 진행한다. 구입과 투자는 합법이지만, 그 자금의 출처와 목적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스테이블코인을 ‘신종 고위험 자산’으로 지정한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스테이블코인이 위험한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투명하고 합법적으로 활용한다면, 자산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블록체인 기반 자산은 24시간 전 세계 어디서나 거래할 수 있고, 외환통제나 송금제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자산을 직접 지갑에서 관리하므로 계좌 동결의 위험도 적다. 게다가 일부 스테이블코인은 단기금리나 채권 수익에 연동되어 소액의 이자수익까지 기대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쓰느냐’다. 스테이블코인을 조세회피의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글로벌 자산운용의 효율적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자산이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에, 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보다 준법적 사고와 투명한 구조 설계다.
스테이블코인의 생태계가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신뢰가 필수적이다.첫째, 발행사의 준비금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투명한 증명.둘째, 이용자의 신원을 최소한 확인하는 KYC(Know Your Customer, 고객확인제도).셋째, 한국과 해외의 규제기관 간 정보가 연결되는 국제적 협력 구조다.이 세 가지가 지켜질 때, 스테이블코인은 ‘위험한 그림자 자산’이 아니라 ‘신뢰 가능한 새로운 통화’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세상의 부는 조용히 움직인다. 과거에는 금괴와 채권이 배와 비행기를 탔지만, 이제는 블록체인을 타고 흐른다.기록은 완벽하게 남지만,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그 속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자산가들에게 새로운 이동의 자유를, 그리고 규제기관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투명하게 감시되지만,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산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제 부의 이동이 바뀌었으니, 부를 관리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진정한 자산가의 품격은 돈을 숨기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를 잃지 않는 방식으로 돈을 움직이는 지혜에 달려 있다. 앞으로의 시대는 자산을 얼마나 불렸는가보다, 얼마나 투명하게 운영했는가를 평가받게 될 것이다. 기술이 자산의 이동 속도를 바꿔 놓았다면, 신뢰는 그 흐름의 방향을 결정짓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스테이블코인은 부를 지키는 새로운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투명성을 입증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부여한다. 진정한 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질서 위에서 지속 가능하게 유지되는 힘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정지열 한양대 교수
한국자금세탁방지연구소 소장이자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자금세탁방지(AML)와 금융범죄예방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학문적 연구와 함께 금융당국, 국제기구, 민간 금융기관 등에 자문을 하며 제도 개선과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