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요 기업들이 인도를 새로운 성장 축으로 삼고 현지화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LG전자는 인도 증시 상장을 통해 현지 자본과 연결고리를 강화했고,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기반 프리미엄 가전과 스마트폰 현지 생산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인도 법인을 상장하며 인도를 전동화와 내수 확대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삼고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 속에서도 인도는 한국 기업들의 ‘포스트 차이나’ 전략이 현실화되는 핵심 무대로 부상했다.
14억 인구의 내수 시장과 급속히 성장하는 중산층은 기업들에게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인도는 이제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소비와 기술, 자본이 함께 작동하는 복합 시장으로 진화 중이라는 평가다.
LG전자가 인도를 ‘글로벌 사우스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삼고 지난 10월 현지 증시에 첫발을 내디뎠다. 단순한 자금 조달을 넘어, 인도 현지화 완성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1997년 진출 이후 쌓아온 28년간의 사업 경험과 현지 역량을 기반으로 LG전자는 인도에서 제조·연구개발(R&D)·판매가 아우러지는 완결형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번 상장은 인도를 단순한 생산기지나 소비시장으로 보는 수준을 넘어, 신흥시장 전략의 중심축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0월 14일(현지시간) 인도 뭄바이 국립증권거래소(NSE)에서 열린 상장 기념행사에서 “이번 상장을 통해 인도는 LG전자의 글로벌 사우스 전략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거점 국가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는 이번 상장을 계기로 인도를 겨냥한 세 가지 비전, 즉 “Make for India” “Make in India” “Make India Global”을 제시했다.
이는 인도 고객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반영한 제품 전략, 현지 생산과 R&D 확대, 그리고 인도를 글로벌 시장 진출의 거점으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상장과 함께 LG전자는 인도 고객 맞춤형 ‘국민가전’ 4종(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마이크로오븐)을 처음 공개했다. 해당 제품들은 화려한 문양 디자인, 인도식 세탁 관리 기능, 현지 수질을 고려한 정수 시스템 등 인도 생활 환경을 반영한 설계가 특징이다. 이들 제품은 노이다·푸네 공장에서 생산되며 11월부터 순차 출시될 예정이다. 생산 역량 확대에도 속도를 낸다. LG전자는 스리시티 지역에 신공장 건설을 위해 약 6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 냉장고 360만 대, 세탁기 375만 대, 에어컨 470만 대 수준의 연간 생산 능력 확대가 기대된다.
또한 벵갈루루에 위치한 소프트웨어 연구소는 AI, SoC, 플랫폼 기술 개발 중심지로 육성될 계획이다.
이번 인도 법인 상장은 자금 확보와 재무 건전성 강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LG전자는 인도 자본시장에서 약 1조 8000억원 규모의 현금을 국내로 조달했다.
인도법인 공모가는 주당 1140루피로 책정됐고 청약 경쟁률은 공모주식수 대비 54배에 달했다. 상장 첫날 인도법인 주가는 공모가 대비 약 50% 이상 급등했으며 장중에는 최대 53% 상승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인도법인의 시가총액은 모회사인 LG전자의 시가총액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번 상장은 인도 내에서 LG전자 브랜드 신뢰도와 현지화 이미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현대자동차그룹과 삼성전자 등도 인도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인도법인이 현지 증시에 상장하며 현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도는 전 세계 3위 자동차 시장이다. 현대차그룹은 하이브리드차를 포함해 인도 맞춤형 신차 26개를 선보이며 시장 점유율 15%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증시 상장 당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인도가 곧 미래”라며 “현지화에 대한 헌신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인도 시장에서 내연기관(ICE)·천연가스(CNG)·전기차(EV)·하이브리드 등 전 구동 방식을 아우르는 ‘풀 파워트레인 라인업’을 구축한 드문 글로벌 완성차(OEM)로 자리잡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번 대규모 투자는 인도 시장에 대한 현지화 전략을 한층 가속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현대차는 현지 경영 역량 강화를 위해 인도법인 설립 29년 만에 처음으로 현지 출신인 타룬 가르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신임최고경영자(CEO)로 내정했으며, 그는 내년 1월 공식 취임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도 인도를 미래 핵심 거점으로 삼고 투자를 잇달아 확대하고 있다.
지난 5월 삼성전자는 첸나이 인근 스리페룸부두르 가전 공장에 약 1700억원을 추가로 투입하기로 했다.
지난 5월 삼성전자는 첸나이 인근 스리페룸부두르 가전 공장에 약 1700억원을 추가로 투입하기로 했다.
삼성전자 스리페룸부두르 가전공장은 냉장고, 세탁기 등을 생산하며 연간 120억달러(약 17조 3000억원)에 달하는 삼성 인도 매출의 약 20%를 담당하는 곳이다. 인도 전역뿐 아니라 남아시아 주변국에도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인도 시장은 삼성전자 가전 부문이 세계 2~3위권을 유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인도 TV 시장에서 출하량 기준 23.8% 점유율로 9년 연속 1위를 지켰다.
삼성전자는 TV뿐 아니라 냉장고, 세탁기, 스마트폰 등 전 제품군에 AI 기능을 강화해 인도 시장에서의 프리미엄 경쟁력을 더욱 높여간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는 제조뿐 아니라 첨단 기술의 연구개발(R&D) 역량 강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인도 내 3개의 R&D센터를 운영하며 가전과 스마트폰에 적용될 인공지능(AI)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인도 반도체연구소(SSIR)에서는 메모리와 시스템온칩(SoC) 설계 분야 인재 채용을 대폭 늘려 기술 저변을 확장 중이다.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는 인도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9월 삼성전자는 20년 넘게 SSIR에서 차세대 스토리지와 메모리 솔루션 개발을 이끌어온 라제쉬 크리슈난을 신임 연구소장으로 선임했다. 내부 출신인 크리슈난 소장은 DDR과 HBM(고대역폭 메모리) 등 AI 연산 핵심 기술발전에 기여한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글로벌 기업들이 인도 시장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계 최대 인구국으로 부상한 인도가 이제 ‘규모의 시장’을 넘어 ‘소비의 시장’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14억 인구 중 중산층이 빠르게 확대되며 이들의 구매력과 소비 여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분석이 잇따른다. 지난 10년간 인도 국민의 1인당 평균소득은 연평균 약 7% 성장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소비 확대의 중심이 상위층이 아니라 중산층이라는 점이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저가 보다 품질’ ‘가격보다 브랜드’를 중시하는 소비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전·자동차·모바일 등 내구재 시장에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생활가전 부문에서는 프리미엄·에너지 절약형 제품의 판매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으며 글로벌 브랜드에 대한 신뢰도와 선호도 또한 상승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글로벌 기업들은 인도를 단기 매출 확대의 수단이 아닌 ‘미래 소비 생태계에 대한 투자처’로 보고 있다. LG전자,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등 한국 기업들이 인도에서 현지화와 고급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비력 확대는 곧 데이터 트래픽과 AI 인프라 수요 증가로 직결되고 있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들의 대규모 투자가 몰리며 인도는 ‘AI 데이터센터 허브’로서의 역할로도 급부상하고 있다. 구글은 향후 5년간 150억달러(약 21조원)를 투입해 안드라프라데시주에 1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는 미국 외 지역에서 추진되는 구글의 최대 AI 인프라 투자로 해저 케이블 설치까지 포함된 초대형 프로젝트다. 오픈AI와 아마존도 각각 1GW급 데이터센터 설립과 127억달러 규모의 클라우드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는 14억 인구 중 8억 명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세계 2위 디지털 시장이다. 빠른 수요 성장에도 불구하고 AI 인프라 비중은 세계의 3%에 불과하다. 빅테크들에게는 성장여력이 막대한 ‘미개척 시장’인 셈이다. 인도 정부 역시 ‘국가 데이터센터 정책’을 통해 세제 감면과 인허가 절차 간소화 등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며, 주정부 단위로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풍부한 인력, 낮은 전력비와 토지비 등 인프라 비용 경쟁력도 강점이다. 인도는 이제 AI와 데이터 경제의 다음 전선을 여는 ‘글로벌 디지털 성장의 심장부’로 떠오르고 있다.
인도는 주요 기업들의 글로벌 전략에서 구조적 전환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체 생산기지로서의 의미를 넘어, 제조·소비·디지털 산업이 동시에 성장하는 복합시장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LG전자는 자본시장 연계를 통한 현지 생태계 구축에 나섰고, 삼성전자는 생산과 연구개발을 결합한 기술 거점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현지 경영 체계를 인도 중심으로 전환하며 전동화 시장 대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같은 행보는 공통적으로 ‘현지화 심화’와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산층 확대로 인한 내수 기반 확대, 정부의 제조 육성 정책, AI·데이터 인프라 확충이 결합되며 인도는 산업 성장의 순환 구조를 갖춰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를 단기 수익의 관점이 아닌 중장기 사업 생태계 구축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다만 리스크 요인도 명확하다.
주(州) 단위 규제 편차, 행정 절차의 복잡성, 물류·전력 인프라의 불균형은 여전히 과제다. 또한 인도 정부의 자국 산업보호정책이 강화될 경우, 외국 기업의 현지화 전략은 조정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결국 인도 시장 진출의 성패는 ‘현지화의 깊이’와 ‘지속 가능성’에 달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한국 기업들이 인도 시장에서 확보한 생산·R&D·소비 기반은 향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술 경쟁 구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산업계 관계자는 “인도는 단순한 신흥시장을 넘어, 한국 제조업의 구조 재편과 글로벌 경쟁력 재정립을 가늠할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소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