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위스키 시장이 2년 연속 하락세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를 살펴보면 올 1~8월 위스키 수입액은 1억 4875만달러(약 2074억원)로 전년 동기(1억 6307만달러) 대비 8.7%나 줄었다. 같은 기간 수입량은 1만 7526톤에서 1만 5662톤으로 11.9% 감소했다. 업계에선 “팬데믹으로 인한 호황이 고물가, 고환율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소주나 맥주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은 위스키는 소비자의 지갑 사정에 따라 수요가 결정된다는 분석이다. 국내 위스키 시장은 팬데믹 시기에 호황을 맞으며 수입량이 2021년 1만 5661톤에서 2023년 역대 최대인 3만 586톤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지난해 2만7441톤으로 전년 대비 10.3% 꺾인 뒤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MZ세대를 중심으로 위스키 시장이 다시 활력을 찾을 거란 기대도 있다. 다양한 종류의 주류나 음료를 섞어 마시는 ‘믹솔로지’ 문화와 집에서 즐기는 ‘홈술’의 유행이 여전하단 이유다. 유통가에선 “전체 시장은 침체지만 마니아층의 수요는 줄지 않았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 BTS의 멤버 RM의 위스키로 소문난 대만의 싱글몰트 위스키 ‘카발란’은 올 상반기에만 217만 4000달러(약 29억원)의 수입액을 기록했다. 지난해 국내 출고량은 2021년 대비 1123.5%나 폭증하기도 했다. 위스키 수입업체의 한 관계자는 “국내 위스키 시장이 침체라지만 싱글몰트나 야마자키 등 일본 위스키, 한정판 위스키는 수십, 수백만원의 고가에도 인기”라며 “하이볼용 가성비 위스키와 하이엔드 위스키의 인기로 시장에 양극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잠깐, 그럼 국내 위스키 시장은 수입에만 의존하는 걸까. 정답은 ‘아니다’. 한국은 분명 위스키도 수출한다. 지난해 국내 위스키 수출량은 314톤, 2만 7441톤을 수입하는 동안 수출량은 그야말로 미미했다. 그것도 해외에서 위스키 원액을 들여와 국내에서 병입해 다시 해외로 판매하는 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K-컬처와 푸드가 글로벌 시장을 주름잡는 시대에 K-위스키에 대한 갈증이 높아지는 이유다.
이러한 기대에 롯데와 신세계가 반응했다. 국내 위스키 시장이 정점을 찍은 2023년, 두 그룹은 주류 사업 다각화를 위해 K-위스키로 방향을 잡았다. 롯데칠성음료가 제주 서귀포의 유휴부지에 위스키 증류소를 짓기 위한 인허가 절차를 진행 중이란 소식이 전해졌고, 신세계L&B도 2016년 인수한 제주소주의 공장 부지에 증류소를 짓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시장 상황은 장밋빛이었다. MZ세대까지 소비층으로 유입되며 “이젠 젊은 층이 선호하는 술”로 위스키가 꼽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 계획은 2년여 만에 없던 일이 됐다. 최근 롯데칠성음료는 올 2분기에 서귀포 증류소를 완공하고 내년부터 시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던 위스키 증류소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신세계L&B도 지난해 7월 위스키 사업을 중단하고 사업 재편을 진행 중이다. 증류소 부지로 활용하려던 제주소주도 오비맥주에 매각했다. 주류업계에선 “위스키 시장의 롱텀 비즈니스와 실적 부진이 K-위스키의 발목을 잡았다”는 말이 돌았다. 위스키는 기본적으로 숙성 기간이 요구된다.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에서도 최소 3년의 숙성 기간을 거쳐야 비로소 위스키로 인정받을 수 있다. 당연히 제조와 숙성 기간엔 팔 수 있는 위스키가 없다. 여기에 실적 부진이 겹쳤다. 신세계L&B는 지난해 매출이 1655억원으로 전년 대비 7.8% 줄어든 데다 영업손익이 52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롯데칠성음료도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874억원으로 전년 대비 9.9% 감소했다. 매출도 1조 9976억원으로 1.9% 줄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출고가에 세금을 매기는 종가세도 단기적인 성과가 필요한 대기업 입장에선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종가세는 출고가를 기준으로 세금을 적용한다.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선 고가의 원재료를 써야 하는데, 원가가 높아지면 세금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국내에 수입되는 위스키의 세율은 72%. 위스키 한병의 출고가가 1만원이라면 주세가 7200원이다. 여기에 교육세, 부가가치세가 더해져 최종 소비자 가격이 정해진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사계절이 분명하고 습도가 높은 한국의 기후가 위스키 제조에 썩 좋지 않은 건 둘째치고 종가세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현재 한국을 제외한 대다수의 OECD 회원국은 종량세를 시행하고 있다. 술의 도수와 양에 따라 세금을 적용하는 제도다. 결과적으로 질 좋은 K-위스키를 만들면 만들수록 더 비싸게 팔 수밖에 없는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K-브랜드의 위상이 아무리 높다지만 비싼 돈을 내고 처음 본 브랜드를 택할 이유가 없다. 오죽하면 종량세를 적용한 일본 주류 사이트를 통해 국내산 위스키를 구입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통관·물류 비용을 더해도 더 싸다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위스키의 태동은 시작됐다. 위스키 스타트업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기원위스키’와 ‘김창수위스키’가 대표적인 국내 위스키 생산업체다. 각각 남양주와 김포에 증류소를 마련하고 숙성 과정을 거쳐 100% 국내산 원액 위스키를 선보이고 있다. 2020년 설립된 김창수위스키는 스코틀랜드와 일본에서 기술을 익힌 김창수 대표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해 한국산 싱글몰트를 완성했다. 2022년 4월, 단 336병만 출시된 첫 작품은 22만원의 고가에도 불구하고 오픈런을 낳을 만큼 화제가 되며 열흘 만에 완판됐다. 지난 7월 31일 신세계 면세점에서 단독으로 진행한 ‘김창수초이스2-스페이사이드’는 한정판 130병이 공개 직후 완판되기도 했다. 2020년 경기도 남양주에 싱글몰트 증류소를 마련한 기원위스키는 2013년 수제맥주 양조장 ‘핸드앤몰트’를 창업했던 도정한 대표가 스코틀랜드 글렌리벳 출신 앤드류 샌드 마스터 디스틸러를 영입해 ‘기원’을 출시했다. 국내 첫 K-위스키다. 기원위스키는 최근 세계 3대 주류 품평회로 알려진 국제주류품평회(IWSC)와 샌프란시스코 국제주류품평회(SFWSC), 세계위스키어워즈(WWA)에서 잇따라 수상 소식을 전했다. 도정한 대표는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기후 이점을 살려 좋은 원주로 최대 150시간의 긴 발효를 거쳤다”며 “특유의 고추장 같은 매운 맛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주류 품평회의 수상은 수출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 위스키 3종(유니콘·호랑이·독수리)을 기반으로 한 면세 전용 라인은 한 달 판매 분량이 단 2주 만에 완판되기도 했다. 일본 수출 물량은 이미 2배 늘었다는 후문이다. 올해 흑자전환이 예상된다. 내년에는 중국, 프랑스, 독일에도 수출할 계획이다.
증류식 소주와 위스키, 브랜디 등의 소규모 주류제조면허를 허용하는 등 국세청이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한 주류 규제 완화도 K-위스키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있다. 이번 개정으로 기존 탁주, 과실주, 청주 등 일부 주종에만 허용되던 소규모 주류제조면허가 위스키, 브랜디, 증류식 소주로 확대됐다. 국세청은 “신규 사업자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납세 협력 비용을 줄이면서 수출도 지원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술을 제조해 판매하려면 정부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취득해야 한다. 크게 소규모 면허와 일반 면허로 나뉘는데 소규모 주류제조면허는 일반 면허보다 낮은 시설 기준과 비용으로 술을 제조할 수 있다. 기존 소규모 주류면허는 탁주, 약주, 청주, 과실주, 맥주 제조장에만 적용됐다. 위스키, 브랜디, 증류식 소주를 제조하려면 최소 5000ℓ 이상의 담금조와 2만 5000ℓ 이상의 저장조가 필요했다. 개정 이후에는 1000ℓ이상~5000ℓ미만의 담금조, 5000ℓ이상~2만 5000ℓ미만의 저장조를 구비하면 위스키를 제조할 수 있다. 국세청은 소규모 면허제 확대에 더해 납세병 마개(주류 용기 뚜껑이나 병마개에 부착되는 세금 증명 표시) 제조자를 ‘등록제’로 바꿔 일정한 시설 요건만 갖추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또 주류산업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수출용 국산 위스키, 브랜디 나무통 저장과 숙성 기간을 관할 세무서장에게 확인받을 수 있도록 했다.
위스키는 보리에 싹을 띄운 맥아가 주원료다. 맥아를 비롯한 여러 원료가 당화, 발효, 증류 등의 과정을 거치며 갖가지 맛과 향이 담긴 ‘생명의 물’(위스키의 어원은 켈트어 위스크베타(Usquebaugh), 즉 생명의 물이다.)로 탄생한다. 100% 맥아를 사용하면 ‘몰트(Malt)위스키’가 되고 맥아에 옥수수나 호밀 같은 곡류를 섞으면 ‘그레인(Grain) 위스키’가 된다. 즐겨 마시는 ‘브렌디드(Blended) 위스키’는 몰트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은 제품이다. 위스키의 종류를 좀 더 세분화하면 제조된 지역에 따라 스카치, 아이리시, 아메리칸, 캐나디안 위스키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되는 스카치위스키는 증류소와 증류기에 따라 다시 세분화된다. 한 곳의 증류소에서 똑같은 증류기를 사용해 만들면 싱글몰트 위스키라 부른다. ‘글렌피딕’ ‘맥켈란’ ‘글렌리벳’처럼 요즘 인기 높은 위스키가 여기에 속한다. 싱글그레인 위스키는 증류소 한곳에서 연속식 증류기를 이용해 만든 그레인위스키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싱글몰트와 싱글그레인을 섞은 것인데 ‘발렌타인’ ‘시바스 리갈’ ‘조니워커’ 등이 속해 있다. 스카치위스키가 2번 증류한다면 아일랜드에서 만드는 아이리시 위스키는 3번 증류한다. 그런 이유로 대표적인 아이리시 위스키 ‘제임슨’의 라벨에는 ‘TRIPLE DISTILLED’란 표기가 선명하다. 미국에서 만드는 아메리칸 위스키를 ‘버번위스키’라 하는데, 대부분 켄터키 주에서 생산되는 버번은 옥수수를 51% 이상 사용해야 한다. ‘짐빔’ ‘메이커스마커’ ‘와일드터키’ 등이 해당된다. 테네시 주에서 단풍나무 숯으로 여과한 ‘잭 다니엘’은 테네시 위스키라 하고, 캐나다 정부의 감독 하에 완성되는 캐나디안 위스키는 호밀을 51% 이상 사용하는 라이 위스키와 옥수수를 80% 이상 사용하는 콘 위스키를 섞은 제품이다. 이 모든 위스키는 오크(떡갈나무)통 속에서 숙성 과정을 거치는데, 럼이나 보드카, 진 등 여타 증류주와 확연히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3~4년의 숙성과정을 거치는데, 최근엔 20년 이상 숙성시킨 프리미엄급 위스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