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훤~한 게 속이 다 시원하네.”
“왜, 무슨 고민있어? 그러고 보니 얼굴 살도 쏙 빠지고.”
말 한마디에 사람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걸 보니 딱 봐도 오래 만난 절친이다. 마즈막재 주차장 벤치에 앉아 잠시 충주호를 바라보던 중 옆자리에서 고민 상담이 시작됐다.
“애들이 이제 다 학생이잖아. 공부 문제도 있고….”
“그게 아닌데, 애들 문제가 어디 하루 이틀이니. 니가 그런 걸로 홀쭉해진다고?”
“아니, 아이 참. 이렇게 풍경 좋고 조용한데, 우리 집 위층은 왜 그렇게 시끄러울까.”
“층소? 그거야? 그거 힘들지. 우리 아파트 옆집이 그래서 이사갔잖아. 위에서 하도 뛰어서.”
“우리도 지금 그렇다니까. 올라가서 말하면 싸울 것 같아서 관리실에 얘기하는데 별 효과가 없고. 윗집 애들 뛰는 소리, 어른들 발망치 소리 때문에 심장이 벌렁벌렁한다니까. 집에 없을 땐 조용하다가 들어오면 다시 쿵쾅대니 요즘 손이 벌벌 떨릴 때도 있어.”
“어쩌누. 요즘엔 윗집 잘 만나는 게 가장 큰 복이라던데….”
“그러게 말이다. 처음엔 왜 아파트를 이따위로 지었나 싶었는데, 잘 지었어도 저 정도로 뛰고 쿵쿵대면 어떤 건물이 버틸까 싶더라.”
“매너지 매너. 우리 집에서 우리가 돈 내고 사는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 하는 사람들이 있지 있어. 그러지 말고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와라. 꼭대기층 내놨던데.”
“이사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면 벌써 갔지.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아니, 애들은 지들만 키우냐고. 왜 아파트 살면서 집에서 뛰게 하냐. 아파트 놀이터 좀 좋아? 이렇게 좋은 곳에 데리고 다니던가. 우리 애들이 천장 올려다볼 때면 아주 열불이 난다니까.”
“그래도 용케 윗층에 가 따지진 않았나 보네.”
“하도 답답해서 층간소음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 봤더니 아래층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층 욕을 해대던지. 게시판 글을 보니 나만 그런게 아닌가 싶어서 위로는 되는데 나도 욕을 입에 달고 살진 않을까, 혹여 대면해서 따지면 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무섭더라고.”
“그래도 내내 참으면 안돼. 잠시 들르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인데.”
“우선 여기 한 바퀴 돌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네. 어쩜 이리 조용하니. 새소리 물소리밖엔 들리지 않네. 가자. 위층 이것들을 그냥 썅. 아이고 나 욕했나? 아니지?”
누구나 어려움 하나씩은 안고 살아간다 했던가. 옆자리 고민 토로에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괜스레 숨이 깊어졌다. 살랑 부는 봄바람이 살짝 매서운 초봄. 충주호 물결 타고 전해진 봄 냄새가 상큼했다.
한식(寒食)이 코앞인 시기. 짧은 봄이 스치듯 지나는 이 시기엔 호수도 기지개를 켜고 꽃 피울 준비를 한다. 그러니 누가봐도 그야말로 봄이다. 찬바람이 물러간 충주호 종댕이길은 평일에도 찾는 이들로 북적인다. 서울에서 2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이곳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없는, 말 그대로 자연을 품은 길이다. 도심의 아파트 숲에서 출발해 경부, 영동,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오르내리다 보면 충청북도 충주시에 이르는데, 이곳에 면적 67.5㎢를 자랑하는 충주호가 자리했다. 1985년 종민동과 동량면 사이의 충주댐이 들어서며 조성된 이 호수는 담수량이 27억 5000t이나 되는 육지 속의 바다다. 물이 많고 넓어 붕어, 잉어, 향어, 송어까지 어종도 풍부하다. 주변에 월악산, 청풍문화재단지, 단양팔경, 고수동굴, 구인사, 수안보온천 등 관광명소도 많은데, 충주댐 나루터에서 신단양(장회)나루까지 52㎞에 이르는 구간을 유람선으로 돌아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중 숨어있는 비경은 종댕이길이다. 계명산의 줄기인 심항산 기슭에 만들어진 오솔길이자 둘레길인 종댕이길은 해발 385m의 산을 끼고 한 바퀴 휘돌아 나간다. 1, 2, 3코스가 모두 마즈막재 주차장에서 출발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다. 그런데 도대체 왜 종댕이길일까. 종댕이(종당·宗堂)는 인근 상종, 하종 마을의 옛 이름에서 유래된 충청도 사투리다. 이곳 토박이 주민들은 지금도 심항산을 종댕이산이라고 부른다. 숲길, 호수 둘레길이 이어지는 코스는 봄이면 참나무와 소나무 숲에서 퍼지는 진한 피톤치드향이, 여름에는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가을에는 울긋불긋 산을 물들이고 물에 반사되는 단풍, 겨울에는 호수에 내려앉은 설경이 일품이다. 마즈막재 주차장에서 충주호를 바라보고 서면 시야가 훤한데, 신선한 바람 덕분에 눈과 입이 맑아진다.
주차장에서 도로 옆으로 나무데크가 깔린 길을 걷다보면 내리막인 오솔길이 나오는데 이곳부터 본격적인 숲이 시작된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린 산과 숲은 길도 좁고 구불구불하다. 비교적 쉬운 길이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무턱대고 덤볐다간 다리가 후들거리기 십상이다. 근심 걱정 내려놓고 서너시간 충분히 걷겠다고 나서야 몸과 마음이 편하다.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등등 다양한 잡목이 섞인 숲은 야생의 분위기를 풍긴다. 작은 생태연못에는 거뭇거뭇한 올챙이가 그득하고, 이 연못을 지나면 거대한 충주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심항산 둘레를 도는 종댕이길에는 곳곳에 조망대와 쉼터, 정자가 자리했다. 제2 조망대에서 바라본 호수는 빼놓을 수 없는 풍경. 가장 넓고 멀리 보이는 구간이다. 주변 마을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지키고 선 종댕이고개를 넘으면 한 달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전해진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걷다보면 뭉친 근육이 풀리고 막혔던 호흡이 터지며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걷다 보면 출렁다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상종마을이나 계명산자연휴양림으로 나설 수 있다. 어느 길로 가도 결국엔 마즈막재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한바퀴 휘휘 돌다 보면 마음 속 어려움이 싹 사라지게 될까. 직접 확인해보시길….
[글 · 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