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이스라엘에 이어 두 번째로 정상회담을 성사했고, 미국에 거액의 투자를 선언하면서 트럼프를 기쁘게 했지만 결국그의 관세 폭탄을 피하지는 못했다. 관세 부담에서 벗어나고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일본 기업은 미국 내 투자를 늘린다는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첫 정상회담은 2월 7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열렸다.
이번 회담에서 이시바 총리는 미국에 1조달러(약 1456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2023년 기준 일본의 대미 투자액이 8000억달러(약 1165조원)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현재보다 25%를 늘린다는 얘기다.
여기에 대규모 액화천연가스(LNG) 구매도 약속했다. 바이오에탄올과 암모니아 등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를 통해 이시바 총리는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적자 규모는 685억달러(약 100조원)에 달한다.
방위비와 관련해서는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인 것을 단계적으로 올려 2027회계연도(2027년 4월~2028년 3월)에는 2%로 올리겠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가 증액을 우회적으로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시바 총리는 “증액 요구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시바 총리의 적극적인 선물 보따리에 트럼프 대통령은 미·일 동맹을 확고히 뒷받침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우선 인도·태평양 전역에서 평화와 안보 유지, 힘을 통한 평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할 것을 밝혔다. 특히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의 안보 협의체)와 한국, 필리핀 등 중첩된 네트워크를 통한 협력 강화에도 동의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미일안보조약 제5조’가 중국과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재확인해줬다. 이는 내심 일본이 가장 원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함께 협력할 것도 약속했다.
안보뿐 아니라 경제 부문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두 나라 간 ‘뜨거운 감자’인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문제의 해법도 제시했다. 그는 회담에서 “(일본제철은) 미국 철강업에 매우 흥미로운 일을 실시할 것”이라며 “일본제철은 구입이 아닌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US스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투자를 하기로 합의했고 일본 측과 인식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미·일 정상회담 ‘선방’으로 안도하고 있던 일본이었지만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철강 관세를 피하지 못했다. 당시 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결국 별도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2월 10일(현지시간)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한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에 서명했다. 그동안 일본산 철강은 예외 조치를 적용받았는데, 이번에 이것이 실효되면서 일본 제품에도 관세가 적용되게 된 것이다.
관세가 정식 발효되는 것은 3월 12일이다. 한 달 동안의 시간 동안 일본은 관세 면제 조치 등을 얻어내기 위한 외교전을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포고문에서 집권 1기 때 25% 관세 예외를 적용했던 국가들을 열거하면서 이들 국가와의 합의가 국가 안보 우려를 해소하는 데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대안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이 시작됐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대미 철강 수출량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닛케이는 일본철강연맹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일본의 철강 수출량이 3171만t이었는데, 이 가운데 대미 수출량은 120만t이었다고 보도했다. 점유율로 보면 4.1%에 불과하다.
여기에 관세 부과 시 정상적인 경로대로라면 미국의 물가가 오르게 된다. 물가 인상이 미국의 경기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완화해주는 대신 다른 이익을 취하는 협상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정책 강화를 추진하고 나서면서 일본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해 생산 설비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시바 총리가 밝힌 대미 투자 확대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닛케이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인 도요타자동차가 오는 4월부터 제품을 출하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도요타의 투자액은 2030년까지 140억달러(약 2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하반기 미국에서 전기차 생산을 시작하는 혼다도 오하이오주 공장에 10억달러(약 1조 4500억원)를 투입해 생산 설비를 추가할 방침이다. 트럭 등을 생산하는 이스즈는 약 3억달러(약 4360억원)를 투자해 트럭 조립 공장을 짓고, 2027년 이후 연간 5만 대를 생산할 예정이다. 일본 식품업체들도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닛신식품홀딩스는 47년 만에 미국에서 즉석 면 공장을 가동하고, 야쿠르트는 유산균 음료 공장을 신설한다.
특히 소프트뱅크는 오픈AI, 오라클과 함께 미국 내 데이터 센터 등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최소 5000억달러(약 727조원)를 투자해 새로운 AI 기업인 ‘스타게이트’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스미토모화학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세정액을 생산하는 공장을 텍사스주에 세워 내년 3월 이전에 양산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일본은 2023년까지 5년 연속 대미 투자액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닛케이는 “2023년 시점에 일본의 대미 투자액은 7833억달러(약 1139조원)였는데, 트럼프 1기 행정부 초기였던 2017년과 비교하면 3000억달러 정도 늘어난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에 공장을 지을 경우 관세 혜택은 줄일 수 있지만 채산성 확보가 관건이다. 우선 미국 내에 쓸 만한 인력이 부족한 데다 인건비도 일본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싸다. 또 엔저 현상을 고려하면 환율 문제로 인한 손실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훈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