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소설가 김훈의 2007년 동명 소설 ‘남한산성’을 원작으로 제작된 2017년 영화입니다. 1636년 인조 14년, 청나라 칸의 대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 조정이 처한 고립무원의 위기를 다루지요. 영화로 봤든 책으로 읽었든 ‘남한산성’의 독자와 관객은 오래전 조선이 겪었던 거대한 수모와 민족적 울분을 기억하게 됩니다. 작품 전체가 한 편의 울음소리 같기 때문이고, 임금 인조(재위 1623~1649년)부터 대장장이 서날쇠에 이르기까지 ‘약자’ 조선이 겪은 비참함을 이식받게 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의문이 들진 않으셨는지요. 원작자인 김훈 소설가는 왜 하필 ‘병자호란 시기의 남한산성’으로 눈길을 돌렸던 걸까요. 그는 ‘역사가’가 아닙니다.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현재의 현실을 보는” 소설을 쓸 뿐이지요. 수모와 울분의 더께를 걷어내고 ‘남한산성’을 살피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청나라 칸의 억압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소국 조선의 피눈물 나는 분투가 ‘남한산성’의 뼈대입니다. 황제 칸의 명을 받은 용골대의 대군이 조선에 진격하자 임금(박해일 분)과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은닉합니다. 몸을 낮게 엎드린 산기슭, 한겨울 추위와 극한의 굶주림을 겪으며 조선의 대신들은 사대(事大)를 둘러싼 격론을 벌이고, 결론을 내지 못해 쪼개집니다. ‘화친할 것인가, 척화할 것인가.’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과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나눈 극렬한 대립은 대의와 생존의 벼랑 끝에 선 인간의 모멸감을 민낯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소설 ‘남한산성’을 자세히 읽어보면, 영화 ‘남한산성’이 말하는 ‘대의와 생존 사이의 비참한 인간’이란 주제의식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영화가 김상헌과 최명길 간의 대립에 집중하는 반면, 소설 ‘남한산성’은 양자 간의 싸움만을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김훈 작가는 소설 첫 문장부터 이 책의 주제가 말(言)임을 공언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9쪽, 소설 첫 문장)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도 말에 대한 사유입니다. 편전에 모인 대신들의 불화는 외적 상황일 뿐이고 책 속 문장의 심부(深部)에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지요.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9~10쪽) 당대의 언어가 가진 한계를 압축과 은유로 묘사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칸은 조선이란 세계에 드리워진 혼돈의 원인입니다. 김훈 작가는 그 위기 속에서 말들이 ‘떼뱀’처럼 엇물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 즉 언어의 한계를 새삼 직시한 것이지요. 혼돈은 인간의 존망을 가르는 칼이 되어 목을 찌르는데 당대 조선의 압축판인 남한산성에서 언어가 낭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현실과 미래의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남한산성’은 등장인물 전체가 말의 문제에 서툽니다. 옥음을 모시지 못하는 귀 어두운 내시, 서북 산성에 닿지 않는 군율, 장님이 벽을 더듬는 듯한 임금의 말투, 개성 유수에서 당도한 두루마리 장계, 칸의 사신 일행이 들고 온 국서, 임금에게 보내진 통역된 칸의 말, 예판 김상헌에게 도착한 급보, 울음이 섞인 이판 최명길의 목소리, 하나 마나 한 병판의 말, 성첩에서 먼 영상의 말…. ‘남한산성’의 진짜 주제는 ‘혼돈과 말의 상관관계’가 아니었을까요.
남한산성 성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갈등은 이처럼 언어 문제의 주변부에서 진행됩니다. 무수한 말이 남한산성 성문 안팎을 오가는 가운데 김훈 작가와 황동혁 감독이 추려낸 말의 문제는 다시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첫째, 청나라 칸이 조선 땅을 밟고 성 밖에 당도했다는 게 사실인가의 불확실성(소문의 실재).
둘째, 근왕병을 부를 격문이 성 밖으로 안전하게 나갔는가의 불확실성(격문의 전달).
셋째, 김상헌과 최명길로 대표되는 두 가지 정의의 충돌(대의와 생존).
성 안의 임금 인조가 집요하게 캐묻는 질문 하나는 이렇습니다. ‘칸이 조선 땅을 밟았는가?’ 성 밖에서 들려온 소문의 진의를 성 안의 사람들은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인조의 저 질문은 실재와 허위 사이에서 표류합니다. 사관은 그래서인지 그날 벌어진 하루를 다음처럼 정리하기도 하지요. “안팎이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38쪽) 언어는 사실 전달의 도구이지만 그 언어의 사실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 그게 비극의 씨앗입니다. 그런데 사실의 불확실성에 관한 논의는 1636년 조선만의 일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수천 년 전 고대로부터 불확실성은 논의되었지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기억하시는지요. 플라톤에 따르면, 객관적 진실이란 인간이 감각하기 불가능한, 안개 너머에 있는 무엇입니다. 인간은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바라볼 뿐이지요. 플라톤 식으로 말해본다면 ‘남한산성’의 무대인 성 안은 하나의 동굴이 됩니다. 동굴 속의 인간처럼 숨어든 인조의 대신과 백성은, 불확실성의 미로 속에서 ‘의견’과 ‘사실’이 혼재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칸이 조선 땅을 밟았는가’는 소문의 안팎에 사실과 허위가 뒤섞여버린 이유이지요. “세자 전하를 보내지 않으면 칸이 더 큰 요구를 해올까 그것이 두렵다”는 최명길의 말을 두고 인조가 의견인지 사실인지를 되묻는 건 그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남한산성’의 조선인은 동굴 안의 우매한 인간입니다. ‘칸이 조선 땅을 밟았는가’란 질문이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밀려오는 소문을 둘러싼 해석의 불확실성을 뜻하는 반면, ‘격문이 근왕병에게 당도했는가’란 물음은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아가고도 결국 실패하고 마는 언어의 한계성을 노출시키는 문장입니다. 인조의 명을 받은 김상헌은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부탁해 청의 군사와 싸울 근왕병을 모으는 격문을 성 밖으로 내보내려 합니다. 서날쇠는 국새가 찍힌 종이 한 장을 품에 넣고 목숨을 건 외길을 택해야 하지요. 서날쇠의 여정 역시, 인간의 언어가 처한 한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훌륭한 은유가 됩니다. 인간에게 언어란 무엇이었던가요. 언어는 개인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언어가 개인의 내부에만 고립된다면 ‘공통된 언어 사용을 통한 세계의 확장’이라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품에 간직한 왕의 격문을 서날쇠가 근왕병에게 전달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조의 격문이 성 밖으로 나갔는가의 문제 역시 안개 너머에 가려진 객관적 진리와 같습니다.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우니까요. 영화 ‘남한산성’에서 서날쇠는 격문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지만 격문을 자기식대로 곡해한 근왕병들의 계략으로 임금은 목적 달성에 실패합니다.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언어처럼 말이지요.
소문과 격문이라는 두 가지 현실 이면에서 김상헌은 대의를 힘주어 외치고 최명길은 생존을 부르짖는데,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 서로 빈틈이 없습니다. “전하,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라는 김상헌의 말이나, “전하,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이상 143쪽)라는 최명길의 말은 둘 다 ‘옳은’ 말입니다. 동일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는데 이것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이지요. ‘남한산성’이 단지 조선 왕조의 한 비극에서 멈추지 않고 현재까지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김훈 작가는 언어의 한계와 그로 인한 인간의 슬픈 초상을 ‘남한산성’을 통해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임금 인조는 칸이 내려다보는 삼전도의 단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김상헌은 자신의 정의가 무너지자 자진하려 합니다. 김상헌의 죽음 장면은 영화와 소설이 다르게 그려집니다. 소설 속 김상헌은 이 “때가 되었다. 나는 죽으니, 너희는 그리 알라”(342쪽)고 조카들에게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 들보에 목을 매지만 실패합니다. 영화 속 김상헌은 장검을 복부에 찔러 넣는 할복을 택합니다. 영화 첫 부분에서 김상헌이 뱃사공을 베었던 바로 그 칼이었습니다. 세계의 진화란 세계를 이뤘던 한 측의 확실하고도 자명한 몰락만으로 한 걸음씩 이뤄지는 것만 같습니다.
남한산성의 막힌 성벽을 사이에 두고 내왕(來往)에 성공하는 사람은 죽은 뱃사공의 손녀 나루뿐입니다. 임금 인조의 손이나 청나라 칸의 칼이 미치지 못하는, 가장 나약한 존재 나루만이 남한산성의 산등성이를 오갔습니다. 한겨울 혼돈의 세계에서 가장 어린 새싹만이 길을 잃지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다는 점, 그것이 ‘남한산성’에 은밀히 숨겨졌던 작은 희망이 아닐까요.
[김유태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