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작은 골목에서 벌어진 참사의 전후를 뉴스로 들으며, 무언가로부터 내파(內破)되는 자기 자신을 경험한 건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보지 않은 것들을 마치 본 듯한, 듣지 못한 것들을 방금 들은 듯한 잔상과 여진은 우리가 걸어갈 생에서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이어질 것만 같습니다. 딱 잘라 뭐라 설명해볼 의지조차 사라지는 압도적인 상실, 저 생이라는 녀석의 충격 앞에서 고통의 ‘곁’에 서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일인가를 생각하며 글을 엽니다.
이창동 감독의 2007년작 <밀양>은 1985년 문예지 <외국문학> 여름호에 발표된 이청준 작가의 단편 <벌레 이야기>가 원작입니다. 죽기 전에 봐야 할 한국영화 등의 수식어가 뒤따르고 배우 전도연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길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주변에 의외로 아직 ‘보지 않은·못 본 분’들이 많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자식 잃은 슬픔을 연기한 전도연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볼 용기가 없다는 이유도 있고 안티 기독교 영화로 해석돼 반감을 가진 분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소설 <벌레 이야기>와 영화 <밀양>의 내부로 진입해 고통과 애도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학원 원장에게 유괴 살해된 한 불쌍한 아이의 엄마 이신애. 그는 아이를 잃은 뒤 교인의 끈질긴 설득에 종교에 귀의한다. 급기야 눈앞에서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까지 가지만 이미 신 앞에 회개하여 용서까지 받았다고 확신하는 살인자 도섭을 보며, 결국 정신이상을 일으킨다.’
이것은 거칠게나마 요약해본 영화 <밀양>과 소설 <벌레 이야기>의 공통 줄거리입니다. 두 장르 간의 차이도 적지 않습니다. 희생되는 아이 이름이 소설에선 알암이인데 영화에선 준이입니다. 신애의 직업이 영화에선 피아노학원 원장, 소설에선 약사라는 점, 소설은 알암이 아빠가 알암이 엄마의 이상행동을 보며 쓴 관찰기이지만 영화엔 남편이 부재하고 대신 카센터 사장 김종찬(송강호)이 등장한다는 점, 소설에선 살인자인 주산학원 원장 도섭의 협박 전화가 없었다는 점 등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비밀스러운 햇빛을 뜻하는 도시 밀양(密陽)이 소설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창동 감독의 ‘비밀스러운’ 의도를 상상하게 합니다.
신애가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가 소설과 영화에서 서로 상이하다는 점은 두 작품의 큰 차이점입니다. 소설에서 알암이 엄마(영화의 신애)에게 열성신도 김 집사 아주머니는 알암이 엄마가 살인자 도섭을 용서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는 이어 사람에겐 애초 남을 심판할 권리가 없고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선 심중에 원망과 미움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알암이 엄마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교회가 내세에서의 아이의 구원을 허락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알암이의 슬프고 불행스런 사고가 그 어머니에게 주님을 영접케 할 은총의 기회라고 말하는 대목은 읽기가 거북할 정도입니다.
반면 영화 <밀양>에선 약사 아주머니가 복통으로 약국을 찾은 신애에게 부흥회 참석을 권유하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올 뿐이며, 아이의 내세에서의 구원과 행복이 신앙의 조건으로 내걸리지도 않습니다. 김 집사와 같은 ‘신-인간 중계자’ 역할이 영화에선 옅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뭘 의미할까요. 영화의 경우, 신애의 각성은 기복신앙과는 거리가 먼 내적 회심에 가깝습니다. 부흥회에서 절규하는 신애는 돌연 자신이 겪고 있는 무참한 고통의 뒤에 더 큰 신의 뜻이 숨겨져 있다고 믿어버립니다. 눈앞의 불행이 우연적 요소에 의한 사고였다고 인정하는 대신, 거대한 신의 의도가 현실세계의 커튼 뒤에서 이미 예비되었고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게 지금의 불가해한 고통을 무의미의 늪으로 익사시키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적인 이유로 교회를 찾았던 원작과 달리 신애의 회심을 묘사함으로써(신애의 신앙고백 “모든 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진다는 것을 믿게 됐어요”) 이창동 감독은 믿음의 출현을 이야기하는 경지로 이 비극을 격상시켰습니다. 신애의 이러한 ‘믿어버림’의 증거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이 실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느냐는 남동생의 힐난을 외면하는 누나 신애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아니야 인마, 준이 아빠는 우리 준이랑 나만 사랑했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것, 인간은 이렇게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창동 감독이 설계한 설정과 장치는 소설과 다른 영화의 두 번째 의미 차를 형성합니다. 바로 ‘가닿을 수 없음’이란 주제입니다. 영화 카메라는 준이가 살해된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다소 먼 거리에서 멈춰 섭니다. 이런 장면은 <밀양>에 한둘이 아닙니다. 준이의 사체를 확인하기 위해 비탈길을 내려가는 신애의 손을 누구도 잡아주지 않습니다. 자해 후 신애의 남동생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는 누나의 병원비를 대납하고 당일 상경해버립니다. 응급실에 누운 신애의 머리 향기를 맡는 종찬도 신애의 육체를 탐하는 얼간이로 그려지죠. 옷가게 주인아줌마는 “매장 인테리어를 환하게 바꾸면 매상이 더 늘어날 것 같다”는 신애의 조언을 미친 여자의 간섭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장면이 반복될까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이 가진 진심이나 타인이 겪은 고통에 결코 가닿을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한 건 아닐까요.
그런데 ‘인간의 거리’란 영화적 주제는 원작 <벌레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 소설에서, 알암이 아빠의 화자로서의 시점(視點)은 참 이상합니다. 알암이 아빠는 알암이 엄마를 ‘관찰’하는 시점에서 글을 씁니다. 알암이 아빠는 알암이 엄마와 동일하게 아이를 잃은 극도의 고통을 경험한 부모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과 애도와 분노에 아내와 함께 동참하지 못하고 관찰자로서의 글쓰기만 진행합니다. 알암이 아빠에겐 친부로서 감내해야 마땅한 본인 몫의 고통이 결여돼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벌레 이야기>의 한계라고 봅니다. 다만 어쩌면 이창동 감독은 오래전 <벌레 이야기>를 읽으며 알암이 아빠의 시점에서 이미 거리감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엔 살인자 도섭이 사형 집행 직전 라디오방송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 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174쪽)
여기까진 그의 속죄로 이해해볼 여지가 없진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이 치명적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고….” (같은 쪽)
도섭은 지금 자신이 목 졸라 암매장한 아이의 영혼을 자신과 ‘함께’ 천국으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혈관에 뜨거운 주사기를 밀어 넣은 것처럼 분노가 치미는 대목이죠. 그래서인지 알암이 엄마는 이틀 뒤 스스로 이승을 떠납니다. 영화에선 신애의 자살 장면이 소설보다는 좀 더 은유적입니다.
사과를 깎던 신애가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찌릅니다. 사과를 성찰해 볼까요. 에덴의 시대 이후, 사과는 인간의 죄악을 판단하는, 신이 내린 인류 최초의 리트머스 시험지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시험지를 만지작거리던 신애가 신의 피조물인 자기 자신을 살해(자살)합니다. 그것도 신의 자리가 분명한 천장(하늘)을 쳐다보며 말이죠. 아무리 신이더라도 아이를 잃은 어미 대신 신이 용서의 주체일 수 없으며 용서의 주체는 오직 인간 자신이어야 한다고 신애는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신애가 예배 중인 교인들을 향해 던진 돌도 의미가 깊어집니다. 성경에 따르면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질 수 있으니까요.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벌레 이야기>와 <밀양>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알레고리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청준 작가와 이창동 감독의 2007년 인터뷰를 살펴보면 두 거장은 그 점을 이미 주지하고 두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용서의 주체와 인간의 권리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과 반드시 나눠야 할 대화이기도 하니까요.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