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가는 해에 하늘이 붉어진 저녁 무렵,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던 할머니와 유치원 가방을 멘 손자가 공원 한 편의 작은 숲 앞에 섰다. 찬찬히 살피던 할머니가 적확한 답을 내놨다.
“겨우내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나무가 날씨가 따뜻해지니 기지개를 켜는 거야. 이제 이 멍울에서 잎이 나고 꽃이 핀다는 신호지. 그러니까 이건 음… 이제 봄이란 신호쯤 되겠네.”
“에이 할머니. 봄이 어떻게 신호를 보내요. 그럼 저 나무가 봄이겠네.”
“그럼 저 나무가 봄이지. 잘 살펴봐. 나무 색도 달라지고 가지 끝에 달린 동글동글한 부분도 커지고 있잖아. 이제 봄이 오니까 나무들도 봄에 맞춰 색이 달라지는 거야.”
“거봐. 그럼 저 나무는 봄이 아니라 그냥 나무인 거네. 그럼 봄은 누구지?”
네댓 걸음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동네 할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손자가 아주 똑소리가 나네요. 요즘 애들 어리다고 눙치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니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말문이 트였는지 아주 귀찮을 정도로 묻는다니까요.”
동네 할머니가 유치원생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봄이 누군 거 같니?”
“몰라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자꾸 온다고 해서 궁금해요.”
“그럼 봄이 오면 좋을 것 같니, 안 좋을 것 같니.”
“음… 그건 좋을 거 같아요.”
“응? 왜에?”
“음… 그건, 봄이 온다고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아요.”
“우웅? 아이고 봄이 너를 닮았나보다. 나도 널 처음 보는 데 싫지 않거든.”
봄이 왔나. 이런 게 봄이 오는 소리던가. 입꼬리 씰룩이며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마곡사가 떠올랐다. 봄이면 ‘춘(春)마곡’이라 불리는 바로 그 마곡사가….
서울에서 출발해 정확히 3시간 10분.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자리한 태화산(417m)에 도착했다.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도로공사 구간이 겹치며 시간이 늘어졌다. 그럼에도 별반 조급함이나 짜증이 없는 건 순전히 봄 때문이다. 봄을 맞으러 왔는데 어찌 짜증을….
산 전체에 소나무가 빼곡한 이곳의 기슭에 닿으면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인 마곡사가 눈에 들어온다.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과 함께 공주시의 대표적인 명소인데,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 유적이다. 그중 마곡사는 특히 봄에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그만큼 태화산에 움트는 봄볕의 생기가 예사롭지 않다.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에 춘(春)마곡이란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640년(백제 무왕 41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마곡사는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개축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했다. 조선시대엔 세조가 이곳에 들러 영산전(靈山殿)의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졌다.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해도 규모가 30여 칸에 이를 만큼 대사찰이었는데, 지금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과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고만고만한 산들이 넓게 자리한 사곡면 운암리 일대는 6·25 전란에도 마곡사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만큼 첩첩산중이다. 그래서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라 부르기도 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열 군데의 땅 중 한 곳이란 의미다. 이곳과 함께 경북 풍기의 금계촌, 경북 봉화의 춘양, 충북 보은의 속리산 아래, 경북 운봉 두류산, 경북 예천의 금당동 북쪽, 충남 공주의 유구, 강원도 영월의 정동 상류, 전북 무주의 무풍동, 전북 부안의 변산 동쪽, 경북 성주의 가야산 남쪽 만수동 등이 십승지지로 손꼽히고 있다.
▶물 좋고 길 맑은 솔바람길… 백범 명상길도
무엇보다 마곡사 주변엔 맑은 숲과 물이 풍부한 마곡천과 들꽃, 새소리가 함께하는 숲길이 여러 개다. 그 모든 길을 통틀어 솔바람길이라 하는데, 백범 김구 선생과의 인연이 담긴 ‘백범 명상길’도 있다. 1896년 2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살해하고 감옥살이를 하다 1898년 3월에 탈옥했다. 불과 스물세 살의 나이에 마곡사로 피신했던 그는 원종이란 법명으로 잠시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번 산책은 1코스 백범길(3㎞)에서 출발해 2코스 명상산책길(5㎞)로 접어들었다. 사실 솔바람길은 거리가 짧고 길다뿐이지 어느 길로 나서도 풍광이 빼어나다. 두 코스 모두 돌아도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스팔트길과 숲길, 나무데크 등이 연결된 산책코스는 계곡을 만날 수 있어 봄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차가웠던 바람은 어느 새 입김이 따뜻해졌다.
1코스인 백범길의 군왕대는 꼭 들러야 할 지점. 세조가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 비교할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는데, 그만큼 마곡사에서 가장 땅의 기운이 센 곳이라고 알려졌다. 태화산의 정상은 아니지만 이곳에 오르면 마곡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마곡사 가는 길
·승용차
서울IC→천안(JCT)분기점→천안 노산간 고속도로 진입→정안IC에서 마곡사 표지판을 따라 국도로→604번 지방도 이용(18㎞ 지점)
·대중교통
공주버스터미널에서 마곡사까지 770번 시내버스 종점 하차(오전 6시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40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