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Walking] 철원한탄강 주상절리길 잔도, 한겨울 출렁이는 다리 위로 완벽한 계곡 산책
안재형 기자
입력 : 2022.01.07 15:46:26
수정 : 2022.01.07 15:47:10
“여기부터 시작인 거지?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네. 이거 이러다 못 들어가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을라고. 저기 사람이 빠지는 게 보이긴 하네. 가방 잘 붙들어 메고 천천히 출발해 보자고.”
중년의 부부가 각자 배낭을 둘러메고 철원한탄강 주상절리길 순담매표소 앞에 섰다. 성인 1인당 1만원이란 안내에 2만원을 내니 인당 5000원의 철원사랑상품권이 나왔다. 철원군 어느 곳에서나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이다.
“이걸 아무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잔도 안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부부 중 남편이 묻자 매표소에서 아쉬운 안내가 흘러나왔다.
“안에서는 음식물을 취식할 수 없습니다. 사고파는 공간도 없고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있을 뿐이에요.”
부인이 재차 묻는다.
“그럼 싸온 김밥은 어디서 먹어야 하는 거예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했는데….”
“안에서는 드실 수가 없어요. 지금 드시던지 트레킹하고 반대편 드르니게이트로 나가서 드셔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쳐다본다. 당황하는 얼굴이다. 그런데 이 매표소 주변에 이런 얼굴을 한 이들이 네댓 팀 더 있었다. 중년 남자들 한 무리는 주차장 한편에 아예 돗자리를 펴고 바리바리 싸들고 온 막걸리와 안주로 오전 10시부터 술판이다. 싸온 걸 아예 먹고 산책에 나서겠다는 나름의 차선책인 셈인데, 밀려들어오는 차들을 안내하기 바빠서인지 누구 하나 제지하는 이들도 없다.
지난 11월 18일 개통한 한탄강 주상절리길 잔도 앞에 섰다. 개통한 지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무려 5만여 명이 산책에 나서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길이다. 매표소 바로 앞 주차장은 이른 시간임에도 이미 관광버스 10여 대가 자리했다.(취재 시기는 12월 중순 단계적 일상회복 시기였다.) 개통 초기의 홍보 부족이나 시행착오 때문인지 주상절리길을 찾은 이들 중 배낭을 메고 온 이들은 십중팔구 점심거리를 싸들고 왔다.
순담게이트에서 드르니게이트까지 3.6㎞ 편도 길을 걷고 혹은 왕복한 후 싸온 걸 먹기엔 아무리 가벼운 먹거리라도 부담스럽기 마련. 아예 포기하고 가져온 차에 배낭을 벗어두고 길을 나서는 이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먹고 출발하자며 배낭을 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술판엔 곳곳에서 어이없는 시선이 꽂혔다. 하물며 이 시기에….
▶아찔한 잔교, 그 위 펼쳐진 세계 유산
초입부터 분위기가 무거웠다. 실망한 첫 인상의 반은 주상절리길에 대한 환상 때문이요, 다른 반은 철원군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그만큼 기대가 컸다. 경기도 연천과 포천에 걸쳐진 강원도 철원군은 관광보다 안보가 우선인 지역이다. 여전히 최전방인 이곳은 수십 년간 제2땅굴로 각인된 견학 코스였다.
그러던 철원군이 달라진 건 한탄강 지질공원 덕분인데, 2015년 환경부가 한탄강 일대 1165㎢를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한 후 2020년 유네스코가 세계적인 지질 명소로 인정하며 철원군의 절경이 서서히 입소문을 탔다. 이후 고석정 등 관광지와 주변의 독특한 숙박지가 알려지며 객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곤 하지만 강원도의 유명한 관광지에 비하면 붐비지 않아 팬데믹에 찾는 숨겨진 관광지로 알려지기도 했다. 힙하다기보단 힐링에 어울린달까. 그런 의미로 한탄강 주상절리길 잔도 역시 두어 시간 남짓 힐링할 수 있는 완벽한 산책코스다.
순담 매표소로 입장한 후 300여m 앞에 펼쳐진 순담스카이전망대부터 이러한 기대는 고스란히 탄성이 됐다. 협곡에 설치된 잔도(棧道)와 전망대는 어림잡아 30~40m 높이. 그 위에 서서 아래가 훤하기 뚫린 철제 바닥을 내려다보면 왠지 오금이 저리고 아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13개의 잔교와 10개의 쉼터, 3개의 스카이전망대로 구성됐다. 잔도는 단 한 곳도 똑같은 모양이 없다. 풍경이 다르니 그 위에 올려진 다리와 길이 같을 리 만무하다. 덕분에 걸음을 옮기다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계곡을 돌아 나오면 펼쳐지는 현무암 주상절리에 휴대폰 카메라 버튼 누르기도 바쁘다.
이어지는 잔교는 대부분 출렁거린다. 다리 위에서 풍경을 감상하다보면 다른 이들의 걸음이 모여 몸이 진동한다. 각각의 다리는 주변 지질에 따라 명명됐다. 예를 들어 ‘단층교’에선 화강암 절벽의 단층을 볼 수 있고, ‘돌개구멍교’에선 하천의 암박 바닥에 생긴 원통 모양의 깊은 구멍을 관찰할 수 있다. ‘주상절리교’ 주변에는 한탄강 용암지대의 층층이 쌓인 현무암 주상절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결코 쉽지 않은 길, 등산화가 어울려
철제 다리와 난간, 잔도로 이어졌다고 해서 얕잡아보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한겨울 철원의 날씨는 춥다. 바람도 매섭다. 잔도길이 얼어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계곡을 산책하는 코스이니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없이 이어진다. 당연히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등산화가 제격이다. 수분 보충을 위한 물 한 병도 꼭 챙겨야 한다. 앞서 말했듯 길에 들어서면 매점이나 화장실이 없다. 한번 시작하면 마지막까지 중간에 나가는 길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무조건 앞으로 나서기보다 천천히 페이스를 조절하며 걸어야 제대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매표소에선 왕복 3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다고 하지만 직접 걸어보니 편도 두어 시간은 걸려야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물 위를 걷는 물윗길도 추천한다. 2017년부터 한탄강 일부 구간에 부교를 띄워 태봉대교부터 순담계곡까지 8㎞를 조성한 길이다. 10월부터 3월까지 이용할 수 있는 독특한 길이다.
아, 여기서 잠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한탄강 주상절리길에 들어서면 취식이 불가능하다. 쉼터 곳곳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 이들부터 아예 막걸리판을 벌인 이들까지, 관리도 필요하지만 공중도덕도 무색한 지경이다. 취식이 불가능한 지역에 쓰레기통이 있을 리도 없다. 잔도 아래로 한탄강을 따라 이동하며 쓰레기를 수거하는 작은 고무보트가 위태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