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편한 복장들도 많지만 남자는 슈트를 의무적으로 입는다. 비즈니스와 관혼상제는 그들 삶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슈트만큼 정중함을 표현하는 복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슈트를 자주 입지만, 누구에게나 슈트는 어렵다. 어떻게든 마련하기는 하나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 여성들은 새 옷을 사러 가자는 말이 기분 전환이나 힐링이라지만, 남자는 첫 출근을 앞둔 신입사원처럼 거대한 부담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몸에 잘 맞는 슈트를 찾는 건 남자들에게 대단한 숙제다. 특히 대화보단 스마트폰, 철학보단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고 비즈니스와 일상에 바쁜 시대를 사는 남자가 자신의 복장, 그중에서도 슈트에 관심을 갖고 차츰 그 활용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시간과 돈이라는 두 가지 투자도 필요하지만, 정보의 부족이나 타인의 시선도 남자에겐 꽤 중요한 문제다. 그러므로 슈트를 잘 입는다고 평가받는 누군가는 분명 상당한 시행착오와 금전적인 투자를 몸소 실천해왔을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은데 언제나 뭔가 부담스러웠던 마음, 때로 대단한 용기를 내 인터넷이나 책으로 정보를 찾아봐도 이론만으론 그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경험을 넘어 자신만의 표현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옷장의 필수 컬러는 차콜 그레이, 네이비, 브라운
옷차림에 큰 관심이 없는 남자들도 슈트에 대해서는 한 가지 지침부터 출발할 수 있다. 멋진 슈트는 ‘옷이 비싸 보이네’가 아닌 바로 ‘당신, 오늘 정말 멋있는데!’라는 찬사를 이끌어낸다는 사실이다. 슈트에서 중요한 건 외부가 아닌 내면, 수(數)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다. 따라서 슈트는 그저 기계적으로 입어야 하는 유니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투자 개념으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빼어나게 잘 만든 슈트란 단순히 가격표와 브랜드 라벨만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훌륭한 소재와 재단술의 흔적, 슈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소비된 소중한 노동력과 시간, 열정과 철학을 통해 만들어진 브랜드의 가치가 모여서 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슈트의 가격은 소재의 질, 수작업의 양 그리고 브랜드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은 자신의 조건이다. 모든 사람이 핸드메이드 맞춤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 또한 이미 그레이 슈트를 많이 갖춘 남자가 좋은 브랜드라고 해서 또 다른 그레이를 추가할 필요도 없다.
다행히 슈트의 컬러는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법칙이 존재한다. 차콜 그레이, 네이비, 그리고 브라운 순서로 옷장을 채우는 것이다. 쥐색이라고 표현되는 차콜 그레이 컬러는 공식석상에서 애용되며 상의와 하의를 각각 독립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 처음 구입하는 슈트로 적합하다. 특히 어두운 회색 바지는 블레이저나 다른 재킷과도 활용이 가능해 두루 쓰임새가 많을 것이다. 차콜 그레이보다 밝은 그레이 컬러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슈트다. 긴장감을 덜고 여유를 갖고 싶은 자리에 어울린다. 네이비 슈트는 유럽과 한국에서 매우 사랑 받는 색상으로 보수적인 자리나 신뢰감이 필요한 자리 모두에 적합하다. 네이비 슈트의 상의는 독립적으로 다른 컬러의 바지와 함께 블레이저나 재킷처럼 입으면 활용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브라운 슈트는 아시아인에게 특별히 잘 어울리는데, 입었을 때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남다른 개성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Brioni
슈트의 시작은 클래식한 아이템부터
슈트를 입었을 때 신체와의 궁합은 실루엣에서 드러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브랜드가 자신에게 맞을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어울리는 실루엣을 가진 브랜드를 찾아내는 일이 쉬울 거라고 예상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컬러와 실루엣에 기반해 기본 스타일을 다 갖춘 후엔 좀 더 다양한 색상과 패턴이 있는 슈트로 나아간다. 이를테면 날씬해 보이는 스트라이프 슈트를 마련하고 나서, 좀 더 드레시한 더블 브레스티드, 정장 또는 캐주얼 스타일로 다양하게 입을 수 있는 면이나 리넨 소재 슈트로 옷장을 차근차근 늘려가는 것이다. 즉, 항상 좋은 슈트를 찾는 습관을 들이고 가격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면서 유행을 타지 않는, 무늬가 없고 클래식한 아이템부터 시작해 그 품목과 잘 어울리는 셔츠나 타이를 추가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체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절한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브랜드를 추천받는 것도 좋다. 자신이 입을 옷이므로 가능하면 직접 구매해야 한다. 입어보지 않고 슈트를 사는 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과 같다. 요즘 세상엔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슈트 가격은 옷의 지출 비용 가운데 대단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때문에 슈트를 살 때는 시행착오를 가능한 한 줄이는 방법에 대해 일단 생각해본다. 어떤 슈트를 입었을 때 현재의 자신보다 더 젊거나 건강해 보이거나 섹시해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브랜드라고 해도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제품이다. 물론 마음에 드는 브랜드나 제품에 끌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러나 유행과 상관없이 최대한 오래 입을 수 있고 자신이 가진 다른 옷들과 여러 상황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는 스타일을 선택하는 건 더욱 중요하다.
예를 들면 건축가는 증권회사의 매니저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옷장을 채워갈 것이다. 보수적인 기업의 임원과 스스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는 다른 스타일의 옷이 필요하다. 근무 환경, 동료와 클라이언트의 기대, 그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필요한 복장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 순서다.
자신에게 맞는 슈트 스타일을 찾기 위해선 직업 외에도 외모, 성격, 예산 같은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또한 선택한 슈트가 자신의 체형, 개성, 그리고 철학을 잘 드러내는지도 함께 살핀다. 당연히 슈트를 입는 장소도 생각해야 한다. 이를테면 싱글에 비해 드레시한 더블 슈트는 자유분방한 사무실보다는 품위나 예절이 요구되는 공간에 어울린다. 그런 보수적인 사무실이라면 네이비나 차콜 그레이 같은 어두운 색에 무늬가 없거나 핀스트라이프와 같은 미세한 패턴을 가진 스타일이 효과적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지금 바로 유행하고 있는 흐름과 반대 스타일로 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 어느 드라마에서 본 듯한 슈트 룩을 그대로 따르는 건 일견 안전한 일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상상력을 제한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미디어에서 소리 높여 외치는 최신 제품들보다, 오래된 듯한 트위드 소재의 격자무늬 슈트를 입고 있는 나이 많은 신사의 모습이 더 유쾌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유행에 상관없이 그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슈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늘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생각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옷을 고르는 습관을 들인다.
그렇게 발견한 제품이나 브랜드를 다시 자신만의 취향으로 컬러나 소재에 변화를 주면서 옷과 점점 친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신중하게 고른 슈트라면 당신이 입을 열기 전에 옷이 먼저 당신에 대해 말을 할 것이다. 이렇게 슈트의 법칙과 디테일을 알게 되었어도 여전히 슈트 앞에선 겸손해야 한다. 몇 벌의 옷으로 슈트라는 역사를 다 이해한 것처럼 구는 태도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다만 슈트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지침들을 참고하시길.
MAESTRO
슈트, 깊이 이해하기 위한 지침
-슈트는 보통 상의 70, 하의 30의 비율로 가격이 형성돼 있다. 디테일에 대한 관심도 그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슈트를 착용하고 있는 남자가 과연 어떤 브랜드를 입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슈트가 그에게 그만큼 잘 흡수되었다는 표현이니까.
-시간을 들여 슈트를 맞춰 입는 건 분명 인생의 축복이지만, 때론 비싼 맞춤복 슈트가 적절한 가격의 기성복 슈트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문제는 가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슈트에 어울리는 드레스 셔츠는 기본적으로 화이트와 블루다. 물론 이 두 가지만 고집할 일은 아니지만, 셔츠 전체 중 약 80%를 화이트와 블루로 갖추는 건 현명한 투자다. 그리고 슈트엔 늘 긴 소매 드레스셔츠를 입어야 한다. 반소매 셔츠처럼 우스운 것도 없다.
-그 드레스셔츠 안에(운동할 때나 입는) 러닝셔츠를 입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셔츠 소매는 약 1.5cm쯤 재킷 소매 밖으로 나오게 입는다. 바꾸어 말하면 재킷의 소매가 지나치게 길면 안 된다.
-슈트에는 일반적으로 벨트 혹은 서스펜더를 맨다. 몸에 잘 맞는 바지라고 확신한다면 그냥 입어도 무방하지만.
-벨트 색깔은 블랙 아니면 브라운이 일반적인데, 때로는 슈트에 위트를 주는 것처럼 네이비나 그린, 와인색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
-가능하면 구두와 벨트의 색을 비슷한 톤으로 맞추면 더 자연스럽다.
-해외로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땐 반드시 슈트와 슈트케이스를 챙겨 간다. 언제 어느 때 격식과 범절을 갖추어야 하는 유서 깊은 레스토랑에 초대될지 모르니까.
-어떤 의도가 아니라면 슈트에 전자시계나 고무 밴드 시계는 어울리지 않는다. 브라운 혹은 블랙 가죽 밴드의 시계가 좋다.
-슈트를 아래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것은 구두의 품위다. 여성들의 핸드백만큼 구두에 신경 쓰면 스타일은 높아진다.
-양말 색은 가능하면 바지 혹은 구두의 색에 맞춘다.
-자신의 감성과 체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브랜드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슈트를 입었다는 것만으로 신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슈트를 입을 때는 차림에 걸맞은 행동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남훈
2005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제일모직 ‘란스미어’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현재 패션전략컨설팅회사 ‘더 알란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종로 GS타워몰에 액세서리 편집숍 ‘알란스(ALAN’S)’를 오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