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상청의 날씨 예보가 왜 이렇게 안 맞을까’라는 생각과 ‘이렇게 더운 여름에 남자들의 복장은 어떤 게 좋을까’에 대한 고민이 교차하던 차에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에 비해 여름은 확실히 더 더워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과거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초여름 더위, 지루한 장마, 습도와 온도가 동시에 높은 무더위가 반복되던 여름에 이제 게릴라성 호우와 열대야의 불규칙적인 반복까지 추가되어 예측이 불가능한 기후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남자들의 여름 옷 입기는 만만치 않다. 영국인들은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응하기 위해 옷장 안에 레인 코트와 피케셔츠를 함께 준비했다지만, 고온 다습한 우리나라의 여름은 복장을 생각하기 이전에 일단 흐르는 땀부터 막고 싶은 심정이 우선이다. 물론 아무리 덥더라도 드레스셔츠의 소매 부분을 뚝 잘라 만든 반팔 셔츠는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지만, 소매가 없어도 피케셔츠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흔히 폴로셔츠라고도 부르는 피케셔츠는 영국의 마상 경기 폴로의 유니폼에서 유래했는데, 처음에는 스웨터 같은 질긴 소재를 쓰다가 후에 실용적인 면 소재로 정착되었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는 이 피케셔츠가 영국의 스포츠로부터 유래됐지만 정작 영국보단 프랑스나 미국에서 더 사랑받는다는 사실이다. 스포츠 콘셉트의 새로운 셔츠가 등장했을 무렵, 영국인들은 이 제품이 성(性)을 단일화하고 개성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비난했지만, 프랑스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피케셔츠는 곧바로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애초 어울리지 않는 옷은 시간 지나도 마찬가지
티셔츠처럼 피케셔츠 역시 머리 위로 입는 캐주얼 복장이고 색상도 다양하지만, 티셔츠와 조금 다르다. 즉, 단추와 깃, 네크라인이 있는 피케셔츠는 겉옷이고 목 부분이 둥근 티셔츠는 원래 속옷이었다.
그렇게 출발이 달라서 옷을 입는 용도도 달랐지만, 결정적으로 둘은 깃의 유무에서 복장의 무게가 나뉘었다. 캐주얼 복장이긴 해도 피케셔츠는 드레스셔츠처럼 깃이 있었기 때문에 재킷과의 조화도 자연스러웠고 복장을 정리해주는 맛도 있다. 물론 피케셔츠의 모양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디테일이 천차만별이고 착용의 결과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동안 왠지 자신에게 피케셔츠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그 디테일의 차이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버튼의 수, 옷깃의 모양이나 각도, 그리고 소재 차이로 피케셔츠의 표정은 확 바뀌는 것이다. 예컨대, 블레이저나 재킷 안에 피케셔츠를 입으면 엄숙한 자리만 아니라면 현대적인 의미에서 비즈니스 캐주얼이 되고 회사에 출근하는 데도 큰 무리가 없다. 면바지나 청바지와 함께 입으면 스포츠웨어의 전통을 넘어 일상적인 위크엔드 캐주얼로 전격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피케셔츠의 방식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즉, 버튼이 몇 개 있는 제품이 나의 목에 어울리는지, 그 버튼을 몇 개 풀면 좋은지, 셔츠의 끝을 바지 안에 넣어 입을 건지, 혹은 깃을 세우거나 다른 어떤 옷과 함께 입을지 등의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만약 가벼운 면 소재의 반팔 피케셔츠를 골랐다면 포멀해 보이는 울 바지보단 면바지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에서 긴 면바지 아니면 반바지, 어느 것이 내 라이프 스타일에 유의미한지 한 단계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피부톤을 고려해서 자신에게 적합한 색상을 결정한다.
이렇게 캐주얼웨어를 생각하면서 입기 시작하면, 마치 남의 것을 빌려 입은 듯한, 옷과 몸 사이의 위화감이 곧 사라진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잘 어울리지 않는 피케셔츠의 디테일이나 브랜드가 있다.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제품은 시간이 지나도 어울리지 않으며, 어떤 노력을 해봐도 개선되기 어렵다. 스스로 판단했을 때 어울리지 않는데 그저 날씨가 더워 얇은 피케셔츠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패션 감각은 늘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어울리지 않으면 다른 디테일이나 소재, 혹은 제품을 찾아야 한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옥스퍼드 소재의 피케셔츠(폴로나 라코스테 제품처럼)가 본인에게 맞지 않는다면 실크나 섬세한 면처럼 다른 소재를 시도해 보는 방법도 있다.
실크 제품의 피케셔츠는 드레스셔츠 같은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슈트나 재킷에 좀 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특성이 있고, 면 소재도 의외로 종류나 패턴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목이 좀 긴 편이라면 버튼이 3~4개, 반대라면 버튼 수도 비례해서 적은 제품을 골라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체형과 부합하는 소매길이, 그리고 착용감을 체크해 본다면, 적어도 피케셔츠에서는 실패할 일이 당분간은 없겠다.
브리오니
재킷을 벗는다고 예의에 어긋나는 건 아니다
차가운 얼음이 든 맥주 한 잔처럼 시원한 피케셔츠에는 또 어울리는 친구 같은 제품들이 있다. 여름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아이템들, 이를테면 시원한 샌들이나 가벼운 소재로 만든 재킷, 혹은 반바지가 있고, 여성들이라면 마이크로 미니스커트나 통풍성이 좋은 원피스들도 계절을 활기차게 해준다. 상대적으로 자유스럽고 통풍성도 뛰어난 여성들의 옷차림에 비해 남자들의 비즈니스 복장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비즈니스는 계속되기에, 상대를 배려하는 복장인 슈트나 재킷을 버리고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것만 같은 치열한 온도 속에서도 모든 남성들이 셔츠에 타이를 빈틈없이 매고서 데스크에 앉아 있어야 품위가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비즈니스에 클래식한 복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렇게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여름에도 비즈니스적인 예절이 필요한 경우나 좋은 레스토랑에서는 정중한 슈트나 재킷을 입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비즈니스 복장으로서는 타이 없이 재킷과 셔츠 혹은 피케셔츠 정도라면 충분하다. 요즘 사무실이나 식당에 에어컨 시설이 없는 경우는 드물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무실 안이나 편한 사람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재킷을 벗어두는 건 큰 실례도 아니다. 외부에서라도 날씨가 너무 덥다면 슈트 상의나 재킷을 벗어서 팔에 걸치고 다녀도 된다. 여기서 비즈니스 복장이냐 개인적인 복장이냐를 가르는 핵심은 바로 깃이 있는 셔츠다. 남자가 티셔츠나 스포츠웨어가 아닌 셔츠 종류를 입는다는 건 일단 복장에 예의를 부여하고 있다는 진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타일링에 뛰어난 사람이나 천재가 코디네이션에 마법을 부려도, 셔츠나 피케셔츠 없이는 비즈니스에 필요한 차림이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계절에 관계없이 슈트나 재킷이 필수적인 비즈니스맨에게는 리넨이라는 여름에 최적인 원단이 있다.
리넨은 바람이 잘 통해 착용자도 시원하고 보는 사람에게도 청량감을 주는 멋진 소재다. 비즈니스맨도 땀은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반바지에 티셔츠 혹은 슬리퍼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비즈니스맨은 자신의 옷을 선택하는 데도 타인의 기분이나 장소를 고려하는 것이다. 더운 여름에는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는 동시에 보는 사람도 시원해 보이는 리넨 재킷이나 팬츠를 입는다. 비즈니스 캐주얼은 남이야 상관없이 나만 편하면 되는 이기적인 옷차림이 아니라, 편하고 개성과도 잘 맞으면서 남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이 편안해지는 복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름에도 좋은 재킷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예산이 100이라면 슈트나 재킷에 40, 구두에 30, 그리고 나머지 바지, 셔츠, 타이, 가방 등에 30을 배분하는 것이다. 재킷이 위, 구두가 아래, 그리고 셔츠류가 몸 안에서 남자의 몸과 지성을 굳건히 받쳐주면 어떤 장소도 두렵지 않게 된다.
셔츠와 바지는 어느 정도 소모품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너무 비싸지 않은 제품들로 다양하게 갖추어 놓는다. 그런 투자를 반복하면 언젠가 옷장에는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재킷과 셔츠가 차곡차곡 모이게 된다.
세월이 흘러도 셔츠의 컬러와 디테일, 그리고 이에 맞는 바지를 바꿔주기만 하면 되니 옷차림에 일관성이 생기고, 고민거리는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남자의 복장은 조변석개하는 유행과 달리 그렇게 채워가는 것이다.
남훈
2005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제일모직 ‘란스미어’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현재 패션전략컨설팅회사 ‘더 알란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종로 GS타워몰에 액세서리 편집숍 ‘알란스(ALAN’S)’를 오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