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라는 말이 우리의 상상력과 즐거움을 자극하는 영감이 아니라, 무언가를 은연 중에 강요하는 교조가 되는 요즘의 세태를 생각하면 이 사소한 글에서도 그 말 혹은 그 의미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지 신중해진다. ‘어느 연예인은 이렇게 입더라’ ‘밀라노 남자들은 그 룩을 좋아하지’ ‘아! 새로 떠오른 최고의 브랜드는 바로 이거다’라고 쉽게들 말하지만, 정작 그런 말보단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좋은 가치를 지닌 제품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등장해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적인 룩을 조금이라도 더 개선시키는 게 훨씬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모두들 타이를 멀리하고 가벼운 캐주얼에 관심을 가질 때, 재킷과 셔츠가 기본인 비즈니스 캐주얼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고 싶고, 스니커즈의 편리함을 인정하면서도 남자 복장의 무게감을 유지해주는 구두를 새롭게 조명하고 싶다.
유럽 신사들을 예로 들자면 그들의 구두는 옷과 달리 트렌드가 거의 없다. 수트나 재킷도 기본적으론 소재나 길이, 라펠 등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 밑에서 옷을 받치는 구두는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영국이나 이탈리아, 스페인의 유수한 구두 브랜드들도 비즈니스를 위해서 시즌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하지만, 옷차림에 철학을 담은 신사들을 보면 복장에 따라 옥스포드냐 로퍼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고 결국 늘 같은 스타일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구두가 유행을 담는 물건이 아니고 품질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대상이란 사고가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자들이 옷차림에서 먼저 돈을 써야할 부분이 구두라고 알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의 구두 브랜드는 상대적으로 많은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디테일을 적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구두 바닥의 종류나 컬러를 변형해본다든지 끈이나 새들의 컬러, 포멀이냐 캐주얼이냐의 경계, 그에 따른 라스트의 특징도 자유롭게 실험해 본다. 특정한 브랜드와 어느 매장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도 만들어 낸다. 품질이나 드레스코드보다는 상업적이고 유행을 만들어내는 마케팅에 강한 나라답다. 이렇게 다른 콘셉트를 가진 구두들을 꼭 상반되게 이해하는 것보단 전통을 존중하는 큰 범주 아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즐겨보는 것, 그래서 가끔은 두 가지 아이디어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믹스하고 새롭게 표현해보는 것, 그게 구두에 대한 클래식하고 현명한 접근법이다.
Magnanni
(왼쪽)Ermenegildo zegna, (오른쪽)Ermenegildo zegna
블랙보다 브라운, 그게 어때서?
서양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비해 구두를 벗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 한국 남성들이 끈 없는 구두를 선호하는 건 일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기본적인 룰이 있고 그걸 이해한 다음 자유자재로 그 원칙들을 응용하고 때론 비틀어볼 수 있는 것이다. 클래식한 수트 차림에는 와이드 스프레드 드레스셔츠가 좋고, 쓰리 버튼 재킷이라면 가운데 버튼을 잠그는 것이 그런 종류의 원칙이다. 구두에 관해서라면 수트에는 끈이 있는 옥스퍼드 계열을 신는 것이 전통적인 대원칙이다. 군복으로부터 진화된 수트가 엄격함과 품위를 내포하고 있듯, 복식 문화를 만들어낸 영국인들은 수트와 옥스퍼드 계열의 구두를 항상 함께 하도록 했다. 물론 수트가 아닌 재킷에는 끈 없는 구두(이것을 총칭해 슬립온(Slip-on)이라고 한다)를 신어도 훌륭한 차림이 되지만, 수트에 끈 없는 로퍼를 신는 건 미스매치가 되니 유의해야 한다. 콘셉트나 스타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끈 있는 구두가 귀찮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수트에 로퍼를 신는다면 복장뿐만 아니라 삶에도 별다른 원칙이 없어 보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구두의 색상도 단지 개인의 취향을 넘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국가와 대륙을 막론하고 남성복에서 기본이 되는 수트의 색상은 차콜그레이, 네이비블루, 그레이, 브라운 이렇게 4가지다. 그리고 비즈니스 캐주얼용 재킷이라면 역시 네이비와 브라운, 그레이 계통이 많으니 구두는 아무래도 이런 복장들에 부합하는 특성을 가져야 한다.
예컨대 유럽과 일본의 비즈니스맨들은 격식에 맞게 입는 그레이 수트과 네이비 재킷에 주로 브라운 구두를 골라 신는다. 이에 반해 미국, 한국, 중국에선 블랙에 가까운 어두운 계열의 수트를 자주 입고 대부분 수트나 재킷 차림에 항상 블랙 구두만이 유일한 옵션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차원까지는 아니지만 역사를 되짚어 보면 수트나 재킷과 함께 신는 구두는 좋은 재질의 소가죽으로 만들어졌다. 품질이 뛰어난 소가죽은 본래 갈색이었다. 양털로부터 진화한 수트, 목화로 만드는 셔츠, 누에가 변신한 실크 넥타이, 그리고 소로 만든 구두, 이렇게 천연의 소재들을 주로 이용하는 남성복의 전통에서 갈색 구두는 어쩌면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기본으로 제작된 이후의 자투리나 흠집이 있는 가죽들은 어두운 색으로 염색을 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수트나 재킷, 구두와 가방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남성 복장의 핵심이 되었던 브라운이란 색상의 스펙트럼은 초콜릿, 오크, 월넛, 다크 브라운, 그레이 브라운에서 와인색까지 몹시 다양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복장에 관심을 갖는 남자들에게 언제나 환영받았다. 더불어 원래 블랙이라는 색상은 이브닝 웨어와 같은 포멀 혹은 장례식 같은 엄숙한 행사에만 적용되는 한정된 의미를 지녔다. 그러니 정장이든 캐주얼이든 남자의 복식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브라운 구두를 기본으로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다.
좋은 품질의 블랙 구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네이비나 그레이 계통의 옷과 블랙 구두는 충분히 아름다운 조합이고, 때론 블랙이 필요한 날도 있다.
다만 이 세상에 블랙은 한가지 밖에 없다. 반면에 브라운이란 컬러는 각각의 옷차림에 맞는 최선의 궁합을 생각하는 경험이 축적된다. 자신도 모르게 옷차림의 스킬이 향상되는 장점이 있다.
Magnanni
구두는 과시가 아니라 가치다
구두의 수는 다다익선은 아니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브랜드라고 해서 반드시 품질이 좋은 것만도 아니다. 특히 구두의 외관에 브랜드의 로고들을 늠름하게 장식해놓은 스타일은 더 조심해야 한다. 직접 제조하기 보단, 여타 구두 공장에 주문하고서 자신의 브랜드네임만 붙였을지도 모른다. 구두를 제대로 사기 위해선 유명 여부보다 먼저 질 좋은 가죽을 쓰는지, 그리고 실력 있는 장인이 제조하는 전통적인 브랜드인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한 좋은 구두의 밑창은 주로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가죽 밑창은 고무 밑창보다 더 나은 자세를 유지하게 하고, 걸을 때 권위 있는 소리를 내며, 무엇보다 수트 차림에 걸맞은 기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구두를 감식하기 위해 구두 회사의 역사를 살펴보거나 그 구두를 사뿐히 들고서 뒤집어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뒤집어 보았을 때 적절한 무게, 옅은 갈색의 가죽 밑창, 사람의 발과 가까운 모양이라면 일단 긍정적인 사인이다. 그 정도라면 결점을 가리기 위한 염색을 하지 않았다는 고집인 동시에, 바지 밑단 아래에서도 우아한 존재감으로 정장의 품위를 높여주기에 손색없다.
다만 보행이 잦다면 옥스포드 스타일이라도 쿠션이 가미된 고무 밑창의 구두를 신는 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렇게 품질이 좋은 구두는 적절하게 관리하면 더욱 오래 신을 수 있다. 심지어 아들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구두 관리의 핵심은 동일한 구두를 이틀 연속으로 신지 않는 것이며, 여러 가지 종류의 구두를 번갈아 신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구두의 수명을 경제적으로 늘릴 수도 있다. 또한 구두를 신은 후에는 슈트리(Shoe Tree; 구두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넣어 놓는 금속이나 나무로 만든 틀. Shoe Keeper라고도 한다)를 그 속에 넣어두면 구두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습기도 흡수해 다음날 훨씬 편한 착용감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슈트리가 없다면 신문지라는 훌륭한 대용품도 있다.
너무 많은 남성들이 멋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입고 신는 것으로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도 믿는다. 그런 일도 물론 있지만, 반대로 두 가지가 전혀 상관없는 경우도 많다. 남자의 멋이란 제품들 간의 결합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자세와 이해하는 배경까지 연결된 감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알아줄 정도로 유명하고 비싼 구두보다 조용하지만 전통 있는 구두를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멋있는 일이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과시란 남자의 매력을 사라지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점일 따름이다.
패션쇼나 광고에 즐비한 젊고 멋진 모델이 입은 수트와 구두를 결코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남성 패션 잡지들을 보며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건 환상이고 생활을 벗어난 이미지일 뿐이다.
키가 크지 않고 적당히 배도 나왔으며, 인생의 무게가 얼굴에 드리운 우리 주변의 남자가 자신의 체형을 고려해 신중하게 입은 수트와 그 수트를 굳건히 지탱하는 튼튼한 구두가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이고 가치다.
즉, 남자가 퀄리티가 뛰어난 새 구두를 사는 건, 지금 신고 있는 구두가 너무 낡았고 내일 아침 신어야 할 구두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갑자기 돈이 생겨서 어딘가에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먼저 흥청망청 술을 마시겠지만. 좋은 구두를 사는 건 한 남자의 몸을 위해 평생토록 헌신하는 발에 대한 온당한 배려이자,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가지려는 일종의 노력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비싼 술집보다 좋은 구두가 많은, 그리고 그것을 편하고 올바르게 신어보고 고를 수 있는 구두 가게가 더 많이 생기길 바란다. 남자들의 놀이터가 더 이상 골프장이나 술집만이 아니 되도록.
남훈
2005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제일모직 ‘란스미어’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현재 패션전략컨설팅회사 ‘더 알란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 GS타워몰에 액세서리 편집숍 ‘알란스(ALAN’S)’를 오픈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