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인지도를 갖고 뛰어난 제품을 생산하는 브랜드는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에르메스는 명품업계의 보석 같은 회사다.” 셀린느, 로에베, 지방시, 펜디, 쇼메, 불가리 등 60여 개 명품 브랜드를 보유한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 에르메스(HERMES)를 두고 한 말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명품업계의 공룡기업이라 불리는 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에르메스를 보석에 빗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평가이자 프러포즈다. 2010년과 2011년, 올해도 여전히 에르메스를 인수합병하려는 아르노 회장의 의지는 그만큼 확고부동하다.
지난해 말 LVMH가 에르메스 인터내셔널 지분을 21.4%까지 확보하자 72%를 보유한 에르메스 가문이 경영권 방어에 나서기도 했다. 적대적 인수 시도가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한 에르메스 가문은 자신들이 지분 50.2%를 갖는 120억 유로 규모의 새로운 지주회사를 세웠다.
이렇듯 에르메스 경영권을 놓고 부딪친 ‘LVMH vs 에르메스 가문’의 대결은 이른바 구찌전쟁 이후 명품업계 최대 이슈 중 하나다. 유럽의 인수합병 전문가들은 “최대 단일 투자자인 LVMH와 에르메스 가문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말하기도 한다.
2005년부터 전문경영인으로 에르메스를 이끌고 있는 파트리크 토마 회장은 지난해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냥 에르메스가 아니라 에르메스 파리”라며 “엄청난 마케팅으로 겉은 번쩍하지만 내면의 빛이 없는 것과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이 우러나는 진정한 명품이 있다”고 직접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약 98% 제품을 유럽권에서 수공업으로 생산하는 에르메스에 비해 타사 명품은 유럽 외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찍어내 희소성 면에서 다르다고 콕 짚어 표현한 것이다.
지난해 한·EU FTA가 발효되던 시점을 떠올려보면 에르메스의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당시 국내시장을 주름잡던 내노라하는 명품의 가격정책은 서로 달랐다. 유럽산 명품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어떤 제품은 가격이 올랐고 다른 제품은 가격을 올렸다 내린 반면 에르메스는 내렸다. 한·EU FTA는 EU국가가 아닌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해당 국가 관세를 거쳐 유통되는 경우는 효력이 없다. 즉, 비 EU지역에서 생산되거나 여타 국가를 거쳐 국내에 배분되는 경우는 관세 철폐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원산지와 생산지, 선적지가 EU권인 에르메스는 당시 가격을 평균 5%가량 내렸다. EU권 내에서 98%의 제품을 생산하는 명품 중 명품이라는 게 에르메스 자신감의 원천이다.
에르메스 도산 파크 실내.
175년 가문의 역사, 에르메스
에르메스의 역사는 한 가족과 그 가업을 그린 이야기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1837년 에르메스사의 창업자인 티에리 에르메스는 파리에 안장과 마구용품 사업을 시작했다. 1879년에 그의 아들이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로 자리를 옮겨 마구제조업으로 사업을 확장시킨다. 1918년 자동차가 출현하자 손자 에밀 에르메스는 교통수단의 변화를 예측해 새로운 생활양식을 구상한다. 그는 안장을 만들 때 사용되는 독특한 박음질법 ‘새들 스티치’를 그대로 도입한 고품질의 가죽제품과 여행용 가방을 론칭했다. 이 시기에 에르메스 스타일이 탄생한다. 이외에도 에밀 에르메스는 개인 컬렉션을 시작해 현재의 포부르 생토노레 24번지의 매장 내에 에르메스 박물관을 설립했다.
에르메스는 1929년 뉴욕에 첫 매장을 오픈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 후 20여 년 동안 향수, 타이, 맞춤복, 기성복, 비치 타월, 에나멜 장신구, 여성복과 남성복을 생산하게 된다.
1978년 장 루이 뒤마(Jean Louis Dumas)가 그룹의 회장으로 선출된 후, 특히 시계와 테이블웨어 등 새로운 라인을 도입했고 아시아와 호주 지역에도 지속적으로 매장을 늘려나갔다.
에르메스 가문의 5대손인 장 루이 뒤마 회장이 200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당시 공동 CEO였던 파트리크 토마 회장이 현재 에르메스를 이끌고 있다. 6대손이자 아트디렉터로 선임된 피에르 알렉시 뒤마가 경영에 참여하게 될지는 미지수. 현재 에르메스는 세계 각 지역에 총 79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약 300여 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5분의1은 본사 직영이다. 1975년 수제화 전문브랜드 존 롭(John Lobb)이 에르메스 인터내셔널 그룹(Hermes International Group)에 합류한 후, 여러 명품 브랜드가 에르메스와 함께하고 있다. 1990년 명품구두메이커 에드워드 그린(Edward Green)과 직물업자인 벨발 그룹의 페렝베럴(Perrin Verel de Belval Group)이, 모쉬(Motsch)는 1992년, 크리스탈러리 생 루이와 퓌포카(Christalleries Saint Louis et Puiforcat)는 1994년에 합류했다.
포부르 생토노래 24번지의 에르메스 박물관
6대에 걸친 가업1代. 티에리 에르메스(1837~1878)
1801년 독일 크레펠드(Crefeld)에서 태어났다. 당시 신교도를 따르던 그의 가정은 1828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1837년 파리 마드레인 광장의 바스 듀 름파르에서 마구상을 시작한다.
2代. 샤를-에밀 에르메스(1878~1916)와 그의 아들들
1880년경 부유한 고객들이 많은 포부르 생토노레에 매장을 열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아버지 티에리 에르메스가 세상을 뜨자 1878년 가업을 계승했다.
1889년부터 샤를 에밀과 그의 장남 아돌프가 에르메스를 운영하며 부티크 사업으로 확장하게 된다. 1878년 만국박람회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고 1892년 켈리백의 원형인 ‘오트 아 크루아(Haute a Courroies)’ 가죽끈 가방을 선보였다. 막내 아들인 에밀 모리스는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러시아 등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3代. 에르메스 형제 (1902~1919)
1902년 에밀 모리스는 수출 개발, 마차 제조업체와의 업무를 담당하며 그의 형 아돌프의 사업에 동참한다. 당시 사회는 마차 제조업체들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때였다.
세계 1차 대전 중 에밀 모리스는 당시 유럽에 소개되지 않은 지퍼를 프랑스에 들여와 에르메스만 사용할 수 있게 특허를 냈다. 1922년 형의 주식을 인수한 에밀 모리스는 벨트, 장갑, 의복, 보석, 손목시계, 여행 도구 세트, 스포츠 및 자동차 소품 등의 기존 제품군에 ‘새들 스티치’ 방식의 가죽 소품들을 포함시켰다. 대공황기에 ‘켈리백’ ‘삭 아 데페쉐(Sac a Depeches·기자들을 위한 가방)’, ‘샹 덩끄르(Chaine d’Ancre·은팔찌)’ 등이 소개됐고 곧 에르메스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4代. 로베르 뒤마(1951~1978)와 장 르네 게랑(1901~1993)
로베르 뒤마 에르메스는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경영학으로 전과했다. 1928년 에밀 에르메스의 딸과 결혼해 에르메스의 협력자가 된다. 1951년 에르메스의 최고경영자가 된 로베르 뒤마는 특히 스카프 디자인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돈이던 장 르네 게랑에르메스와 긴밀한 협조 하에 일하게 된다. 1949년에 타이, 1950년 장 르네 게랑-에르메스가 오 데르메스(Eau d’Hermes) 향수, 기타 재떨이, 목욕 타월 등을 속속 개발했다. 1970년대는 유럽, 일본, 미국에 새로운 매장이 오픈됐다.
5代.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 (1978~2010)
로베르 뒤마의 아들 장 루이 뒤마-에르메스는 1978년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됐다. 그는 전통적 기법에 수공 전문성을 가미해 실크, 가죽, 의복 부문을 재조직, 활성화한다. 그는 스위스 자회사를 통해 에르메스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팔찌, 자기류, 은식기류, 크리스털 등을 속속 선보였다. 1976년 모회사가 설립됨에 따라 에르메스 인터내셔널 그룹은 전 세계로 세확장에 나섰다.
6代. 피에르 알렉시 뒤마 (1992~)
미국 브라운 대학의 비주얼 아트에서 미술학사를 수료한 피에르 알렉시 뒤마는 2009년부터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를 맡아 에르메스의 모든 크리에이티브와 커뮤니케이션 부서를 총괄 지휘하고 있다. 또한 2008년 4월 설립된 에르메스 재단이 설립되면서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에르메스 가죽가방 제작과정
새들스티치 작업.
퍼즐 맞추기 작업.
가장자리 광내기.
구슬 못 작업.
1. 재단 - 가방 제작 시 사용하는 송아지 가죽은 약 1.7㎡. 우선 재단사는 하루에 대여섯 개의 가방을 제작할 수 있는 양의 가죽을 커팅하고 가방의 모양, 균일한 컬러, 마블링, 척추 부분의 주름을 읽는다. 흠 없이 깨끗한 부분,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품질이 가장 좋은 부분을 찾아야 한다. 즉 재단이 가죽가방 제작의 핵심이다.
2. 준비 - 장인은 가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가죽, 안감, 더블 안감, 작은 나사, 버클, 금속판, 리벳 등을 준비한다. 모든 작업은 커팅된 가죽이 담긴 트레이가 장인의 데스크로 배달되며 시작된다. 각각의 제품에는 장인의 데스크 번호와 제작된 해가 기록된다. 그래서 수년 혹은 수십년 후 고객이 제품 수선이나 교환을 원할 때 원래 제작된 장인의 데스크로 배달된다. 모든 작업은 장인 한 사람의 몫이다.
3. 퍼즐 맞추기 - 첫 단계는 안감을 내부 포켓에 박음질하는 작업이다. 그 후 가방 바닥을 더욱 견고히 하고 작은 스트랩과 거셋(덧천)을 위한 더블 안감과 안감으로 사이즈를 잡은 후 왁싱 처리가 된 실을 사용해 새들 스티치로 꿰맨다. 가방의 뒷면이 될 가죽은 작은 스트랩으로 꿰맨다. 그 후 가방 바닥의 앞면과 뒷면을 꿰맨다. 이 과정까지 가방은 아직 펼쳐진 상태를 유지한다. 이후 견고한 핸들을 만드는데 그 아치는 손으로 조각하듯 만들며 5개의 가죽으로 제작된다. 손잡이 혹은 핸들 루프는 가방의 몸체에 박음질된다. 장인이 가로로 된 거셋을 사용해 몸체의 양 옆, 앞면 및 뒷면을 조립할 때야 비로소 가방은 그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4. 새들 스티치 - 먼저 장인은 가죽을 안고 자리를 잡는다. 작업을 해야 하는 가죽은 장인 다리 사이에 놓인 큰 목재 집게 안에 단단히 고정된다. 장인은 양손에 바늘을 잡고 새들 스티치를 시작한다. 우선 바늘이 들어갈 구멍을 송곳으로 뚫고 두 바늘을 서로 교차시키며 바느질한다. 스티치는 가죽 종류와 결과물의 크기에 따라 2.5cm당 5번에서 14번 이뤄진다. 기계 박음질과 달리 방향은 항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며 모든 스티치가 동일한 조임과 사이즈로 이뤄진다.
5. 실 - 에르메스는 프랑스산 리넨 실만 사용한다. 100가지 이상의 다양한 색상으로 나오는 이 실은 굵기에 따라 150m에서 600m의 다양한 길이로 된 실타래와 실패 형태로 공방에 도착한다. 각 실마다 색상번호가 지정돼 있다. 켈리백의 경우 약 20m의 실이 필요한 반면, 빅토리아 여행용 가방은 약 30m가 필요하다.
6. 디테일 - 특정 디테일과 마감처리로 에르메스 가죽제품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제품이 된다. ‘가장자리 광내기’ 안장구에서 비롯된 테크닉이다. 가죽 가장자리가 드러난 부분은 사포로 부드럽게 버핑하고 수차례의 염색과 윤택 과정을 거쳐야 습기 내성도와 부드러운 감촉을 유지할 수 있다. ‘구김 작업’ 장인은 작업품의 윤곽을 인두로 표시한다. 완벽한 직선을 얻기 위해 안정된 손길이 필요하다. ‘구슬 못(Beading Rivets)’ 자물쇠와 더불어 금속이 들어가는 부분은 작은 못으로 가방에 부착된다. 망치로 평평하게 만든 후 마무리 단계로 못의 머리를 살짝 구부린다. 동일한 방식으로 지퍼의 이도 더 부드럽게 잠기고 부드러운 느낌이 나도록 윤을 낸다.
7. 뒤집기 - 가방 작업이 끝나면 장갑처럼 뒤집어야 한다. 가죽이 다치지 않고 자국이 남지 않도록 ㎝ 별로 진행한다. 우선 장인은 손을 가방 안에 넣어 손가락 지문 부분으로 네 코너를 안으로 살짝, 가죽을 부드럽게 돌린다. 장인은 가방의 모양을 다시 다듬게 되는데 가장자리는 살짝 망치질하고 스팀다리미를 약하게 이용하여 핸들링한 자국을 없앤다.
8. 시그니처 - 장인의 손을 떠나기 전 제품에 금속의 색에 따라 골드나 실버로 된 ‘Hermes Paris’ 로고와 완성연도, 장인의 시그니처가 새겨진다. 이 시그니처는 제품의 완벽성에 대한 보증서인 셈이다.
에르메스 가방의 이름과 유래
1892년 삭 오타크루아(Sac haut a Courroies)
에르메스의 첫 번째 가방으로 켈리백, 버킨백의 원형이다. 원래는 마구를 넣던 큰 가방이다.
1923년 볼리드(Bolide)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인 지퍼를 단 가방. 에르메스는 당시 프랑스에서 지퍼에 대한 특허를 낸 상태였다. 이 가방은 운동기구를 넣기 위한 여행용 가방으로 만들어졌다. 자동차에 쉽게 실을 수 있는 모양이라 ‘볼리드’란 이름이 붙었다. 불어로 아주 빠른 자동차란 뜻이다.
1935년 켈리(Kelly)
삭 오타크루아의 사이즈를 작게 만들어 스트랩을 단 가방. 그레이스 켈리가 빨간 악어가죽 소재의 가방을 들고 임신한 그녀의 배를 가린 사진이 ‘라이프’지 표지에 실린 후 켈리백이라 불리고 있다.
1967년 플륌(Plume)
1930년대 담요 가방에서 힌트를 얻은 디자인. 가볍기 때문에 플륌(깃털)이라는 애칭을 갖게 됐다. 심플하면서도 기능적이다.
1969년 콩스탕스(Constance)
다섯 번째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던 한 장인에 의해 디자인됐다. 가방이 완성됐을 때 아이가 태어나 아이의 이름이 붙었다. 에르메스의 ‘H’로 가방 뚜껑을 대체했고 가방을 메는 이의 키, 취향과 장소에 따라 끈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1978년 에블린(Evelyne)
펀칭 기법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H’가 독특하다. 기수들이 마구 제품을 넣고 다니도록 만들어졌고 젖은 제품이 잘 마를 수 있게 ‘H’가 펀칭됐다. 에르메스 가방 중 유일하게 스트랩이 캔버스 소재다.
1984년 버킨(Birkin)
여배우 제인 버킨을 위해 디자인된 가방. 비행기에서 우연히 버킨 옆자리에 앉게 된 장 루이 뒤마 회장이 정리 정돈이 안 되는 그녀의 혼잡한 가방을 보고 ‘소지품이 전부 들어가는 가방’을 제안해 탄생했다.
1998년 에르백(Herbag)
조립식으로 된 특이한 가방. 깃털처럼 가볍다.
2004년 파리-봄베이(Paris-Bombay)
인도 출신의 에르메스 가죽 장인이 의사 왕진 가방에서 영감을 얻어 고안했다. 사이즈에 비해 입구가 넓어 사용이 편하고 소가죽을 안감으로 사용해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운 고색을 띤다.
2007년 린디(Lindy)
2007년 ‘춤의 해’를 맞아 에르메스는 율동적인 디자인과 패턴을 선보였다. 린디는 스윙댄스 장르 중의 하나에서 유래됐다. 핸드백과 숄더백을 각각 다르게 연출할 수 있는 에르메스의 대표 가죽 가방 중 하나다.
2008년 집시에르(Jypsiere)
버킨을 쿠리에백(Courrier Bag·메신저 백의 형태)으로 변형시킨 모델. 버킨의 모든 고급스러운 디테일들을 그대로 살리면서 옛 사낭꾼, 농부, 어부들이 어깨에 메던 게임 백(Game Bag)에 착안해 장 폴 고티에(Jean-Paul Gaultier)가 재탄생시킨 모델이다.
2010년 툴 박스(Tool Box)
장인들의 공구함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도 ‘공구함’에서 차용했다. 밖에서 보면 작고 꽉 짜인 것 같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