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랜스포터'에서 폭발적인 액션을 선보인 터프가이 제이슨 스타뎀. 단순무식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0.1초 단위의 정밀한 작전을 구사하는 전직 정보요원임을 암시하는 패션 소품이 등장한다. 거친 팔뚝을 감싼 채 차갑고 투명한 빛을 발하는 ‘오피신 파네라이 루미노 마리나(Officine Panerai Luminor Marinar)’.
시계에 관심 없는 사람은 눈치조차 못 챘겠지만 시계 마니아들에겐 이 찰나의 순간 파네라이의 매력이 섬광처럼 작렬한다. 미국과 유럽에선 영화가 끝나자마자 가격이 최소 7000달러를 넘는 파네라이의 루미노 마리나 모델을 사기 위해 시계 매장으로 달려간 마니아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를 이용한 PPL (Product in placement) 마케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시계 마니아를 겨냥한 영화 속 명품시계 PPL은 무수히 많다.
은연 중 노출시키는 수법을 넘어 노골적으로 시선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서 톰 크루즈의 시계로 등장한 IWC의 ‘마크15(Mark ⅩⅤ)’,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서 맷 데이먼이 차고 다닌 태그호이어(TagHeuer)의 ‘링크 크로노그래프(Link Chronograph)’는 신분증과 함께 책상 위에 풀어 놓은 장면을 1~2초씩 비춰주면서 시계에 무관심한 관객조차 “저 시계 뭐지”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숱한 폐인을 양산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는 주인공 현빈의 크로노스위스(Chronoswiss) 시계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크로노스위스로서는 비교적 저렴한(?) 1000만원대였다고 한다.
제조사 광고전략과 미디어의 필요… 시계산업 급 팽창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크로노스위스 시계를 착용하고 있는 현빈.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파이낸셜타임즈'나 '월스트리트저널'의 값비싼 광고란은 예거 르 쿨트르(Jaeger Le Coultre),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 율리스 나르당(Ulysse Nardan),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같은 고가 프리미엄 시계들이 점령하고 있다.
신문사들의 광고 선호 기준 때문이기도 하다. 직경 40mm 안팎의 시계 자판은 스위스의 시계 장인과 디자이너들이 심혈을 기울인 예술 작품이다. 빛을 완벽하게 투과시키는 무반사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의 영롱함, 문 페이스(moon phase; 한 달 단위로 달이 기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기능)의 우아함, 백금 코팅 시계바늘(hand)의 칼날 같은 피니싱은 시계 마니아들에겐 눈부신 찬탄의 대상이다.
'파이낸셜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 제작자들로서도 지면의 미적 완성도와 품격을 위해 등산화나 전동드릴 광고보다는 명품시계 광고를 먼저 실어줄 수밖에 없다. 제조사의 광고 전략과 미디어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명품시계 산업은 급속히 팽창하고 있다.
남성들이 패션에 눈뜬 우리나라에서 명품시계는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롯데·현대 등 주요 백화점의 명품시계 매출이 2009년부터 35~44%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올해 1~5월까지 매출 증가율은 50%에 육박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세계 어디서나 명품시계 소비자는 90% 이상 남자라는 점. 여자들의 패션 로망이 에르메스 버킨백이나 루이비통 스피디백 같은 고가 명품 핸드백이라면 명품시계는 남자들의 로망이자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 남자들은 시계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명품 소비계층에 들지 못하는 필자는 주로 타임포럼, 플라이워치 등 중고 매매 교환 사이트를 통해 다양한 시계 브랜드를 섭렵해 보았다. 시계 자체보다는 시계를 거래하면서 만나는 마니아들의 세계가 더 흥미로웠다. 몇 푼 안 되는 급여를 모아 100만원대 중고 태그호이어 까레라(Carrera) 논크로노 모델을 손에 넣고 환하게 웃던 의경. 중고 롤렉스(Rolex) 수집이 취미라면서 아우디A8을 몰고 나타난 건설업자. 시계를 너무 좋아해 잠잘 때와 샤워할 때도 24시간 시계를 차고 산다는 서초동의 한 치과의사. 자정 넘어 타임포럼에 올린 오메가 시마스터 아쿠아테라(Omega Seamaster Aquaterra) 블루핸즈 모델을 구입하려고 수원에서 아침 7시에 회사로 찾아온 대학원생. 중고 불로바 아큐트론(Bulova Accutron) 쿼츠를 필자에게 팔고 돌아가면서 시계와 함께 좋은 추억 많이 남기라는 덕담을 메시지로 보냈던 미국 유학생.
과연 시계는 어떤 마력으로 남자들을 사로잡는 걸까. 그동안 만난 시계 마니아들과 나눴던 대화를 통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보았다.
움직이는 것에 대한 남자들의 본능적 반응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서 맷 데이먼이 차고 나와 화제가 된 링크 컬렉션을 착용한 맷 데이먼.<br>태그호이어 링크 크로노그래프.
남자들이 시계에 열광하는 첫 번째 요인은 움직이는 것에 대한 남자들의 본능적 반응이 아닌가 싶다. 누가 그러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건만 남자아이들이 인형보다는 자동차 장난감을 훨씬 더 선호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액세서리’인 시계는 남자들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또 단순히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보(時報)’라는 유용하면서도 절대적인 메시지를 전해준다. 시선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는 아름다운 비서이자 애인이며 정직한 말벗이다.
두 번째, 시계는 남자들의 단순하고 완고한 패션코드와 일치한다. 여성복은 정해진 틀이나 기본형이 없다. 색상이나 디자인이 천변만화다. 트렌드도 해마다 계절에 따라 쉴 새 없이 변한다. 하지만 남성복은 디테일의 변화는 있더라도 넥타이와 셔츠, 슈트라는 기본형이 결코 바뀌지 않는다. 색상도 다크블루와 그레이, 브라운, 블랙 등 네 가지 색조에 한정된다. 명품시계도 디테일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이지만 시침과 분침이 360도로 돌아간다는 기본 구조는 똑같다.(초침만 따로 돌아가는 스몰세컨드 타입도 드물지 않다).
세 번째, 시계는 남자들의 ‘귀차니즘’에 영합한다. 여자들은 기껏해야 외출할 때나 쓸 수 있는 핸드백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목걸이나 귀걸이, 브로치 등도 옷과 분위기에 따라 다른 것으로 연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들의 유일한 장신구라고 할 수 있는 시계는 비즈니스나 연구 공간에서도, 애인과 밀어를 나누는 카페에서도, 스쿠버 다이빙하러 바닷속에 들어갈 때도 함께할 수 있다. 스포티한 느낌의 크로노그래프 시계 중에서 적당한 두께의 것이라면 어떤 옷이든 어떤 상황이든 매치할 수 있다. 시계 하나 잘 고르면 액세서리 고민은 끝이다.
넷째, 시계는 남자들의 ‘본능적 바람끼’를 대리 충족해 준다. 시계 마니아치고 마음에 드는 시계를 하나 골라 몇 년이고 일편단심 차는 사람은 없다. 시계 마니아들은 늘 기변(기기변경)의 충동과 유혹에 사로 잡혀있다. 시계는 애인처럼 늘 곁에 둘 수 있지만 언제든지 갈아치워도 탈이 없다.
남자들이 예외 없이 열광하는 자동차는 일단 사면 좋든 싫든 몇 년간은 타야 한다. 자동차 기변에는 엄청난 번거로움과 경제적 손실이 따른다. 시계는 국가나 지자체에 등록할 필요도 없고 동시에 여러 개를 소유한다고 세금을 더 낼 의무도 없다.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시계 마니아들은 자동차와 애인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시계로 대신 해소하는 게 아닐까.
다섯째, 시계는 계급 질서를 인정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남성들의 상승 욕구를 반영한다. 명품 핸드백 브랜드도 등급이 있지만 시계에서 명품의 등급은 군대의 계급을 방불케 한다. 여러 개의 시계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는 스위스의 스와치 그룹을 예로 들어보자. 명품 대열에는 끼지 못하고 문턱쯤에 위치한 스와치(Swatch)는 스와치 군단의 방위병이다. 그 위에 일병이나 상병급인 캘빈클라인(Calvin Klein)이 있다. 병장급이 티쏘(Tissot), 본격 기계식 시계라인으로 소위급에 해당하는 브랜드가 최근에 인수한 해밀턴(Hamilton)이다. 그 위에 위관급으로 론진(Longines), 미도(Mido)가 있고 장성급에 조금 못 미치는 라도(Rado), 오메가(Omega) 등을 거쳐 ‘별’이 빛나는 브레게(Breguet)와 블랑팡(Blancpain) 등이 정점을 차지하고 있다.
하이엔드 프리미엄인 브레게나 블랑팡, 피아제(Piaget), 파텍필립(Patek Philippe)과 스탠다드 프리미엄인 롤렉스,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IWC와 오메가, 브라이틀링(Breitling), 태그호이어 간에 서열은 엄격하다. 한번 형성된 브랜드 서열이 하극상을 일으키는 경우도 거의 없다. 군인들에겐 계급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병과(兵科)’도 중요하다. 취사병이나 위생병을 군인다운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듯이 명품시계 대열에서 행세하려면 시계를 작동시키는 무브먼트가 기계식이어야 한다.
전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프링의 탄성과 중력을 이용해 스스로 작동하면서 오차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기계공학과 정밀계측공학의 결정체여야만 시계다운 시계인 것이다. 명품시계의 세계에서 전지로 작동하는 쿼츠는 시계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일본 세이코(Seiko)사가 1970년대 중반 저렴하면서도 정확한 쿼츠 무브먼트 시계를 내놓으면서 스위스 명품시계 제조사들이 일제히 사라질 뻔하다 살아난 것도 쿼츠를 백안시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쿼츠도 친환경 콘셉트로 진화하면서 빛으로 충전되는 시티즌(Citizen)의 에코드라이브(Eco drive), 흔들기만 하면 충전되는 세이코의 키네틱드라이브(Kinetic drive)가 독자적인 시장 수요를 만들어 가고 있긴 하다.
단순한 기능적 액세서리 이상의 코드
본론으로 돌아가 롤렉스를 기준으로 그 아래 등급인 오메가나 태그호이어는 예외적으로 쿼츠 모델도 생산하지만(최근 오메가는 브랜드 이미지 관리를 위해 쿼츠 생산을 중단했다) 롤렉스 이상 급에서는 쿼츠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남자들은 군대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수직적 계급 질서를 민감하게 의식한다. 동시에 그 안에서 주도권을 잡고 상승하려는 욕구가 있다. 해밀턴 재즈마스터(Jazz master) 수준으로 명품시계의 세계에 입문한 마니아가 자신의 경제적 능력 상승에 맞춰 오메가 브로드애로우(Broad Arrow)나 브라이틀링 슈퍼오션(Super Ocean), 롤렉스 서브마리너(Submariner)로 수준을 높이려는 것은 계급 상승욕구의 단면이기도 하다. 마니아에게 있어 시계란 단순한 기능적 액세서리가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 성취,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과시하는 지표이자 성공을 향한 열망을 보여주는 코드다. 물론 필자가 제시한 다섯 가지가 남자들이 명품시계에 열광하는 이유의 전부도 아니고 진정한 이유가 아닐 수도 있겠다.
물욕이나 소유욕이 고상한 패션 감각으로 위장된 자기 과시욕과 맞물린 기형적 소비행태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휴대폰, PC, 자동차에서 언제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라질 줄 알았던 기계식 아날로그시계의 수요가 오히려 더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의 시계에 대한 로망과 애착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명품시계 선호는 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의 소비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이제 한국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던 시계 마니아들이 늘어나면 ‘기변 경쟁’이 소비 촉발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고도의 디자인 감각과 정밀계측공학이 결합된 시계 제조업은 브랜드 파워를 통해 엄청난 고수익 창출이 가능한 알짜 산업이다. ‘스위스의 아성은 난공불락’이라는 고정관념에 주눅 들어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IT와 자동차처럼 시계 산업에서도 세계 제패에 한번 도전해 볼 것인가.